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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37. 문턱에서 길을 보며(도추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37. 문턱에서 길을 보며(도추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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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바람 부는 곳으로

 

 

37. 문턱에서 길을 보며

도추 이야기

 

 

사물 중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사물 중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스스로를 저것이라고 여기면 이것은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를 이것이라고 여기면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 따른다고 말한다.’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동시에 생기는 것은 동시에 죽는 것이 고 동시에 죽는 것은 동시에 생긴 것이며, 동시에 허용되는 것은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은 동시에 허용되는 것이다. 옳음을 따르는 것이 그름을 따르는 것이고 그름을 따르는 것이 옳음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를 따르지 않고 사물을 자연스러움[]’에서 비추어 보는데, 이 또한 인시(因是).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而照之於天, 亦因是也.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저것 또한 하나의 시비(是非), 이것 또한 하나의 시비다. 그렇다면 저것과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이 자기 짝을 얻지 않는 경우를 길의 지도리[道樞]’라고 부른다. 지도리는 처음부터 그 원의 중앙[環中]’을 얻어야 무한한 것에 대응한다. 그렇게 되면 옳음도 하나의 무한이 되고, 그도 하나의 무한이 된다.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是亦一無窮, 제물론7

 

 

장자의 문

 

장자의 전언은 논리적이기보다 상당히 직관적입니다. 철학자보다는 문학가에 가깝다는 인상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의 사유에 충격을 가하는 이야기들 혹은 우리의 가슴을 뒤흔드는 이야기들을 만드는 장자의 상상력과 구성력은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그렇지만 제물론편을 보면 우리는 장자가 최고 수준의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추상적 개념을 능숙하게 다루는 일급의 철학자라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철학적 재능을 뽐내는 장자의 이야기는 제물론편에 집중되어 있을 뿐, 전체적으로 보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장자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솝우화처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일화들은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시와 같죠. 시인이 독자들과의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젊은 독자 한 명이 그 시인의 시 한 편을 언급하며 말합니다. “이 시는 애인을 기다리는 애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미소와 함께 시인은 독자의 말에 긍정을 표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시인은 카페에서 후배를 기다리면서 그 시를 쓴 겁니다. 가난했던 시인은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 후배에게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다행히 후배는 돈을 빌려주기로 했고, 정해진 날 카페에서 시인은 후배를 기다렸습니다. 후배에게 돈을 받아 곧장 은행으로 가야 했기에 시인은 열리고 닫히는 카페 문을 보며 노심초사합니다. 바로 이 초조한 기다림을 시인은 카페에서 시로 포착한 겁니다. 그가 없다면 삶이 궁핍해질 것 같은 사람은 애인일 수도, 아니면 돈을 빌려주기로 한 후배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시의 보편성 혹은 시의 울림이 있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대상이 누구냐가 아니라 기다리는 일이 주는 애틋함과 초조함입니다.

 

문학적 울림이나 이야기가 주는 감동이 자신의 말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더 효과적입니다. 특별히 지적 훈련을 받지 않아도 남녀노소 사람들은 자기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있음 직한 이야기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사람들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 점에서 제물론편에 집중되어 있는 철학적 이야기들은 제한된 독자에게만 호소력을 갖기 쉽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철학과 학부나 대학원에서는 제물론편이 가장 중시됩니다. 이 편은 장자를 논리나 개념 혹은 논증의 힘만으로, 한마디로 사변적이거나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물론편도 철학적 접근법만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제물론편에도 장자의 문학적 감성이 짙게 드리워져 있거든요. 바람의 비유로 타자를 사유했던 바람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람 이야기에서 바람은 바로 식별되는 노골적인 문학적 이미지입니다. 그렇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제물론편에는 장자의 철학적 논증을 끌고 가는 은밀한 문학적 이미지들이 상당하다는 사실입니다. 길의 이미지가 그 분명한 예죠. 그러나 길보다 더 은밀하게 숨어 있는 이미지, 제물론편의 난해함을 풀어주는 실마리가 될 이미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 이미지입니다. 시인이라도 된 것처럼 장자는 문에서 우리의 마음과 삶의 비밀을 엿본 겁니다. 제물론편에서도 그 난해함을 자랑하는 도추 이야기를 열어젖히는 열쇠가 바로 문 이미지입니다. 그렇지만 도추 이야기에 문 이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문에 대한 장자의 문학적 통찰은 추()라는 글자에 응축되어 있으니까요. ! 문의 지도리입니다. 여닫이문의 회전을 가능하게 하는 경첩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제물론편뿐만 아니라 장자전편을 보면, 장자가 철학적 논적으로 생각한 유일한 철학자는 혜시임이 분명합니다. 공자, 묵자, 맹자, 심지어 노자 등 유명한 제자백가들의 사유는 그의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장자에게는 혜시만이 지적 라이벌이었습니다. 도추 이야기도 마찬가지인데요. 비록 혜시의 실명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도추 이야기에서도 장자는 혜시의 사유와 팽팽히 맞섭니다. 하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도추 이야기에서도 장자는 혜시의 사유를 따르다 어느 지점에서 그와의 동행을 멈추고 자기 길을 갑니다. 그래서 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헤겔을 연상시키는 논리학적 논의,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차이에서 가치를 가진다는 소쉬르나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의 기호학적 성찰, 혹은 하나의 개념은 수많은 개념들과의 차이 운동일 뿐이라는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론, 아니면 더 멀리로는 개념은 다른 개념을 배제하면서 의미를 띠게 된다는 디그나가(Dignāga, 400?~480?)나 다르마키르티의 불교인식론적 사유와 맥을 같이하는 논의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결국 ‘A=-(-A)’, ‘A-A가 아니다는 단순한 발상일 뿐이니까요. 예를 들어 앞과 뒤, 뜨거움과 차가움, 열림과 닫힘 혹은 낮과 밤이라는 대립 개념을 생각해보세요. 앞은 뒤가 아닌 것으로, 뜨거운 것은 차가운 것이 아닌 것으로, 열림은 닫힘이 아닌 것으로, 낮은 밤이 아닌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앞과 뒤, 뜨거움과 차가움, 열림과 닫힘, 그리고 낮과 밤은 고립되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작동합니다. 2,500여 년 전 혜시가 바로 이 사실 을 간파했던 겁니다. 그에게 이것은 저것이 아닌 것이고, 저것은 이것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니까요. 거의 망각된 철학자 혜시의 위대함입니다.

 

 

 

혜시의 사유 실험과 장자의 논박

 

장자는 혜시의 통찰을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혜시의 통찰을 따르다가 동행을 멈추어버립니다. 도추 이야기 중간 부분에서 장자가 말하죠. “그러므로 성인은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결국 이 구절 앞부분이 피시방생지설의 내용과 한계를 다루고 있다면, 뒷부분은 이와 관련된 장자의 입장이 피력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도추 이야기 앞부분을 살펴보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천하16에 기록된 혜시의 테제 중 하나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일방중방예(日方中方睨), 물방생방사(物方生方死)”라는 주장입니다. “해가 정중앙에 떠 있을 때가 기울어지는 때이고, 사물이 태어났을 때가 죽어가는 때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식의 번역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혜시의 테제는 태양이든 사물이든 변화의 역설을 다루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기호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태양이 정중앙에 있다는 생각은 태양이 기운다는 생각과 함께하고, 사물이 태어난다는 생각은 사물이 죽는다는 생각과 함께한다는 번역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중앙에 있음[]’기울어짐[]’은 동시에 생기고, ‘태어남[]’죽음[]’도 동시에 생긴다는 주장인 셈입니다. 정중앙에 있다는 것은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의미고, 태어난다는 것은 죽지 않았다는 의미라는 이야기죠. 어쨌든 천하 편에 등장하는 혜시의 이 주장이 있었기에, 도추 이야기 앞부분이 혜시의 사유라고 추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혜시의 피시방생지설을 분석해보죠. 내가 친구와 카페에 마주 앉아 있고 내 앞에는 커피가, 친구 앞에는 홍차가 놓여 있는 상황을 그려보는 게 도움이 될 듯합니다.

 

나는 커피를 가리키며 이것은 커피다라고, 홍차를 가리키며 저것은 홍차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친구는 이것은 홍차다혹은 저것은 커피다라고 말할 수 있죠. 커피나 홍차에는 모두 이것이나 저것이라는 용어가 붙을 수 있다는 데 주목하세요. 혜시가 사물 중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사물 중 이것 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했던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내가 이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친구가 저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다음 영민한 혜시는 기가 막힌 사유 실험을 시도합니다. 내가 이 커피를 보고 저것은 커피다라고 말한다고 해보자는 겁니다. 이것 저것이 중첩되면서 생각은 오리무중의 미궁에 빠져버립니다. 이것은 내가 나의 입장이 아니라 친구의 입장에 서 있기에 생기는 일입니다. 나의 이 커피는 친구에게는 저 커피니까요. 그래서 혜시는 말했던 겁니다. “스스로를 저것이라고 여기면 (이것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혜시가 황당한 사유 실험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요? 그건 내가 결코 타자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테이블 이쪽에 앉아 있는 나는 그 반대쪽에 있는 친구일 수는 없습니다. 이쪽의 내가 저쪽의 친구가 되면 이것이나 저것이라는 개념은 모두 붕괴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유 실험의 결과로 혜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스스로를 이것이라고 여기면 저것을 알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내 입장에서 내 앞의 이 커피이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친구의 저 홍차저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말이죠. 그래야 내 입장에서나 친구의 입장에서도 이것저것은 동시에 생긴다는 일차적 원리(동시성의 원리)도 관철되고, 아울러 이것저것을 배제해야 의미를 지니고 저것이것을 배제해야 의미를 지닌다는 이차적 원리(배제의 원리)도 유지됩니다. 바로 이것이 최종적으로 혜시가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도 또한 저것에 따른다고 말한 이유인 셈입니다.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를 소개한 뒤 장자는 혜시의 입장을 해체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라는 말이 장자의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려주죠. 먼저 장자는 피시방생이라는 혜시의 주장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장자의 입장은 단순명료합니다. 혜시의 논리에 따르면 저것[]”이것[]”의 대립만이 아니라 모든 대립은 동시에 생기는 걸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동시에 생긴다는 뜻의 방생(方生)’ 관념은 동시에 죽는다방사(方死)’ 관념과 동시에 생깁니다. 나의 이것이 타자의 입장에서 저것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해보세요. 마찬가지로 내게 방생은 타자에게는 방사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게 피시방생(彼是方生)”이라는 주장이 참이라면 타자에게는 피시방사(彼是方死)”라는 주장도 참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피시방사라는 주장도 허용될 수 있는 주장이 됩니다. 논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확대 재생산됩니다. ‘저것이것혹은 방생방사사이에 적용되던 논리는 허용된다는 뜻의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의 불가(不可)’ 사이에도 적용되니까요. 설상가상 불가사이의 논리는 옳음을 뜻하는 ()’그름을 뜻하는 ()’ 사이까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됩니다. 이 순간 내게 옳은 주장도 타자에게는 그른 것일 수 있기 때문이죠. 결국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는 보편적 진리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혜시의 테제는 증명 불가능한 주장이 됩니다.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보편적 명제라고 주장하는 순간, 혜시의 테제는 제 한적이고 특수한 명제로 전락하고 마니까요. 이렇게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는 해체되어 유지될 수 없는 주장이 되어버립니다. 이제야 장자의 난해한 표현에 고개를 간신히 끄덕이게 됩니다. “동시에 생기는 것은 동시에 죽는 것이고 동시에 죽는 것은 동시에 생긴 것이며, 동시에 허용되는 것은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은 동시에 허용되는 것이다. 옳음을 따르는 것이 그름을 따르는 것이고 그름을 따르는 것이 옳음을 따르는 것이다.”

 

 

 

닫히는 문만이 열릴 수 있다

 

도추 이야기는 제물론, 나아가 장자의 이야기들 중 따라가기 가장 힘든 이야기일 겁니다. 혜시의 논의를 정확히 음미해야 장자가 어디까지 혜시와 동행하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혜시의 사유를 알려주는 자료는 너무나 단편적이고 매우 추상적입니다. 발굴된 유물 한 점을 통해 선사 시대 특정 사회의 전모를 그려보는 고고학적 상상력, 그에 비견할 만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혜시의 입장을 분명히 하려고 우리는 카페의 비유를 살펴봤습니다. 내 앞의 커피는 내게는 이것이고 테이블 맞은편 친구의 입장에서는 저것이라는 것, 반대로 친구 앞의 홍차는 내게는 저것이지만 친구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었던 장면을 다시 상기해보세요. 마치 영화를 보듯 상황을 생생히 그려야 합니다. 그래야 혜시와 장자 사이의 치열한 대결에 지친 우리의 정신을 수습할 수 있으니까요. 카페의 상황에서 나와 친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위치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벽의 이미지입니다. 테이블이 일종의 벽이 되어 나와 친구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바로 이 벽이 혜시 사유를 지탱하는 문학적 이미지입니다. 벽이 세워지는 순간 이쪽과 저쪽, 이것 저것, 나아가 주체와 타자가 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가지고 분리됩니다.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혜시의 주장에는 바로 이 벽 이미지가 전제되어 있었던 겁니다. 물론 벽 이쪽은 벽 저쪽 입장을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상상일 뿐, 벽 이쪽의 나는 벽 저쪽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나와 친구 사이에는 벽이 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스스로를 저것이라고 여기면 이것은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를 이것이라고 여기면 저것을 알게 된다고 말할 때, 혜시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나는 커피를 앞에 둔 내 자리를 떠나 친구 자리에 앉을 수 있고, 반대로 친구도 테이블을 돌아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테이블에서 나나 친구의 위치가 바뀌면 이 커피저 커피가 되고 저 홍차이 홍차가 됩니다. 사실 친구와 자리를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이 커피를 친구 앞쪽으로 옮기고 그 대신 친구의 저 홍차를 가져다 내 앞에 놓으면 됩니다. 이 경우에도 이 커피저 커피가 되고 저 홍차이 홍차가 되니까요. 그래서 장자는 말했던 겁니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이나 친구 앞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해 이것은 홍차인가, 아니면 커피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어느 게 옳은 주장이고 어느 게 그른 주장인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말대로 저것 또한 하나의 시비(是非), 이것 또한 하나의 시비일 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테이블은 나와 친구가 혹은 커피와 홍차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게 아닙니다. 차라리 그것은 문과 같은 겁니다. 테이블을 건너 나는 친구의 자리에 앉을 수 있고, 친구도 테이블을 가로질러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요. 아니면 이 커피는 테이블을 건너 친구 앞으로 이동할 수 있고, “저 홍차도 내 앞으로 가져다 놓을 수 있죠. 벽과 문은 다릅니다. 벽이 세워지면 이쪽과 저쪽이 동시에 생깁니다. 벽 안쪽에서 벽 바깥쪽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벽 안쪽에 갇혀서 그 벽을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혜시의 입장입니다. 철저한 유아론이자 철저한 고립주의입니다. 물론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주체는 타자와 만날 수는 있습니다. 벽을 허물면 됩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 혹은 안쪽과 바깥 쪽이 모두 사라지고, 주체와 타자도 와해되고 맙니다.

 

문이 만들어지면 이 경우도 분명 이쪽과 저쪽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주체는 문을 열고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고, 타자도 바깥 쪽에서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벽과 달리 문의 경우 우리는 안과 밖 혹은 이것과 저것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가 장난처럼 저것과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되물어보았던 이유입니다. 안과 밖의 경계, 즉 문턱에 서 있어야 가능한 생각입니다. 문이 닫힐 때 안과 밖은 구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이 열릴 때 안과 밖의 구분은 해체됩니다. 여기서 문이 문으로 작동할 수 있는 구조적 특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을 여닫는 걸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근사한 경첩, 바로 지도리, () 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문 이미지는 지도리 예찬으로 근사하게 마무리됩니다. “저것과 이것이 자기 짝을 얻지 않는 경우를 길의 지도리[道樞]’라고 부른다. 지도리는 처음부터 그 원의 중앙[環中]’을 얻어야 무한한 것에 대응한다.” 내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고 타자가 내게 들어올 수 있으니, 이쪽과 저쪽이나 이것과 저것, 혹은 이런 대립과 관련된 옳고 그름도 일의적으로 정해질 수 없습니다. 장자가 옳음도 하나의 무한이 되고, 그름도 하나의 무한이 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나가본 적이 없기에 막 연히 바깥쪽이나 저쪽 혹은 타자라고 상상했던 것들을 어느 꽃, 어느 바람, 어느 여자, 어느 남자, 어느 비바람으로 생생하게 마주치게 될 겁니다. 타자를 이해하는 길이 문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열리는 거죠. 반대 상황도 가능합니다. 문이 만들어졌기에 바깥쪽의 타자를 안쪽으로 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바깥쪽이 안쪽으로 열리는 환대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타자를 이해하거나 환대하는 것, 즉 문을 여는 일에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나를 파괴하려는 타자와 단호히 단절하는 것, 즉 문 닫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장자가 문을 벽처럼 사유했던 혜시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했던 이유가 짐작이 됩니다. 문턱에 서서 장자는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닫히는 문만이 열릴 수 있다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장자는 숙고합니다. 닫아야 할 때 닫을 수 없는 문 열어야 할 때 열리지 않는 문 경첩이 부서진 문들입니다. 문턱에 서서 장자의 사유는 이렇게 깊어만 갑니다.

 

 

문이 닫힐 때 안과 밖은 구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이 열릴 때 안과 밖의 구분은 해체됩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36. 두 다리의 변증법 / 38. 열 번째 화살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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