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두 다리의 변증법
뒤처진 양 이야기
전개지(田開之)가 주(周)나라 위공(威公)을 만났다. 위공이 말했다. “나는 축신(祝腎)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축신과 함께 배웠다는데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田開之見周威公, 威公曰: “吾聞祝腎學生, 吾子與祝腎游, 亦何聞焉?”
전개지가 말했다. “저는 비를 들고서 뜰 앞에서 시중을 들었을 뿐이니 스승님으로부터 무엇을 들었겠습니까?”
田開之曰: “開之操拔篲以侍門庭, 亦何聞於夫子!”
위공이 말했다. “선생은 너무 겸손하시네요. 나는 듣고 싶습니다.”
威公曰: “田子無讓, 寡人願聞之.”
전개지가 말했다. “저는 스승님께서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중 뒤처진 놈을 발견하여 채찍질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걸 듣기는 했습니다.”
開之曰: “聞之夫子曰: ‘善養生者, 若牧羊然, 視其後者而鞭之.’”
위공이 말했다. “무슨 뜻인가요?”
威公曰: “何謂也?”
전개지가 말했다. “노(魯)나라에 선표(單豹)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위 굴 속에 살고 골짜기 물을 마시며 민중들과 이익을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70세가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안색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행하게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그 호랑이에게 잡아 먹혀 버렸습니다. 또 장의(張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높은 문을 가진 귀족의 집이든 문 대신 발을 사용하는 민중의 집이든 달려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40세에 몸 안의 열병으로 죽어버렸습니다. 선표는 그의 안을 길렀으나 호랑이가 그의 바깥을 잡아먹어버렸습니다. 장의는 그의 바깥을 길렀지만 병이 그의 안을 공격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중 뒤처진 놈을 채찍질하지 않은 겁니다.”
田開之曰: “魯有單豹者, 岩居而水飮, 不與民共利, 行年七十而猶有嬰兒之色, 不幸遇餓虎, 餓虎殺而食之. 有張毅者, 高門縣薄, 無不走也, 行年四十而有內熱之病以死. 豹養其內而虎食其外, 毅養其外而病攻其內. 此二子者, 皆不鞭其後者也.” 「달생」 5
헤겔의 변증법과 장자의 변증법
헤겔의 트레이드마크는 변증법입니다. 헤겔은 변증법을 인간의 사유나 인간 바깥의 세계가 발전하는 법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은 정(正, these), 반(反, antithese) 그리고 합(合 synthese)이라는 세 박자로 발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에서 헤겔은 남편, 아내, 자녀를 정, 반, 합의 사례로 사유한 적이 있습니다. 외모만 보아도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징을 묘한 비율로 닮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양(止揚, Aufheben)입니다. 아이의 외모는 아버지의 특징과 어머니의 특징을 극복하지만 동시에 보존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삼박자로 작동하는 변증법 운동은 가족을 넘어서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먼저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생각해보세요. 우선 현실에 대한 어떤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이 ‘정’입니다. 이 이론을 구체적 현실에 적용하는 검증이나 실천이 ‘반’입니다. 검증이나 실천의 결과로 처음 이론은 현실을 더 잘 반영한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할 겁니다. 실천적 이론이자 이론 적 실천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합’이죠. 이론과 실천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었으니까요.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이론은 ‘합’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정’이 되어 다시 삼박자의 변증법적 운동을 시작합니다. 현실을 완전히 파악한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이론이 만들어질 때까지 삼박자 운동은 계속됩니다. 헤겔 이후 변증법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존재와 무,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 주체와 타자, 마음과 몸, 이성과 감성 등 얼핏 대립적으로 보이는 거의 모든 관계에 도식적으로 적용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 사유의 특이성이 부각됩니다. 변증법의 도식을 빌린다면, 장자의 변증법은 두 다리 이미지로 이해될 수 있거든요. “길은 걸어서 이루어진다”는 뜻의 「제물 론」편의 슬로건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을 떠올린다면, 장자의 변증법은 ‘걸어감’, 즉 ‘행(行)’의 변증법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긴 제대로 그리고 오래 걸으려면 두 다리가 강건해야 하는 법이죠.
헤겔의 변증법은 가족 이미지에 지배됩니다. 가족 변증법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이와 달리 장자의 변증법은 두 다리의 변증법입니다. 두 다리로 걸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첫째, 장자의 두 다리 변증법은 정과 반을 어느 하나에 우선성을 부여할 수 없는 동등한 계기로 봅니다. 오른다리를 먼저 내딛는지 아니면 왼다리를 먼저 내딛는지는 걸음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죠. 알기에 실천할 수도 있고, 실천했기에 알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에서는 ‘알고 실천하고 알고 실천하고 알고…… 등등’의 계열을 선택하는 것은 ‘실천하고 알고 실천하고 알고…… 등등’의 계열을 따르는 것과 동등한 가치를 가지거든요. 이것은 정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헤겔과는 다른 측면이지요. 둘째, 장자에게 있어 합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합은 정의 계기가 움직이며 반의 계기와 순간적으로 겹치는 지점 일 따름입니다. 걸음의 메커니즘은 단순합니다. 앞에 오른다리가 놓여 있을 때 뒤에 있던 왼다리를 들어 올립니다. 이어서 원래 오른다리가 있던 곳보다 더 앞에 왼다리를 놓습니다. 이 과정에서 왼다리가 오른다리를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죠. 장자에게 합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적인 교차 지점과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만약 왼다리가 오른다리 옆에 나란히 있어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걸음을 멈춘 겁니다. 혹은 두 다리가 교차하지 않고 나란히 있는 상태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중국영화 속강시처럼 기이하게 통통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겠죠. 동아시아 사유의 상투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장자에게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오른다리와 왼다리를 밧줄로 묶으면 걷지 못하거나 아니면 강시처럼 통통거리며 간신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두 다리 변증법이 가진 힘을 제대로 맛보려면, 비정상적인 걸음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깽깽이걸음으로 걷는 걸음입니다. 왼다리를 들고 오른다리로만 나아가거나 반대로 오른다리를 들고 왼다리로만 나아가는 겁니다. 이론과 실천을 생각해보죠. 계속 이론적 작업을 하는 사변적 지식인이나 이론을 무시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활동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헤겔이라면 한 다리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할 테지만, 장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깽깽이걸음으로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깽깽이걸음은 느릴 뿐 아니라 지속하기 어렵고, 심지어 멀리 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이론만 추구해도 우리 삶은 나아질 수 있고, 실천만으로도 우리 삶은 나아질 수 있다는 것! 깽깽이걸음으로 걷는 것이 아예 걷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 장자 사유의 섬세함과 넓이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오른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왼다리만 꼬물꼬물 앞으로 움직이거나 반대로 왼다리는 고정하고 오른다리만 앞으로 움직이는 경우입니다. 사타구니가 유연하다면 체조선수처럼 오른다리와 왼다리가 180도로 벌어져 바닥에 붙게 될 겁니다. 이럴 때 더 이상 앞으로 가는 건 불가능하죠. 깽깽이걸음이든 스트레칭하듯 한 다리만 앞으로 쭉 내미는 것이든 정상적이고 건강한 걸음만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달생」편에 있는 ‘뒤처진 양 이야기’로 장자가 말하고자 했던 게 바로 이것입니다. 뒤처진 양은 깽깽이걸음으로 걸을 때 들고 있는 다리나 아니면 뒤에 처져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상징하니까요.
굶주린 호랑이에 잡아먹힌 선표
뒤처진 양 이야기는 주나라 위공(威公)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때 천자 국가로 위세를 떨쳤지만, 이제 주나라는 침몰하는 배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 어떤 제후국도 주나라를 어려워하지 않았죠. 당연히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걱정하게 됩니다. 비록 제후국 군주를 뜻하는 ‘공(公)’이라는 호칭을 갖고 있지만, 사실 위공은 실제로 약소국으로 전락한 주나라로부터 보잘것없는 식읍(食邑)을 받은, 그야말로 작은 귀족이었습니다. 노동하지 않아도 세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땅이 식읍입니다. 먹이가 되는 그 작은 땅마저 잃어버릴 위기가 닥치자, 주나라 귀족이었던 위공이 전개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비법을 듣고 싶었던 거죠. 사실 작은 땅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나라가 침몰하면 죽을 수 있는데도 위공은 그 작은 땅에 연연합니다. 그는 식읍으로 받은 땅이 없으면 생계도 유지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전개지가 위공과 말을 섞지 않으려 했던 이유입니다. “저는 비를 들고서 뜰 앞에서 시중을 들었을 뿐이니 스승님으로부터 무엇을 들었겠습니까?” 그럴수록 눈치 없는 위공은 더 간절하게 전개지의 조언을 갈구합니다. 마침내 전개지는 이 불쌍한 귀족이 결코 이해하거나 실천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스승님께서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중 뒤처진 놈을 발견하여 채찍질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걸 듣기는 했습니다.”
전개지와 그의 스승이 유목의 경험에서 삶의 지혜를 얻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양 떼를 몰고 유목을 할 때 뒤처지는 양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초지나 물가로 이동해야 하는 양 떼 대열이 느슨해져서 목동이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렵죠. 느슨해진 대열을 틈타 늑대가 공격을 시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양들 몇 마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오른다리, 왼다리, 오른다리, 왼다리 순으로 걷는 것처럼 양들은 전체적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목초지나 물가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두 다리 변증법을 떠올려 보세요. 뒤처졌던 양이 제일 앞으로 오고, 그에 따라 제일 앞섰던 양은 뒤로 가야 합니다. 앞섰던 양이 계속 앞서는 건 뒤처진 양이 계속 뒤처지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죠.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뒤처지는 양을 채찍질해서 앞으로 보내는 건 양 떼를 돌봐야 하는 목동의 핵심 임무입니다. 침몰하는 주나라를 위공이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건 무엇일까요? 그건 위공의 식읍일 겁니다. 그러나 식은 양처럼 이동할 수 없습니다. 마치 늙고 병들어 걸지 못하는 양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미련을 갖지 말고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잘못하면 위공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혹은 그의 귀중품들마저 모조리 잃을 수 있으니까요. 유목의 비유로 전개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한 셈입니다. 그러나 역시 위공은 안목이 좁은 귀족이었죠. 비유는 비유일 뿐인데, 위공은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중 뒤처진 놈을 발견하여 채찍질을 하는 것”이라는 말에 천착합니다. 전개지로서는 짜증 날 만한 상황이지만, 이미 쏟아진 물입니다.
이제 논의의 주제는 비유의 의미로 이행하고 맙니다. 독자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유목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더 생생하고 풍성하게 접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요. 전개지는 뒤처진 양에 채찍질을 하지 못해 양 떼를 돌보는 데 실패한 두 가지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선표라는 사람의 사례와 장의라는 사람의 사례인데요. 먼저 선표라는 실패한 목동의 사례를 살펴보죠. 그는 “바위 굴 속에 살고 골짜기 물을 마시며 민중들과 이익을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70세가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안색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표는 지배와 복종의 억압사회를 떠나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영위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연인으로 수렵과 채집 생활을 영위했던 겁니다. 당연히 그는 세금뿐만 아니라 징집이나 강제노역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주변에 먹을 게 지천이니 굶주릴 이유도 없고 복 종의 스트레스도 없습니다. “70세가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안색을 가졌다”는 건 그만큼 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평안하고 강건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억압사회를 떠나서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지 않았죠. 인간이 모이면 무조건 억압과 복종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속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70세가 되면서부터 강건했던 그도 노쇠해질 수 밖에 없죠. 그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잡아먹혀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20년 아니 10년만 젊었어도 그는 활이나 칼 혹은 나무 몽둥이로 충분히 호랑이를 쫓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 반대로 호랑이든 맹수를 가볍게 쫓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70세까지 자연 속에서 홀로 당당히 살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장의의 분투와 자유로운 공동체
두 번째 실패한 목동은 장의입니다. 억압사회는 무엇이든 그는 인간 공동체의 필요성을 긍정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가 공동체의 문제에 헌신적으로 뛰어들었던 이유죠. 홀로 자연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억압사회라도 인간은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근본 입장이었습니다. 모여서 살지 않으면 인간은 맹수든 홍수든 산불이든 삶을 위협하는 압도적 자연 앞에서 무기력할 테니까요. 그가 “높은 문을 가진 귀족의 집이든 문 대신 발을 사용하는 민중의 집이든 달려가지 않은 곳이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배계급의 착취가 심해지면 그들에게 달려가 피지배계급을 아껴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하고, 착취에 시달리는 피지배계급이 있으면 달려가 그들에게 쌀 한 표 대라도 주었던 장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억압의 사회이자 허영의 사회입니다. 지배계급은 결코 착취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간혹 피지배계급에게 관개사업이나 세금 감면 등 재분배 조치를 시행해도, 그것은 그들의 저항을 미리 방지하거나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의 폭정을 원망해도 그들의 내면에는 자신도 지배계급이 되어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그렇다고 장의 혼자서는 억압사회를 자유로운 공동체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장의의 고뇌는 깊어만 갔고, 스트레스가 그를 갉아먹기 시작하죠. 마침내 그는 “나이 40세에 몸 안의 열병으로 죽어버리게” 됩니다. 장의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 바깥에, 다시 말해 천하 바깥에 자유로운 공동체의 전통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대붕처럼 안목이 넓었다면, 그는 천하의 북쪽 유목 공동체나 천하의 남쪽에 국가 없는 사회가 있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당연히 그는 그곳으로 떠났겠죠. 그곳에서 장의는 아무런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향유했을 테니 40세 나이로 죽을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실패한 목동의 두 사례, 선표와 장의 일화는 극적일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전개지는 위공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마지막 멘트를 던집니다. “선표는 그의 안을 길렀으나 호랑이가 그의 바깥을 잡아먹어버렸습니다. 장의는 그의 바깥을 길렀지만 병이 그의 안을 공격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중 뒤처진 놈을 채찍질하지 않은 겁니다.” 아마도 위공은 전개지의 논평으로부터 마음만 수양해서도 안 되고 몸에만 신경 써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얻을 겁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야 한다는 너저분한 이해죠. 그러나 선표는 몸을 돌보지 않아서 죽었고, 장의는 마음을 돌보지 않아서 죽었다는 피상적인 이해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선표가 죽은 이유는 그가 자유의 공동체든 억압의 공동체든 상관없이 공동체 일반을 부정했기 때문이고, 반면 장의가 죽은 이유는 그가 자유의 공동체든 억압의 공동체든 상관없이 공동체 일반을 긍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표는 자유의 공동체를 구성해야 했고, 장의는 억압의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 선표라는 목동이 채찍질해야 하는 뒤처진 양이 분명해집니다. 그건 공동체를 혐오하는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동시에 장의라는 목동이 채찍질해야 하는 뒤처진 양은 억압의 공동체라도 긍정하는 그의 마음이었던 겁니다. 이제 선표가 길렀던 “그의 안”과 장의가 길렀던 “그의 바깥”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선표의 “안”이 자유로운 개인이었다면, 장의의 “바깥”은 억압의 공동체였습니다. 여기서 목동은 사라지고 선표나 장의가 모두 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선표는 무리를 떠난 고독한 양이었고, 장의는 목동의 채찍질에 노출된 불행한 양이었던 겁니다. 선표라는 양은 고독한 개인의 삶을 떠나 자유의 공동체에 들어가야 하고, 장의라는 양은 억압의 공동체를 떠나 자유의 공동체에 합류했어야 합니다.
뒤처진 양 이야기는 문제적 일화입니다. 선표와 장의의 사례는 전개지의 마지막 논평을 넘어서는 폭발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전개지의 마지막 논평은 불쌍한 귀족 위공의 이해를 대변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표가 몸을 돌보지 않아서 죽은 게 아니고 장의가 마음을 돌보지 않아서 죽은 게 아니죠. 선표는 공동체 없이 홀로 있어서 죽었고, 장의는 억압의 공동체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죽은 게 분명하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건 장자가 장의의 삶보다 선표의 삶에 그나마 손을 들어준다는 사실입니다. 장의는 40세에 죽고 선표는 70세에 죽었죠. 이것은 억압의 공동체에 있는 것보다 좌우지 간 떠나는 게 낫다는 상징일 수 있습니다. 결국 선표가 억압의 공동체를 떠난 건 옳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선표는 자유와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어줄 공동체를 만들거나 아니면 그런 곳을 찾아 떠나지 못했습니다. 늙은 선표를 위해 기꺼이 몽둥이를 들 수 있는 이웃이나 젊은이들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 80세까지 아니면 90세까지 살다가 편히 임종을 맞았을 겁니다. 40세에 죽고 싶다면 억압사회에 남아라! 70세까지 살고 싶다면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살아라! 70세 이상 살고 싶다면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라! 뒤처진 양 이야기에 들어 있는 선표라는 양과 장의라는 양은 우리에게 장자의 은밀한 가치평가를 보여줍니다. 이제야 포식자에 노출된 고독한 한 마리 양도 아니고 목동의 채찍질에 노출된 양 떼가 아닌, 야생의 양 떼가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동료들이 뒤처지지 않게 기다려주는 야생 양 떼! 동료들의 이동을 지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야생 양 떼! 건장하고 날래다고 동료들보다 앞서지 않는 야생 양 떼! 우리는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약동하는 야생 양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뒤처진 양 이야기는 은밀하게 묻습니다. 어쨌든 걸어감의 변증법을 지탱하는 두 다리가 이제 분명히 보입니다. 개인과 공동체, 더 정확히 말해 자유와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자유로서 사랑해야 하고, 사랑으로 자유로워져야 하는 길! 장자가 걸었던 길입니다.
인용
35. 살토 모르탈레 / 37. 문턱에서 길을 보며
'책 > 철학(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38. 열 번째 화살을 찾아서(벌레 이야기) (0) | 2021.05.17 |
---|---|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37. 문턱에서 길을 보며(도추 이야기) (0) | 2021.05.17 |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5. 살토 모르탈레(날개 이야기) (0) | 2021.05.17 |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4.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간 까닭(시남 선생 이야기) (0) | 2021.05.17 |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3. 비교하지 않아야 보이는 것들(위시 이야기) (0) | 2021.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