12. 보편적인 것은 없다
동시 이야기
설결이 스승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외물에서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 측면을 알고 계십니까?”
齧缺問乎王倪曰: “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曰: “吾惡乎知之!”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子知子之所不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曰: “吾惡乎知之!”
“그러면 외물이란 알 수 없다는 겁니까?”
“然則物無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 아는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겠는가? 이제 시험 삼아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曰: “吾惡乎知之! 雖然, 嘗試言之: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耶?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耶? 且吾嘗試問乎汝: 民濕寢則腰疾偏死, 鰌然乎哉? 木處則惴慄恂懼猨, 猴然乎哉? 三者孰知正處? 民食芻豢, 麋鹿食薦, 蝍且甘帶, 鴟鴉耆鼠, 四者孰知正味?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이나 여희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버린다네. 이 넷 중 어느 쪽이 ‘올바른 아름다움’을 안다고 하겠는가?” 「제물론」 18
猨猵狙以爲雌, 麋與鹿交, 鰌與魚游. 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 自我觀之, 仁義之端, 是非之塗, 樊然淆亂, 吾惡能知其辯!”
“모두가 옳다고 생각한다”
「제물론」 편이 장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은 옳은 평가입니다. 하지만 이런 평가가 나온 데에는 철학 전공자들의 지적 우월 의식도 한몫 단단히 합니다. 철학자들은 보통 추상적 사유나 논리적 사유를 좋아합니다. 주장에 상식을 넘어서는 심오함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 주장은 충분한 근거들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철학자들은 『장자』를 수놓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불편해합니다. 일종의 문학 작품이기 때문이죠. 비록 시만큼은 아닐지라도 장자가 쓴 이야기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주장, 이유, 전제, 결론, 논쟁, 논변 등을 선호하는 철학자들이 『장자』를 껄끄러워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렇지만 장자는 사상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철학자여서 우회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난처한 상황에 빠진 철학자들에게 「제물론」 편은 목마른 사람에게 내리는 단비와 같습니다. 바람 이야기처럼 최고 수준의 문학성을 자랑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제물론」 편에는 상대방의 주장을 논박하거나 혹은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는, 얼핏 보아도 철학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편에 등장하는 철학적 이야기들이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철학적 연습이 충분한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들이 「제물론」 편에 집중되어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시 이야기’는 아마 「제물론」 편의 철학적 이야기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일화일 겁니다. 이야기 제목에 들어 있는 ‘동시(同是)’라는 단어를 보세요. ‘함께’나 ‘모두’를 뜻하는 ‘동(同)’과 ‘이것이다’나 ‘옳다’는 뜻의 ‘시(是)’로 구성된 ‘동시’는 “모두가 옳다고 생각한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시 이야기는 철학자들에게 익숙한 인식론(epistemology)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설결과 왕예라는 가상의 두 인물은 인식의 타당성과 한계를 토론합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설결이 장자의 페르소나 왕예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외물에서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 측면을 알고 계십니까?” 이미 우리는 모든 문맥과 무관한 절대적 의미를 장자가 부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장자는 문맥주의자니까요. 개똥은 거름으로도 쓸 수 없는 배설물이지만, 어떤 때에는 요긴한 약재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왕예는 설결의 질문에 대해 “외물에서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 측면”, 즉 외물의 본질 따위는 없다고 대답하면 됩니다. 하지만 왕예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라며 확답을 피합니다. 왕예의 반문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질이 있다 해도 그것을 알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본질이 없다면 당연히 그것을 알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왕예의 애매한 반문을 듣자마자 설결은 그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설결이 왕예의 반문을 첫 번째 뜻으로 이해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범주론(Categoriae)』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는 제1실체와 제2실체를 구분합니다. 제1실체가 개별자나 개체라면 제2실체는 보편자나 본질을 의미합니다. 개똥을 생각해보세요. 개똥도 약에 쓴다고 할 때, ‘개똥임’과 ‘약임’이 제2실체의 사례입니다. 그렇지만 개똥으로 보든 약재라고 보든 무언가 자기 동일적인 X가 있다고 할 수 있죠. 바로 이 X가 제1실체인 셈입니다. 개똥인 X와 약재인 X는 아무리 다르더라도 동일한 X가 아니냐는 발상입니다. X는 미지수 X가 상징하듯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무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죠. 이제야 설결이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은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제2실체로서 보편자를 부정해도 제1실체로서 개별자는 긍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없었다면, 설결의 두 번째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 등장하는 ‘표상(表象, Vorstellung, Representation)’과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e Thing-in-Itself)’라는 개념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개똥(으로 보이는 것)과 약재(로 보이는 것)가 ‘표상’이라면, 그 자기 동일적인 X를 ‘물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결의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라는 질문은 칸트식으로 번역하면 “선생님께서는 물자체 혹은 물자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라는 질문이 됩니다. 그렇다면 왕예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놀랍게도 왕예의 대답은 설결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았습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물자체가 없으니 그것은 알 수 없다는 거죠. 이렇게 제1실체마저 개별자마저 깔끔하게 부정된 겁니다.
인용
11.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 13. 선과 악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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