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허물이 있다면 고치길 꺼려하지 말라
1-8.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무게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우러나오는 마음과 믿음있는 말을 주로 하며,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삼지 아니하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 1-8.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
구문 해석
‘주충신(主忠信)’ 이하의 문장은 「자한」 24에 그대로 나오고 있으므로, 생각컨대 ‘군자부중즉불위(君子不重則不威), 학즉불고(學則不固)’와 그 이하의 문장은 본래 별도의 전승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뜻에 맥락적 연관성이 있을 필요가 없다.
‘군자부즉불위(君子不重則不威)’를 독립된 하나의 유니트로 보고 ‘학즉불고(學則不固)’를 그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학즉불고(學則不固)’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불고(不固)’를 부정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학즉불고(學則不固)’는 ‘사람이 배우면 완고하게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소라이(荻生徂徠)는 ‘군자부중즉불위(君子不重則不威)’ 역시 제도사적 관점에서 독특하게 해석하였다: “군자는 중대한 사안이 아니면 위의(威儀)를 설(設)하지 않는다[凡非重事, 不設威嚴].”
그러나 나는 이 구문에서는 그냥 평이한 주자의 해석을 따랐다. ‘학즉불고(學則不固)’도 앞서 말한 ‘수왈미학(雖曰未學), 오필위지학의(吾必謂之學矣)’와 같은 학(學)에 대한 본의(本義)를 묻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위험이 없다’라는 표현에 대하여 ‘견고하지 못하다’라는 표현은 연속적인 흐름을 형성하므로 보다 자연스럽다. 모두 이 편의 주제인 군자의 덕성을 말하고 있다.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삼지 않는다[無友不如己者]’는 문구의 해석도 ‘주충신(主忠信)’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자기처럼 충신(忠信)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성향의 인간들을 벗삼지 않는다’로 새기는 주석가도 있다. 좋은 생각이지만 너무 구체적으로 의미의 면적을 좁히면 포괄적이고 상식적인 의미가 상실될 수도 있다.
혹자는 마지막의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를 과실에 대한 일반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의 구문을 이어받은 맥락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자기보다 못한 친구를 사귀지 말 것이나, 그러한 선택에 오류가 있을 경우는 주저없이 그 선택을 바꿔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다[一云, 若結友過誤, 不得善人, 則改易之莫難之也。 황소皇疏]. 그러나 이것은 매우 협애한 오석(誤釋)이다. ‘無友不如己者’는 그 뜻이 이미 그 자체로서 완료되는 풍부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다시 풀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허물의 자각과 고침
이 장의 대의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액센트는 역시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에 놓여있다. 인간은 허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일,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라는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유명한 말대로 인간은 ‘허물’을 향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神)의 사업이 아니다. 용서 그 자체가 나의 실존적 사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교는 인간을 신에게 떠맡기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중동문명권의 신화적 세계관과 유학이 근원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측면이다. ‘잘못’은 결국 ‘내’가 아는 것이다. 내가 안다면 바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 ‘고침’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허물을 고치기를 거리끼는 인간, 그것이 바로 소인(小人)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주변의 군상(群像)이요, 나의 모습인 것이다.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에 허물됨을 자각하는 순간, 그 허물됨을 고치기를 꺼려한다면 그는 영원히 배움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存在)의 종언(終焉)이다. 허물이란 고치면 끝나버리는 것이어늘.
‘중(重)’은 중후함이요, ‘위(威)’는 위엄이다. ‘고(固)’는 견고함이다. 외모에 가벼운 자는 반드시 그 내면이 견고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중후하지 못하면 위험이 없 는 것이요, 또한 배워도 견고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重, 厚重. 威, 威嚴. 固, 堅固也. 輕乎外者, 必不能堅乎內, 故不厚重則無威嚴, 而所學亦不堅固也.
사람이 충신(忠信)하지 못하면, 하는 일이 모두 실증성이 없어, 악은 쉽게 행하게 되고, 선은 행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반드시 충신으로써 주(主)를 삼아야 하는 것이다.
人不忠信, 則事皆無實, 爲惡則易, 爲善則難, 故學者必以是爲主焉.
정자가 말하였다: “인도는 오직 충신에 있다. 성(誠)이 없으면 실제로 사물[物]도 존재치 아니 하는 것이다. 나가고 들어가는 것이 때가 없고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만약 충신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또다시 사물이 있을까보냐?”
程子曰: “人道惟在忠信, 不誠則無物, 且出入無時, 莫知其鄕者, 人心也. 若無忠信, 豈復有物乎?”
‘무(無)’는 하지 말라는 ‘무(毋)’와 통한다. 금지하는 말이다. 벗(友)이란 인(仁)을 돕는 데 존재하는 까닭이 있는 것이니, 자기만 못하다면 유익함은 없고 손해만 있을 것이다.
無, 毋通, 禁止辭也. 友所以輔仁, 不如己, 則無益而有損.
‘물(勿)’도 또한 금지하는 말이다. ‘탄(憚)’이란 두려워하고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용감하지 못하면 악이 날로 자라난다. 그러므로 허물이 있으면 마땅히 속히 고쳐야 할 것이다. 두려워하고 어려워만 하면서 구차스럽게 편안히 지낼 생각을 근본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勿, 亦禁止之辭. 憚, 畏難也. 自治不勇, 則惡日長, 故有過則當速改, 不可畏難而苟安也.
정자가 말하였다: “학문의 길이란 별것 아니다. 그 좋지 아니 함을 알고 지체없이 고쳐서 선함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程子曰: “學問之道無他也, 知其不善, 則速改以從善而已.”
○ 정자가 말하였다: “군자가 자신을 닦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 程子曰: “君子自修之道當如是也.”
유씨가 말하였다: “군자의 도는 위엄과 중후함으로써 그 바탕을 삼고, 배움으로써 그 도를 완성시킨다. 배움의 도라는 것은 반드시 충신으로써 주를 삼아야 하고, 자기보다 나은 친구들로써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한 자는 끝내 군자의 덕에 들어갈 길이 없다. 그렇게 되면 나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선한 도로써 나에게 충고해주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그러므로 허물을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는 말로서 끝을 맺은 것이다.”
游氏曰: “君子之道, 以威重爲質, 而學以成之. 學之道, 必以忠信爲主, 而以勝己者輔之. 然或吝於改過, 則終無以入德, 而賢者亦未必樂告以善道, 故以過勿憚改終焉.”
여기 정자는 정이천이고, 유씨는 유작(游酢)이다. 유작에 관해서는 1-7의 집주옥안(集註沃案)을 보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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