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과 신성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과연 악처(惡妻)였을까?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였다는 사실을 통해 반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철인(哲人)으로서 위대해졌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공자 삼대에 걸친 가족사의 비극은 공자 삼대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반사적 장치였을까? 나는 공자를 둘러싼 이와 같은 끝도 없는 이야기들의 실상을 파헤치려는 노력 그 자체의 허구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즉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이든, 「단궁」의 기록이든, 『장자(莊子)』의 기록이든, 이 모든 것이 사실의 르뽀([reportage)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양식(Form)의 목적론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기록의 사실여부에 대한 추정에 앞서 근원적인 어떤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단궁」의 상기의 기록은 예의 근본이었던 상례(喪禮)를 둘러싼 어떤 양식적 논의 속에서 공패밀리의 인물들이 드라마틱한 구현체로서 설정된 것일 뿐이다. 진위(眞僞)의 논변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세칭(世稱)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경우, 반드시 그 정체를 폭로하고 그 가면을 벗겨내리고 그 신화적 의미를 깎아내리는 짓을 통해서만, 그들의 실상이 드러나고 실증사학의 정신이 성취된다는 그러한 단순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목적이 저속화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파헤치고 있는 과정은 단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공자라는 인간, 그 인간의 삶과의 만남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분개할 것이다. 그 질문 자체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너무도 신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논의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는 상상 속에 날조된 인물일 수밖에 없다. 가버나움의 시몬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예루살렘의 타락한 성전을 뒤엎어 버리고, 가롯 유다의 배반 속에 로마병정에 팔려 넘김을 당하고, 십자가라는 형벌 속에서 죽고, 다시 돌무덤을 열고 부활의 영광을 보인 그 예수, 벤허와 같은 수없는 당대의 인물들이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을 그 예수의 역사적 실존성을 거부한다면 기독교의 존립근거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든, 성령스러운 빛의 화현(化現)이었든, 죽어도 죽어버리지 않고 다시 부활하는 로고스(λόγος, Logos)였든지 간에, 그 예수가 역사 속에 실존한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신성(divinity)을 100퍼센트 인정하는 만큼 예수의 인성(humanity) 또한 100퍼센트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반신반인의 어중간한 신화적 존재일 수는 없는 것이다.
복음서 속에서도 예수는 연민하고 분노하며 먹고 마신다. 갈릴리의 소외받은 연약한 민중들과 희노애락을 공유하며 그들과 공감하는 일상적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였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게걸스러운 먹보(glutton)’, 그리고 ‘술주정뱅이(drunkard)’로서 인지되었다(마 11:19, 눅 7:34), 세례 요한은 금식과 금욕을 일삼았지만 예수는 잔치를 즐겼다(John fasts, Jesus feasts. J. D. Crossan, Jesus, 48). 이러한 인간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의 최종적 존립근거인 성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나 공자나 우리와 같은 동일한 일상성 속에서 그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자의 삶에 관한 기록을 전달하는 문헌이 그 일상적 현실감각을 결하는 어떤 양식이나 케리그마의 소산이라는 데 그 근원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우리의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을까? 그 삶의 과정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문헌인 「공자세가(孔子世家)」가 결코 이러한 문제에 시원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면 과연 다음의 접근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사기(史記)』 외에 다른 문헌이 있는가?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문헌인 것이다.
공자는 「공자세가(孔子世家)」 속에도 『예기』 속에도, 여타의 어느 문헌 속에도 없다. 공자는 오직 『논어』 속에만 살아 있다. 나는 『논어』 이상의 진실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공자세가(孔子世家)」도 결국 『논어』의 어(語, 로기온자료)를 의미있게 만들기 위하여 역사적 사건들을 배열했을 뿐이다. 로기온파편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역사적 사태들을 구성해낸 것이다. 그러나 『논어』 속에는 공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공자의 숨결이 생동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대로 노양공(魯襄公, 루 시앙꽁, Lu Xiang Gong) 22년(BC 551)에 탄생했는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나 『곡량전(穀梁傳)』의 기록대로 노양공 21년(BC 552)에 탄생했는가? 이러한 논쟁은 학자들에 따라 끊임없는 고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공자가 BC 551에 태어났든, BC 552에 태어났든, 공자의 이해나 공자를 둘러싼 역사의 이해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사태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가능한 사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논어』의 위대성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어』가 말하고 있는 공자의 사실이야말로 구극적으로 살아있는 공자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 공자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차적으로 『논어』를 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주장은 또 다시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노정(露呈)시킨다. 『논어』 그 자체가 공자의 삶의 직접적 전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논어』는, 공자가 직접 쓴 것도 아니고, 공자의 직전 제자들이 편찬한 것도 아니다. 공자 사후에 오랜 세월에 걸쳐 공자문인들의 다양한 유파에 의하여 성립한 단편들이 집적된 것이다. 그렇다면 『논어』가 「공자세가(孔子世家)」나 여타문헌에 비해 그 오리지날리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매우 희박해진다. 어찌 『논어』만이 공자의 진실한 모습을 전달한다고 호언할 수 있단 말인가? 『논어』도 공자가 죽은 후 삼사백년 후에나 편집된 것이라고 한다면.
인용
'고전 > 논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이인」과 「술이」, 상론과 하론 (0) | 2021.05.25 |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논어의 Q와 안회 (0) | 2021.05.25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공자가문 3대 이혼설 (0) | 2021.05.25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짱구와 잉어 (0) | 2021.05.25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미자」편을 만든 사람들 (0) | 2021.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