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짱구와 잉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짱구와 잉어

건방진방랑자 2021. 5. 25. 16:26
728x90
반응형

 짱구와 잉어

 

 

공자세가(孔子世家)보다도 더 늦게 편찬된 것이지만, 왕숙(王肅, 왕 쑤, Wang Su, AD 195~256)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자 19세에 송() 나라의 병관씨(幷官氏, 삥꾸안스, Bing-quan Shi)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아들 백어(伯魚, 뿨워, Bo-yu)를 낳았다. 공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대의 국군(國君)이었던 노나라 소공(昭公, 자오꽁, Zhao Gong)이 사신을 보내어 접시에 커다란 잉어[鯉魚] 한 마리를 담아 보내왔다. 공자는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소공(昭公)이 보낸 잉어를 보고 잉어[]’라고 이름지었다. 백어(伯魚)는 리()의 자()이다. 그래서 지금도 곡부(曲阜)에 가면 공부가(孔府家)의 연석(宴席)에는 잉어요리가 올라오지 않는다. 공씨(孔氏)들이 어쩌다 타지에서 잉어를 먹게 되면 그들은 지금도 그것을 잉어라 부르지 않고 홍어(紅魚)’라 부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곡부에서 지금도 사실 그대로 신봉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공자전기의 작가들이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청년 공자의 지위가 국군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의 저자 자사(子思, 쯔쓰, Zi-si)의 아버지의 이름이 리()라는 사실에서 추론해보아도 이런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공자는 20세경에는 계씨(季氏, 지스, Ji Shi)의 일개 가신(家臣)인 양호(陽虎, 양 후, Yang Hu)에게도 문전박대를 당할 정도의 ()’에도 못미치는 천민(賤民)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자신이 자신의 과거 시절을 회상하여 나는 젊었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吾少也賤]”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고, 사마천도 공자는 어렸을 때 가난했고 또 천한 사람이었다[孔子貧且賤]”라고 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어떻게 해서 스무살의 천민 공자가 곡부의 판자촌 어느 한 구석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그 나라의 국군(國君)인 소공(昭公)이 경축의 사신을 보내 성대하게 은쟁반에 담긴 잉어 한 마리를 선사했겠는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좀 터무니없다.

 

시골 사람들이 애를 낳으면 산후조리가 어려우니까 잉어를 한 마리 구해다가 폭 고아먹는 것은 우리 어릴 적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습속의 하나였다. 아마도 공자부인이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기에 건강이 좋질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다가 딱한 주변의 당골네나 촌장이 잉어나 한 마리 고아먹으라고 주었을 것이다. 천민 공자는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부인에게 잉어 한 마리 고아 멕이고, 아들 이름을 잉어라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아들 이름이 잉어[]’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사고방식이 즉물적이고 천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어릴 때 천민들의 자식들 이름을 보면, ‘개땅쇠’ ‘말똥이그런 류의 이름이 많았다. 내가 살던 천안동네 행길가 끝에 살던 오두막집 자식의 이름이 붙뚜리였다. 그 이름의 유래인 즉, 자식을 낳아 놓으면 하두 어디로 돌아다니다가 없어지곤 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요번에는 집에 좀 꼭 붙어있으라고 붙뚜리라 했다는 것이다. ‘붙뚜리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의 삶이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이 얼마나 곤고로운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공자의 이름이 구(, 치우, Qiu: 언덕의 뜻)이다. 그 아비 숙량흘(叔梁紇, 수리앙 허, Shu-liang He)과 어미 안징재(顔徵在, 옌 정짜이, Yan Zheng-zai)가 니구산(尼丘山, 니치우산, Ni-qu-shan)에서 빌어 낳았다 해서 ()’라 했다는데, 기실은 그 공자의 머리 생김새가 펑퍼짐한 니구산의 언덕 모양을 닮아 머리 꼭대기 정수리부분이 좀 움푹 파이고 주변으로 두상이 퍼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구()라 했다는 것이다[生而首上圩頂, 故因名日丘云. 世家). 사마천의 이와 같은 명료한 기술에 의하여 말하자면 공자의 이름은 언덕대가리’, 가장 친근한 우리말로는 짱구[]’. 아버지의 이름은 공짱구’, 아들의 이름은 공잉어’, 짱구의 아들 잉어의 탄생을 놓고 국군(國君) 소공(昭公)이 경하의 사절을 보냈다는 것, 그래서 공자가어(孔子家語)의 표현을 빌리면, ‘영군지황(榮君之貺, 임금의 경하를 영예롭게 생각)’하여 잉어란 이름을 지었다 운운하는 이런 식의 기술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신화적 기술양식과 그 픽션적 성격은 비슷하다. ‘짱구와 잉어라는 부자(父子)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그 출신의 비천함을 알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한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군(國君)의 공경의 대상으로 기술되는 사태는, 후대의 공자인식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공자가 말년이나 사후에 점한 어떤 위치에 의하여 그 삶의 모든 사건이 유기적으로 일관되게 해석되어야만 했던 어떤 권위주의적 인식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자가 35세 때, 계평자(季平子, 지 핑쯔, Ji Ping-zi)와 후소백(郈昭伯, 허우 사오뿨, Hou Shao-bo)닭싸움[鬪鷄]’을 벌였는데, 서로 야비한 짓을 하다가 화가 나서 큰 싸움으로 비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소공은 후소백편을 들어 계평자를 쳤는데, 계평자는 맹손씨(孟孫氏, 멍쑨스, Meng-sun Shi), 숙손씨(叔孫氏, 수쑨스, Shu-sun Shi)와 연합하여 소공을 쳤다. 소공은 이에 크게 패하여 제(, , Ji) 나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공자가 제나라로 간 사건과 병치시키고 있다. 사실 닭싸움과 공자가 35세라는 사실은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가의 기술방식은 마치 공자 35세 시점에 어떠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이 공자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소공이 제나라로 패주한 사실과, 공자가 젊었을 때 한때 제나라로 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두 사실을 교묘하게 병치시켰다. 그래서 마치 공자가 패주한 국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계씨의 독재로 어지러워진 노나라를 떠나 국군을 보좌하기 위하여 제나라로 간 것처럼 위장시킨다. 그러나 공자는 대부간 닭싸움에의 불필요한 개입으로 패주했어야만 하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소공을 보좌하러 같이 제나라로 가야만 할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공자가 그 후 제나라에서 한 행위들, 고소자(高昭子, 까오 자오쯔, Gao Zhao-zi)의 가신(家臣)이 되어 제나라의 경공(景公, 징꽁, Jing Gong)과 통()하려 했다든가, 제나라의 태사(太師)에게 소(, 사오, Shao)음악을 배웠다든가 하는 일련의 사건은 패주한 노나라 소공을 보좌한다고 하는 명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간 것은 소공이 십오 년 전에 아들 낳았을 때 잉어를 보내준 그 감격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까? 소공과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암시로서 잉어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까?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바로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공자기술이 이렇게 정당화되기 어렵고 필연적 인과관계가 부족한 사태들의 그럴듯한 몽따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러한 기술 속에서 살아있는 리얼한 공자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려워진다.

 

 

초병정(焦秉貞)의 공자성적도(孔子聖迹圖) 7영광과 축하의 이름을 짓다(命名榮貺)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