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열 번째 화살을 찾아서
벌레 이야기
예(羿)는 아주 작은 표적이라도 활로 맞추는 데 능숙했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서툴렀다. 성인은 ‘자연적인 것[天]’에 능숙하지만, ‘인위적인 것[人]’에는 서툴다. 자연적인 것에도 능숙하고 인위적인 것에도 잘 대처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인간[全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직 벌레만이 벌레일 수 있고, 오직 벌레여야 자연적일 수 있다. 완전한 인간은 자연적인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연적이라고 여기는 것도 싫어하는데, ‘나는 자연적인가? 아니면 인위적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羿工乎中微而拙乎使人無己譽; 聖人工乎天而拙乎人; 夫工乎天而俍乎人者, 唯全人能之. 雖蟲能蟲, 雖蟲能天. 全人惡天, 惡人之天, 而况吾天乎人乎! 「경상초」 13
작은 지배계급들의 세상
영토국가가 출현하면서 허영의 세계가 본격화됩니다. 지배계급은 자신이 피지배계급이 아니라는 걸 어떤 식으로든지 부단히 보여주려고 합니다. 걸어도 될 거리지만 마차를 타고, 화려한 문양으로 꾸며진 비단옷을 걸치고, 몸을 금붙이로 치장하고, 남들보다 더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을 구합니다. 한때 유목민들의 터전이었던 중앙유라시아에 실크로드가 생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비단, 금, 옥 등 희귀하고 이국적인 사치품들은 실크로드 서쪽 끝 로마제국에서도, 그 동쪽 끝 중국에서도 지배계급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데 최상의 물품이었죠. 결국 실크로드는 사치의 길이자 허영의 길이었던 겁니다. 지배계급의 허영은 피지 배계급에게도 독가스처럼 퍼져갑니다. 영토국가라는 형식의 정착생활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느낄 때, 혹은 아무리 곤궁해도 천하를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 없을 때, 피지배계급은 꿈꿉니다. 거대한 피라미드로 형상화되는 사회에서 가급적 상층부로 올라가는 꿈이죠. 금붙이의 번쩍임, 비단옷의 아름다움, 그리고 저택의 장관이 피지배계급을 사로잡아버린 겁니다. 자신의 꾀죄죄한 옷차림과 누추한 집을 돌아보며,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의 그 찬란한 화려함을 선망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지배계급의 사치가 기본적으로 자신과 같은 피지배계급의 노동력을 착취했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이럴 때 피지배계급은 증발하고 그 자리에 ‘작은 지배계급’이 들어서고 맙니다. 혹은 ‘잠재적 지배계급’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이제 모두 가지 배자가 되어버렸기에,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 자체가 증발하고 맙니다.
현실적 지배계급과 잠재적 지배계급만 남으니, 지배와 복종 관계는 은폐되고 아무런 저항 없이 영속합니다.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그 내용물이 바뀌더라도 왕조의 형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역사를 떠올려보세요. 이는 장자가 살았던 시대에서부터 지금 우리 시대까지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우리 이웃 대부분은 임금노동자이면서도 주식, 부동산, 비트코인 등에 투자를 합니다. 직접 노동하지 않고 돈을 이용해 이윤을 남기는 자본가와 같은 행각이죠. 노동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은 자본가’가 등장하니,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할 사람조차 찾기 힘든 겁니다. 그러나 피라미드 상층부로 올라가는 일 자체가 만만한 게 아닙니다. 지위를 높이고 부를 쌓기 위해서 피지배계급은 지배 계급에게 자신의 쓸모를 두고 여러 경쟁자들과 치열한 싸움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능력을 기르는 것만으로 경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죠.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지배계급에게 어필해야만 합니다. 시험이어도 좋고 업적이어도 좋습니다. 아니면 스펙이어도 좋고요. 설상가상 경쟁이 치열해지면 피지배계급의 서글픈 욕망은 묘하게 뒤틀립니다. 스스로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려고 하고, 아울러 경쟁자들의 능력을 실제보다 낮아 보이게 만들려고 하니까요. 허영의 사회 이면 에 시기와 질투, 모함과 뒷담화가 난분분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이 앞서지 않아도 경쟁자가 뒤처지면 경쟁에서 승리하니까요. 심지어 누군가 경쟁을 비판하거나 포기해도,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뒤틀린 시선으로 봅니다. 경쟁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오직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사람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피지배계급의 서글픈 허영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자신이 지배계급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과시적 허영과는 달리 지배계급의 간택을 받으려는 피지배계급의 허영이기에 서글프다는 겁니다. 서로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뒤틀린 질투는 이런 서글픔을 가중 시킵니다. 이웃들의 실패와 불운에 안타까움을 피력하지만, 속으로는 묘한 기쁨과 안도감이 찾아옵니다. 반대로 이웃들의 성공과 행운에 치하를 보내지만, 그 이면에는 우울함과 자괴감이 동시에 들어섭니다. 우리 이웃들을 모두 잠재적 경쟁자들로 느끼기 때문이죠. 어쨌든 과시적 허영과 서글픈 허영, 애달픈 경쟁과 뒤틀린 질투가 교차하는 곳이 국가에 포획된 정착사회입니다. 장자는 이곳을 벗어나고자 했던 철학자입니다. 지배와 복종이 관철되는 천하를 가볍게 떠나는 대붕이 되어도 좋고, 아니면 모든 사람이 대붕으로 살도록 거대한 양계장을 붕괴시켜도 깔끔합니다. 그렇지만 머물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는 게 대붕의 자유입니다. 간혹 대붕은 평범한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대붕이 되기를 기다리는 자유인도 있을 수 있고요. 아직 자신이 충분히 크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일 겁니다. 대붕과 같은 사람들이든 대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든, 이들은 어떻게 허영과 질투의 세계를 견뎌낼 수 있을까요? 「경상초」 편에 등장하는 ‘벌레 이야기’에서 장자가 고민했던 건 바로 이것입니다.
태양을 향해 활을 쏘았던 남자
전설적인 군주 요(堯)임금 시절에 이예(夷羿), 혹은 후예(后羿))라고 불린 명궁이 있었습니다. 초사(楚辭)』 「천문(天問)」편이나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편 14에 따르면 열 개의 태양이 생겨서 대지가 타들어가자 요임금의 명령으로 활을 쏘아 아홉 개의 태양을 떨어뜨린 사람입니다. 이 전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태양이 지배자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결국 남은 하나의 태양은 요임금이 되고 맙니다. 억압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예가 마지막 열 번째 화살을 쏘지 못했거나 불발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한 개의 태양도 강력하면 열 개의 태양 이상으로 초목과 인간을 불태울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곱 국가가 패권을 다투던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을 떠올려보세요. 하나의 태양이라는 이미지는 하나의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정당화합니다. 매번 태양을 보고 자란 사람들에게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이만한 이미지도 없을 겁니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태양이 요임금이라는 전설을 지우면, 예는 대지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태양을 저격한 인문주의자가 됩니다. 하늘로,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태양에 활을 쏘았던 남자, 바로 그가 예였던 겁니다. 예와 관련된 전설들에서 그의 말년은 비극적 죽음과 함께 불행으로 점철됩니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전설의 모티브였을 수도 있는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등장하는 후예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겁니다. 마지막 남은 태양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예의 활이 최종적으로 부러진 건 아닐까요?
벌레 이야기는 예의 비극이 왜 발생했는지 숙고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羿)는 아주 작은 표적이라도 활로 맞추는 데 능숙했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서툴렀다.” 장자의 눈에 예가 문명과 국가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는 거의 없습니다. 장자는 오히려 명궁이었음에도 그가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 데 초점을 모읍니다. 핵심은 역시 마지막 남은 그 하나의 태양을 활로 떨어뜨리지 못한 데서 찾아야 할 겁니다. 억압의 사회, 허영의 사회, 질투의 사회가 하나의 태양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니까요. 마지막 화살로 마지막 남은 태양을 맞히지 못했지만, 아홉 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 그에게 쏟아진 환호는 눈으로 보듯 자명합니다. 더군다나 복종을 강요당하고 수탈을 참아내던 민중에게 그는 피지배자들의 영웅이 됩니다. 이렇게 예는 자유의 자긍심과 자기긍정의 희망을 민중에게 심어주었던 겁니다. 그럴수록 예는 최고 지배자나 지배계급에게는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이 되었죠. 나아가 민중 가운데에도 예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야심가들이 있었을 겁니다. 민중의 지도자를 자처하던 사람에게 예는 최고 경쟁자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를 비극적 삶으로 이끌고 맙니다. 장자가 예는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서툴렀다”고 진단했던 이유입니다. 예의 죽음! 당분간 마지막 남은 태양에 활을 쏠 사람이 사라진 겁니다. 하늘의 마지막 눈을 노려보느라 예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질투하는 동료 인간들이 쏜 화살에 맞았으니, 정말 허무한 일입니다.
벌레 이야기는 예의 비극이 반복되는 걸 막고자 합니다. 예의 비극을 진단해 제2의 예, 제3의 예가 출현하는 걸 피하겠다는 장자의 결의입니다. 장자는 성인(聖人)을 비유로 예의 비극적 죽음을 진단합니다. “성인은 ‘자연적인 것’에 능숙하지만, ‘인위적인 것[人]’에는 서툴다”는 구절이 바로 그 진단서입니다. 「인간세」편 날개 이야기에서도 장자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쉽지만, 자연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어렵다[爲人使易以僞, 爲天使難以僞]”고 말입니다. 신이든 국가든 부모든 선생이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이 “인위적인 것에 부려지는 사람”이라면, 자기 욕망을 긍정하고 그걸 따르는 사람이 “자연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위적인 것에 부려지는 사람은 남의 찬양과 비난에 민감한 인간, 즉 허영의 인간입니다. 반면 자연적인 것에 부려지는 사람은 남의 찬양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해서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부모를 포함한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죠. 성인은 분명 ‘자연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 자기 욕망을 되찾은 사람, 한마디로 자유인 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인위적인 것에 부려지는 사람들’, 허영과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찬양의 박수갈채 이면에는 비난의 화살이 장전되어 있는 법입니다. 찬양의 표적이 질투의 표적이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인위적인 것이 지배하는 사회, 허영의 사회니까요.
작은 벌레들이 거대한 떼가 되는 날!
성인의 한계 혹은 예의 한계가 겹쳐지면서, “인위적인 것에는 서툴다”는 묘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성인의 전범이었던 예는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서툴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왜 예가 삶을 비극적으로 마무리했는지, 그 이유가 해명되었습니다. 질병의 원인을 찾았다면 예방은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 한계를 넘어서려면 성인은 “자연적인 것에도 능숙하고 인위적인 것에도 잘 대처해야” 합니다. 장자는 이럴 때 성인은 “완전한 인간“, 즉 전인(全人)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인은 성인과 마찬가지로 자기 욕망을 따르고 자유를 구가합니다. 억압의 사회에서는 관철하기 힘든 자유인의 삶입니다. 당연히 허영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전인의 행동과 삶을 찬양하거나 시기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전인은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인이 성인을 넘어서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해서 전인은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걸까요? 억압에 맞서 자유를 살아내려는 사람들,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려는 사람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질문입니다. 억압과 허영의 사회를 붕괴시켰거나 혹은 떠났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억압과 허영의 사회를 떠나지 못하는 자유인이나 대붕으로 자라고 있는 새끼 대붕들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난제니까요. 예의 비극은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찬양의 표적도, 그렇다고 비난의 표적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유를 구가하는 삶은 눈에 띌 수밖에 없기에, 이 정도 실천강령으로 충분할지 의아하기만 합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우리를 예견이라도 한 듯 장자는 전인은 벌레가 되어야 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던집니다. “오직 벌레만이 벌레일 수 있고, 오직 벌레여야 자연적일 수 있다.” 벌레로 번역한 충(蟲)은 벌레를 뜻하는 충(虫)이라는 글자를 세 개나 겹쳐서 만든 글자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장수하늘소처럼 우리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거대한 벌레가 아닙니다. 구더기나 개미 혹은 날파리처럼 떼로 움직이는 정말 보잘것없는 벌레들입니다. 장자는 한 마리로 다녀서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벌레가 되라고 합니다. 이 보잘것없는 벌레는 자기 욕망을 관철해도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충이라는 글자 세 개가 중첩되는 것보다 다섯 개가 겹친 게, 다섯 개 겹친 것보다 열 개가 겹친 게 아니 무한대로 겹친 게 좋습니다. 100마리가 되어야 눈에 띄는 벌레가 아니라 1만 마리가 모여야 눈에 띄는 벌레가 되라는 거죠. 여기서 완전한 인간은 완전함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작아지는 존재에 완전함이라는 용어 자체는 사치가 되어버리는 셈이죠. 장지는 “완전한 인간은 자연적인 것을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자연적인 것에 부려지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억압과 허영의 사회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입니다. 이 정도에 이르면 ‘자연적인 것’에 부려진다는 자긍심마저 전인에게는 사라지게 됩니다. 전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자연적이라고 여기는 것도 싫어하는데, ‘나는 자연적인가? 아니면 인위적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처럼 억압과 허영의 거대한 사회에 스며들게 됩니다.
천하 바깥 그 자유의 공간이 거의 사라진 시대, 대붕이 되어 천하를 비웃으며 천하의 북쪽으로 그리고 천하의 남쪽으로 날 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입니다. 억압과 허영의 세계는 인간의 자유를 부단히 감시하고 저주합니다. 대붕으로 자랄 조짐만 보여도 아이들을 메추라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대붕은 단지 비현실적인 꿈이라는 선전도 횡행하고요. 대붕들은 점점 날개를 접고 몸을 움츠리며 멍한 눈으로 석양을 바라볼 뿐입니다. 다행히도 장자에게는 대붕이 되는 길 외에 소충(小蟲)이 되는 길도 있습니다. 무한히 커지는 길만큼 무한히 작아지는 길도 중요합니다. 작디작은 벌레처럼 되어야, 그것도 누구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미세한 벌레가 되어야 자유인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자유를 구가할 수 있습니다. CCTV에도 잡히지 않는 벌레와 같은 자유인들이라고 무시하지는 마세요. 그들은 언제든지 모여서 거대한 자유의 군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들은 흩어져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의 마지막 열 번째 화살을 말입니다. 쏘지 못한 예의 열 번째 화살, 혹은 마지막 태양을 맞히지 못하고 비껴가 어느 땅에 박힌 그 열 번째 화살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이 화살을 찾는 날, 소충들은 거대한 떼로 모일 겁니다. 활에 그 마지막 화살을 장전해 하늘의 태양에 쏘려면 불가피한 일입니다. 대지를 감시하는 뜨거운 하늘의 눈, 그 마지막 태양이 사라져야, 모든 초목과 짐승 그리고 인간은 어둠 속의 별들처럼 자기 빛을 뿜어낼 수 있습니다. 예가 꿈꾸던 세상은 이렇게 우리에게 올 겁니다. 그날은 언제일까요? 예의 마지막 화살이 거침없이 하늘의 태양을 향해 나아갈 그날! 대붕이 다시 날갯짓을 시작할 그날!
이웃들의 실패와 불운에 안타까움을 피력하지만, 속으로는 묘한 기쁨과 안도감이 찾아옵니다. 반대로 이웃들의 성공과 행운에 치하를 보내지만, 그 이면에는 우울함과 자괴감이 동시에 들어섭니다.
인용
37. 문턱에서 길을 보며 / 39. 죽음, 그 집요한 관념을 해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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