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後儒)의 주자학
여기까지가 다산이 말하는 한유(漢儒)의 개념 속에 들어가는 논의이다. 한유란 아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현주밖에는 별 신통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이후의 하안의 집해도 주 속에 들어가고 또 그 후의 소도 모두 주를 부연한 것이기 때문에, 보통 한유라 해도 실제적 함의에 있어서는 한당유(漢唐儒)를 총칭해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 한당유가 모두 훈고에 치우쳐 있고 의미에 대한 깊은 생각을 결(缺)하고 있다는 것이 다산의 비판인 것이다. 한당유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그 상식적 관념의 배경에는 바로 한유(漢儒)와 대비되는 후유(後儒)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후유란 바로 남송정권의 주전파(主戰派)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며 경학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주희(朱熹, 주시, Zhu Xi, 1130~1200)라는 인물을 그 패러곤(paragon, 표본)으로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로부터 시작된 학문성향을 크게 묶어 주자학(朱子學, Zhuxism)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자의 획기적 패러다임이란 ‘사서집주(四書集註)’ 출현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서’ 중 『논어』와 『맹자』는 13경 속에 단행본으로 들어있는 것이지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은 논ㆍ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문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기』의 수많은 편 중의 2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예기』 속에 파묻혀 있어, 『예기』의 전공자가 아니면 특별히 주목하기 어려운 문헌이었다. 이 「대학」과 「중용」을 『예기』에서 독립시켜 『논어』와 『맹자』와 함께 ‘사서’(네 개의 경서)라는 개념으로 묶고, 이 ‘사서’야말로 공자의 가르침[孔子之敎]의 적통을 전하는 가장 고귀한 문헌들이며, 이 사서야말로 육경에 앞서 읽어야 할 문헌이라는 것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이정자(二程子, 얼 츠엉쯔, Er Cheng Zi)【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두 형제를 가리킴】였다. 그러나 이정자는 이러한 주장만을 했을 뿐 사서에 실제로 주석을 달지는 않았다.
사서를 육경보다 높인다는 것은 엄청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래로 자기들의 가치관의 기준이 되는 경전은 중국문명을 최초로 만들어간,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에 해당되는 선왕(先王), 즉 중국문명제작자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육경은 ‘선왕지도(先王之道)’라는 개념 속에 포섭되는 문헌이다. 그러나 공자는 소인(素人)이기 때문에 선왕(先王)의 반열에는 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요지부동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육경보다 사서를 높이게 되면, ‘공자지교(孔子之敎)’가 실제로 ‘선왕지도(先王之道)’를 능가하게 되고, 공자가 선왕의 지위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즉 유교는 선왕지도를 존숭하는 유교가 아니라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교로 성격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송사』의 「도학전(道學傳)」을 보라!
그러므로 말하노라: “공부자께서 요임금ㆍ순임금보다 슬기로운 것이 한참 뛰어나시도다.“
故曰: ‘夫子賢於堯舜遠矣.’
왜 이토록 공자를 선왕보다 더 높여야 했을까? 그 배면에는 북송정권이 이민족에게 굴욕적인 패망을 당하면서(정강지변靖康之變) 주전파들에게는 민족주의적 비분이 솟구쳤고, 따라서 외래사상에 대하여 주체사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렬한 요구가 솟아났다. 여기 외래사상이라 함은 수당을 통하여 장려한 화엄을 만개시킨 불학을 말하는 것이요, 주체사상이라 함은 선진시대로부터 정립되어 내려오는 유교의 도통(道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도통의 소이연은 물론 강력한 도덕주의(moral rigorism)의 회복이다. 그러나 불교적 향기에 만취한 당대 지식인들을 유교의 일용지간의 도덕으로 트랜스폼 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속한 일이었다. 불교는 대승불학의 만개와 더불어 다양한 교학의 치열한 논리가 발전되어 있었고, 더구나 선(禪)적인 격조 높은 시심, 그리고 인식론, 우주론을 포함한 근원적인 인성의 문제에 관한 심오한 통찰, 그리고 공안(公案)적 말장난이 주는 일상적 재미, 그리고 한 개념 개념을 치밀하게 분석해나가는 탐구의 논리 등등 무궁한 지적 호기심을 제공했다. 이 모든 삶의 맛을 대치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교도 중국적 토양에서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환되었다면, 유교도 역시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도저히 불학과 길항할 여력이 있을 수 없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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