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배우지 않았지만 배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1-7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이를 어진이로서 대하기를 아리따운 여인을 좋아하듯해라. 부모를 섬길 때는 있는 힘을 다하여라. 임금을 섬길 때는 그 몸을 다 바쳐라. 친구와 사귈 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여라. 그리하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다.” 1-7.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와 직하학파(稷下學派)
나는 2000년 6월, 산동성 치박시(淄博市)의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임치(臨淄, 린쯔, Lin-zi) 고성(故城)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였다. 임치 도성(都城)은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데 동서남북 각각 4km정도, 전 장은 약 20km에 가깝다. 『전국책(戰國策)』에 유세가 소진(蘇秦, 쑤친, Su Qin)이 조(趙)나라와의 합종(合縱)을 제선왕(齊宣王)에게 역설한 말 가운데 임치의 인구를 7만 호로 묘사하고 있고, 그곳에서 소집할 수 있는 남자장정을 21만으로 잡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곳의 당대 인구가 6. 70만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대성읍(大城邑)이었다. 그런데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직문(稷門)’이었다.
임치의 도성은 성문이 13개나 있었다【서울의 도성은 대문(大門)과 소문(小門)을 합쳐 8개】. 그런데 그 중 서문(西門)의 하나가 직문稷門)이었다. 이 직문 밖에, 즉 ‘직하(稷下)’에 아름다운 측계수(側系水)가 흐르고 있었고, 그 개천 좌우로 제나라의 위왕(威王)ㆍ선왕(宣王)이 당대의 저명한 학자나 사상가들을 우대하여 대부(大夫)의 대접을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인걸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직하선생(稷下先生)이라고 불렀다【『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 실상 전국시대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자유로운 사색과 토론의 풍토는 바로 이 직하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유명한 맹자도 직하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맹자 자신은 자기를 왕을 가르치는 왕사(王師)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왕밑에 소속한 직하학파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것을 꺼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이념을 곧바로 제나라에 실현시키기를 원했다. 식객 노릇이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직하의 초대총장격의 인물이 순우곤(淳于髡, 츠운위 쿤, Chun-yu Kun)이었고, 그 성쇠의 역사의 마지막 리더로서 우리는 순자(荀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순자 밑에서 한비자(韓非子)와 이사(李斯)와 같은 전국의 역사를 마감지운 대사상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제나라 명재상 관중(管仲)의 이름을 의탁한 사상서, 『관자(管子)』가 바로 이 직하의 학사들의 선집(the anthology of the Ji Xia School)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유가ㆍ도가ㆍ병가의 사상이 마구 섞여있는 잡가적(雜家的)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방대한 서물이지만, 항상 실제적 정치사상을 중시하고 경제문제를 외면치 않으며 구체적인 시책을 언급하고 있 다는 측면에서 어떤 통일성이 엿보인다.
나는 이 직하의 거리를 꼭 베스비우스 화산 밑의 폼페이(Pompeii) 거리를 걷듯이 한번 걸어보고 싶었다. 직하의 거리를 나는 서대문 밖 인왕산 자락의 느낌 정도로 생각했다. 일설에 의하면, 직문(稷門)이라는 이름은 인왕산과도 같은 직산(稷山)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측계수 때문에【측(側)과 직(稷)의 음이 비슷】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완벽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직문(稷門)의 꿈은 찾아볼 한터럭의 실오라기조차 없었다. 황량한 밀밭에 뿌연 황하의 황사바람만 뒹굴고 있었다.
직하는 제나라 위왕(威王) 때부터 시작하여 선왕(宣王) 때 크게 번창하여 민왕(湣王) 초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제나라 위왕(威王)이 직하에 천하의 위대한 학자들을 모을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이전에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출신성분이나 사상경향을 불문하고 실력있는 인재들을 널리 천하에서 구하여 등용하여 국세를 크게 융성하게 만든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자가 ‘하필왈리(何必曰利)’를 말한 양혜왕(梁惠王)은 바로 이 위문후(魏文侯)의 손자이다. 위문후가 당시의 인맥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그 핵심에는 바로 이 장의 주인공인 자하(子夏)가 있었다.
문학적 기질로 후학을 양성해 공문을 넓힌 자하
자하의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이다.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 23에 공자보다 44세 연하로 기록되어 있다. 진(晋)나라 온국(溫國)【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온현(溫縣) 서남쪽】 사람이라고도 하고, 위(衛)나라 사람, 혹은 위(魏)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치엔 무의 고증에 의하면 온국(溫國)이 후에 위(魏)에 의하여 병합되었고 위(魏)와 위(衛)는 표기상 서로 혼동되기 쉽기 때문에 그러한 다양한 설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강역의 변천으로 인한 그러한 문제들은 실제 상고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노(魯)나라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이 복(卜)인 것으로 보아 그도 아마 점[卜]과 관련된 무속(巫俗)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공자가 자하에게 특별히 지목하여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고 군자(君子儒)가 되라고 말씀하였을 수도 있다(「옹야」 11). 그래서 그는 문학적 상상력에 뛰어났고, 특히 『시』에 밝았다고 생각된다. 예술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그의 제자 중에 ‘문학(文學)’으로는 자유(子游)와 자하(夏) 두 사람을 꼽았다. 자하가 사과십철(四科十哲)에 거명될 뿐만 아니라, 공자와의 직접 대화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증자(曾子)나 유자(有子)와 나이가 비슷한 신예의 젊은 학도였지만 그들에 비하면 훨씬 더 공자 생전의 교단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순자(荀子)』 「비십이자(非十二子)」 11편에 보면 천유(賤儒)로서 자장(子張)ㆍ자하(夏)ㆍ자유(子游) 삼씨(三氏)를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데, 아마도 공자의 최만년제자로서 교단 내에서 헤게모니 각 축을 벌인 정예들이 바로 이 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기 학파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노나라에 머물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세 사람이 모두 노나라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자장(子張)은 진(陳)나라 사람이며, 자유(子游)는 오(吳)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증자(曾子)와 유자(有子)는 둘 다 노나라 토박이들로서 곡부에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자장(子張)ㆍ자하(夏)ㆍ자유(子游)가 한 그룹으로 떨어지고, 증자(曾子)ㆍ유자(有子)가 또 한 그룹으로 떨어진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약(유자)은 증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으며 자장ㆍ자하ㆍ자유 그룹과 함께 공문을 이끌었다. 그러나 자장ㆍ자하ㆍ자유가 노나라를 떠나면서 유약은 헤게모니(Hegemony)를 상실했다. 그리고 노나라 토박이로서 아버지 대로부터 공자의 훈도를 받고 노나라에서 공문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철저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치적 야심이 없고 돈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중심이 결국 공문의 주축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열전」의 자하(子夏, 복상卜商)에 대한 기술은 『논어』의 대화들을 가지고 각색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있다. 항상 『공자가어』의 기술이 「열전」보다 더 오리지날한 느낌이 든다.
고향사람들인 위(衛)나라 사람들은 자하가 별볼일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하가 어느날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위나라 조정에서 사지(史志: 역사기록)를 읽는 사람이 문헌을 오독하고 있는 것을 당장 지적했다. 그는 ‘진나라의 군대가 진나라를 칠 때, 세 마리의 돼지가 황하를 건넜다[진사벌진(晋師伐秦), 삼시도하(三豕渡河)]’라고 읽고 있었던 것이다. 불쑥 튀어나온 ‘세 마리의 돼지’는 문맥상 아무래도 어색하다. 자하는 곧 ‘삼시(三豕)’는 ‘기해(己亥)’의 오사(誤寫)임을 지적했다. 그래서 위나라의 사지를 읽는 사람이 그것의 감정을 진(晋)나라의 사 관(史官)에게 의뢰했다. 진(晋)의 사관은 조회해본 후 ‘기해’가 맞다고 대답했다. 이후로는 위(衛)나라 사람들이 자하를 성인 모시듯 했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일화는 자하의 학문이 공문하(孔門下)에서 일취월장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자하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자세는 매우 신중하고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공자는 자장(子張, 사師)이 과(過: 지나치다)한데 비하여 자하(子夏, 상商)는 불급(不及: 모자란다)하다고 평하였던 것이다(「선진(先進)」 15).
공자가 죽은 후 자하는 서하(西河, 시허, Xi-he)에서 학단을 형성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서하(西河)는 위(魏)나라 땅으로 황하의 서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전국시대 위나라 땅이었던, 하남성 안양(安陽) 부근이라는 설도 있고 산서성 분양(汾陽, 분주汾州) 지역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자 위문후(魏文侯)는 그의 문하생이 되어 경학과 육예(六藝)를 배웠으며, 그에게 국정의 자문을 구하였다[魏文侯師事之, 而諮國政焉。 『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 1]. 이런 인연으로 위문후의 주변에 모인 인재는 자하의 제자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탁월한 경제정책가였던 이극(李克), 청렴한 고사(高士)로서 끝내 문의 재상 제의를 거절하고 은거한 단간목(段干木), 희대의 병가 오기(吳起), 하백(河伯)의 미신을 타파한 서문표(西門豹), 위(魏)나라 국보로서 칭송을 받은 인인(仁人) 전자방(田子方), 나중에 묵가의 대표적 인물이 된 금활희(禽滑釐), 이 모든 사람들이 자하의 문하생이거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위문후는 위나라의 건립자이다. 그는 창업주다웁게 위나라를 크게 번성시켰다. 이러한 자하의 지혜로움으로 위문후의 브레인 탱크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전국시대정신을 리드한 직하학파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논어』에 자하에 관한 기사가 「자장(子張)」 편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제3장부터 제13장까지가 모두 자하와 그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다. 또 자하의 이야기는 「팔일(八佾)」 8의 그 유명한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 나오고 있 다. 그런데 나의 느낌으로 「자장(子張)」편의 자하의 이미지와 「자장(子張)」편 이외의 자하의 이미지는 매우 다르다. 「자장」편을 제외한 자하의 일반적 이미지는 매우 문학적이고 상황적이고 그리 예(禮)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러나 「자장」편에 드러나는 자하와 그의 제자들의 이미지는 예교주의적 엄숙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자장(子張)학파와 자유(子游)학파 계열에서 자파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자하를 그렇게 그린 것 같다. 그러나 순수한 ‘자하왈’ 파편을 보면 역시 자하의 사상적 경지가 다른 제자들보다는 더 고매하게 돋보인다. 자하는 실제로 공자의 말년사업을 뒤이어 중국의 고경을 후대에 남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제자로 평가되고 있다. 순자(荀子)는 자하(子夏)를 천유(賤儒)로서 비난하고 있다. 의관을 정제하고, 안색을 고르게 하고, 엄숙하게 입을 다물고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正其衣冠, 齊其顏色, 嗛然而終日不言] 형식주의ㆍ엄숙주의적 인물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자하와 순자는 역사적으로 같은 계보 속에 연계되어 있다. 증자 계열에서 맹자가 나왔고, 자하 계열에서 순자가 나왔다는 것은 중국철학사의 통설이다. 「자장」편에는 자하의 이미지가 순자적으로 각색되어간 흔적이 보존되어 있을 수도 있다.
현현역색(賢賢易色)의 다양한 해석
‘현현역색(賢賢易色)’은 그 문자가 너무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해석이 제출되었다. 특히 ‘색(色)’이라는 글자의 의미와 관련하여 그것을 ‘여자’ 혹은 섹스와 관련된 추상적 표현으로 보느냐의 가부(可否)를 둘러싸고 많은 도덕적 판단이 오갔다. 그러나 어느 전거도 확고한 타당성을 제시할 수는 없다.
1.
‘현현(賢賢)’을 ‘현명한 자를 현명한 자로서 대접한다’라고 새기고, ‘역(易)’을 ‘바꾼다’로서 새기면,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는 마음을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과 바꿀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즉 ‘역(易)’은 전후 문맥의 등가를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2ㆍ3세기 한(漢)ㆍ위(魏)사람들의 고주(古注)의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고주는 색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이 없다. 인간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색’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호색지심(好色之心)으로써 호현(好賢)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言以好色之心好賢, 則善也. 공안국 주].
2.
그런데 그 다음의 육조(六朝)시대의 사람들은 ‘역색(易色)’을 ‘안색을 바꾼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서 현인을 현인으로서 숭상하는 자세를 평소의 안색을 바꾸어 공경하는 장중한 모습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若欲尊重此賢人, 則當改易其平常之色, 更起莊嚴之容 也]. ‘역색(易色)’에서 ‘색(色)’의 의미를 ‘여자’에서 ‘나의 얼굴의 분위 기’로 바꾸어 해석한 것이다.
3.
그런데 송유들은 아예 ‘현현(賢賢)’과 ‘이색(易色)’을 이원화시켜 해석을 내렸다. 현인을 숭상하고, 여색을 가벼이 여겨라는 식으로 새롭게 새겼 다. ‘이(易)’에는 ‘바꾼다’라는 의미 외로 ‘가볍게 여긴다’(경이輕易)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송유의 도덕주의적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유의 해석은 본래의 맥락에 벗어났다고 생각된다.
4.
최근의 양 뿨쥔(楊伯峻) 같은 이는 송유의 문장패턴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다음의 문장이 부모, 임금, 친구에 대한 것이므로, 이것은 자기의 부인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구문은 ‘부인에 대하여 그 현명한 품덕[賢]을 존중하고 외모[色]는 중요시하지 말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리 쩌허우(李澤厚)는 부인에 대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냥 추상적인 메시지로서 해석하여 ‘덕행을 중시하고 용모를 중시치 말라[重視德行替代重視容貌].’는 뜻이라 하였다.
앞으로 또 어떤 해석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하가 원래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하고(십철 속에 문학으로 꼽혔다) 예절에 얽매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1의 고주의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현현역색(賢賢易色) | ||
고주(古註) | 육조(六朝) | 송유(宋儒) |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현인을 좋아한다. 言以好色之心好賢, 則善也.(공안국) |
현인을 존중하고자 한다면 평상시의 안색을 바꿔 장엄한 얼굴색을 띄어라. 若欲尊重此賢人, 則當改易其平常之色. 更起莊敬之容也 |
현인을 숭상하되 여색을 가벼이 하라. |
구한말의 대유(大儒)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1837~1900)는 인간의 질병의 원인과 구조를 밝힌 희대의 의서(醫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집필하면서 그 총결론에 해당되는 「광제설(廣濟說)」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장식하고 있다!
천하의 악이 현인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자를 질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없고, 천하의 선이 현인을 좋아하고 선량한 자를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天下之惡莫多於妬賢嫉能, 天下之善莫大於好賢樂善.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모르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대병(大病)이라는 것이다. 감기 걸리고 구토 설사를 하는 것이 병이 아니라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질병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동무의 이 말은 정말 뼈저리게 와닿는 우리의 현실이다. 구한말 우리나라 조선의 풍토가 얼마나 현능(賢能)한 자들을 투질(妬嫉)하였을까? 그리곤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역사의 비극을 생각하면, 일개 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이 동무(東武)의 외침은 조선동포들 모두에게 외치는 대각의 포효이자 20세기 조선의 미래를 향한 예언자의 분노였다.
현인(賢人)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자에게 있어서는 아주 단순한 의미였다. 현인이란 나보다 먼저 깨달은 자이요, 나보다 먼저 배운 자이다. 그러한 현인을 현인으로서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곧 ‘호학(好學)’의 출발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단순한 시인(是認)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마는 인간의 질병 이 모두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부중(不中)에서 나오는 것이요, 이 희노애락의 부중(不中)은 궁극적으로 ‘투현질능(妬賢嫉能)’에서 초래되는 것이라고 갈파한 것이다.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알면 내 마음이 편할 것이요, 그리하면 병에 걸릴 일이 없을 것이다. 현대인의 질병의 대부분의 원인인 스트레스가 동무 가 말하는 ‘투현질능’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기를 아리따운 여인을 좋아하듯이 하라! 그렇게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출처럼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권고인가! 여기에 뭔 다른 구구한 해석이 필요할까?
4세기말, 동진(東晋)의 환현(桓玄, 후안 쉬앤, Huan Xuan)이 은중감(殷仲堪, 인 종 칸, Yin Zhong-kan: 은형주殷荊州라고도 부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때 은중감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애첩의 침실에서 좌우를 돌보지 않고 사랑에 폭 빠져있었다. 결국 환현(桓玄)은 면회를 거절당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환현이 은중감을 만났을 때 은근히 비꼬면서 놀려대자, 은중감은 당황하는 기색으로 다음과 같이 둘러치는 것이다: “처음부터 자고 있진 않았는데, 설사 자고 있었다 한들 그대가 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찌 현현역색(賢賢易色)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初不眠, 縱有此, 豈不以賢賢易色也]?”
이것은 『세설신어』 「언어」 103의에 실려있는 이야기지만, 이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현현역색(賢賢易色)’의 이해가 분명히 현인을 현인 으로서 대접하는 마음이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고주(古注)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네 가지 해석을 비교하면 1에서 4까지 꾸준히 원래의 문맥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학문의 정교함이나 창조력의 발동이 명백한 것의 부정이나 진실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사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논어』를 애써 달리 해석하려 발버둥칠 필요없다. 기존의 해석의 의미를 천착하여도 무궁한 새 맛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배운 자란?
‘치기신(致其身)’의 ‘치(致)’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희생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사군(事君)’은 곧 국가사직의 안보에 관한 문제이므로 그런 뜻이 자연스럽게 배어있다.
‘수왈미학(雖曰未學), 오필위지학의(吾必謂之學矣)’는 앞 장에서 ‘행유여력(行有餘力), 즉이학문(則以學文)’이라 한 것과 똑같은 반주지주의적 강조의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학(學)’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어떤 전문적 학단(學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학(未學)이라는 것은 ‘구태여 어떤 학단에 들어와 공부하지 않았어도’, 즉 ‘어떤 학단의 커리큐럼을 이수하지 않았어도’ 그를 배운 자라 말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예나 오늘이나 우리는 너무 제도권 내에서 익히는 학문만을 학문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다. 학문의 근본적 소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깊게 통찰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배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는 것이다. 배움은 삶이다. 삶이란 곧 현현(賢賢), 사부모(事父母), 사군(事君), 여붕우교(與朋友交)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관계속에서 있는 힘을 다할 수 있는 자야말로 곧 ‘배운 자’인 것이다. 학문과 삶이 점점 유리되어 가고 있는 요 즈음의 세태에 대한 자하의 경종의 메시지인 것이다.
‘자하(子夏)’는 공자제자이다. 성이 복(卜)이고 명이 상(商)이다. 타인의 어짐을 어질게 여기되 그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꿀 수 있다면, 선(善)을 좋아함에 성실함이 있는 것이다. ‘치(致)’는 ‘위(委)’와 같다. 그 몸을 위치(委: 바친다)한다는 뜻은 살기 위해서 그 몸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기의 네 가지는 모두 인륜의 큰 것이요, 이것을 행함에는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학문이란 이와 같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하는 ‘능히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상황이 아니라면 반드시 힘써 배워서 이른 것일 터이니, 비록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반드시 이미 배웠다고 일컬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子夏, 孔子弟子, 姓卜, 名商. 賢人之賢, 而易其好色之心, 好善有誠也. 致, 猶委也. 委致其身, 謂不有其身也. 四者皆人倫之大者, 而行之必盡其誠, 學求如是而已. 故子夏言有能如是之人, 苟非生質之美, 必其務學之至. 雖或以爲未嘗爲學, 我必謂之已學也.
주자의 해석은 고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질 않다. 주자는 『시경』도 뭇 남녀의 상열지사(相悅之事)를 읊은 것으로 보았고 그리 남녀간의 정에 대해 도덕주의적 입장을 취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역시 호색(好色)의 마음을 현현(賢賢)의 마음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역(易)’을 말하고 있으므로 역시 도덕주의적 색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자하의 원래 맥락은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알라는 것이다. 공자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문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섹스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대지의 인간으로서의 순수한 느낌을 방해하는 어떠한 장치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째즈의 달인이었다. 오죽하면 호덕(好德)을 호색(好色)에 비유했을까?(「자한」 17).
○ 유씨가 말하였다: “하ㆍ은ㆍ주 삼대의 학문이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 장에서 말하는 네 가지를 능히 실천할 수 있으면 인륜에 두터운 것이니, 배움의 도가 어찌 이것보다 더 할 것이 있으리오. 자하는 문학으로써 이름을 날렸는데도 또 그 말씀이 이와 같으니, 옛 사람이 소위 배움이라고 말하는 것의 수준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이(學而)」 한 편은 대저 모두 무본(務本: 근본을 힘씀)의 주제로 모아져 있다.”
○ 游氏曰: “三代之學, 皆所以明人倫也. 能是四者, 則於人倫厚矣. 學之爲道, 何以加此. 子夏以文學名, 而其言如此, 則古人之所謂學者可知矣. 故「學而」一篇, 大抵皆在於務本.”
오씨가 말하였다: “자하의 말은 그 뜻은 좋은 데 있으나 말 사이에 억양(抑揚: 누르고 올리는 것)이 너무 지나쳐, 그 말류의 폐단이 마치 배우지 않아도 좋다는 억설에까지 이를 수 있다. 반드시 제6장에서 공자님께서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고 한 말씀 정도로 이해를 해야 폐단이 없을 것이다.”
吳氏曰: “子夏之言, 其意善矣. 然辭氣之間, 抑揚太過, 其流之弊, 將或至於廢學. 必若上章夫子之言, 然後爲無弊也.”
유씨는 북송의 사람 유작(游酢, 여우 쭈어, You Zuo)을 가리킨다. 자는 정부(定夫), 또는 자통(子通)이라고도 한다. 학자들이 그를 광평선생(廣平先生), 또는 채산선생(廌山先生)이라고 부른다. 원풍(元豊) 6년 진사에 급제하여 태학박사(太學博士)에 이르렀다. 지방관 생활을 아주 정밀하게 해냈고 선치를 많이 쌓았다. 그의 형 유순(游醇)과 함께 문행(文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도 복건성 건주(建州) 건양(建陽) 사람이다. 정문(程門)에 들어갔는데 특히 형 정호(程顥)에게 수업하였다. 양시(楊時)ㆍ사량좌(謝良佐)ㆍ여대림(呂大臨)과 함께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리웠다. 주희에게 이들의 학통이 전하여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정호의 학통을 이어 만물일체의 인(仁)을 말하는데 그 특색이 있다. 그리고 그는 역학(易學)을 잠구(潛究)하여, 역(易)이야말로 만유를 해괄(該括)하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순성명(順性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仁)은 인심(人心) 외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인을 얻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심을 얻는 것이다. 본심을 얻는다는 것은 인심의 사사로움을 이기고 도심(道心)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심의 본체가 드러나, 행동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고, 천하의 이치에 달통하게 된다. 음양에 소장(消長)이 있고, 강유(剛柔)에 진퇴(進退)가 있고, 인의(仁義)에도 융오(隆汚)가 있다. 이 삼극지도(三極 之道)가 모두 역(易)에서 근원하여 리(理)로 모아진다. 역이 만나는 바가 시(時) 요, 의탁하는 바가 의(義)이며, 이르는 바가 용(用)이다. 이 삼자를 알면 천하의 리가 얻어진다. 리(理)라는 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왕(無所不往)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미혹에 덮인 지가 오래되어 스스로 깨달을 능력이 없고, 이해의 영역[利害之域]에만 빠져있어 무엇을 본받아야 할 지를 모르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이를 우려하여 『역』을 지어 결국 중니에게 전하여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유작은 특히 선(禪) 공부를 많이 하였으며 불학에 대해서도 편견이 없었다. 그리고 선유(先儒)들이 불서(佛書)를 보지도 않고 그 이치를 깊이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비방만 한다 하여, 그러한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이 정문 중에서도 양시, 사량좌와 함께 정립(鼎立)되어 리학(理學)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선에 귀의하였다 하여 정문(程門)의 죄인(罪人)이라고 그를 비판하는 자가 많았고 따라서 그의 유작도 변변히 전하여지지 않고 제자들도 진작치 못했고 학통이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 주희의 선하(先河)를 되짚어 보는 것은 깊은 의의가 있다. 주희 성리학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북송의 특수한 상황에서 생겨난 철학 사조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나라의 자유분방한 사상풍토와 성리학
당 이후 오대(五代)를 마무리 지은 명군이 있었으니 그가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었다. 송을 개국한 조광윤(趙匡胤)은 바로 후주 세종의 유업을 이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세웠는데 초기부터 탄탄한 체제를 정비하여 비교적 안정된 기초를 쌓았기 때문에 놀라웁게도 송나라 초기 100년은 중국역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태평성세를 구가했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봉급을 받는 전업군인이 중앙에만 82만 명이 있었고【4대 인종(仁宗) 때를 기준으로 한 금군(禁軍)의 숫자】, 과거시험을 통한 신진관료세력은 지방관으로 임명되면 이 금군유지를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혈세를 거두어내야만 했다. 서리(胥吏)라 불리는 서기들이 이 혈세징수의 실무를 담당했는데 이들은 봉급이 없었고 단지 혈세징수의 수수료로써만 생활하였다. 서리제도는 육조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송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관료들의 업적의 기준은 실로 그들이 중앙에 거두어들이는 세입의 실적에 따라 평가되었다. 신진사대부는 단순히 관리일뿐 아니라 지방의 재정권을 독점하는 막강한 권력을 소유했다.
송대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했고, 대운하를 중심으로 전국의 물류소통망이 확보되었고, 그 소통망의 중심인 동경(東京) 개봉부(開封府)는 백만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화려한 대도읍이었다. 일정한 구획에 따라 상업지구가 제한되어 있었던 장안(長安)과는 달리 송나라의 개봉(開封)은 전 도시가 시장화되어 있었다.
송대의 중요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인쇄술의 발달이다. 단순히 인쇄기술이 발달한 것뿐만 아니라, 서적이 인기있는 상품으로서 유통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약 중국말의 표기수단이 알파벳류의 소리글이었다면 중국은 방언이 심해 한 지방의 책이 타지방으로 유통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자라는 로고그라피는 방언과 관계없이 절대적인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상재(上梓)하기만 하면 중국 전역은 물론 아시아 전역으로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서인구의 확대는 송나라의 특징이었다. 매스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과거시험을 통하여 권력을 쥐게 되는 신진관료세력은 과거 귀족계급이 가정 교육을 통하여, 혹은 커뮤니티의 에토스에 의하여 훈육되는 그러한 안정적 윤리관이 없는 문벌의 서민계층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에게 새로운 윤리관과 사회적 정의감을 부여하는, 매스컴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철학이 바로 도학(道學)이라는 것이다. 이 도학은 주돈이(周敦頤, 저우 뚠이, 1017~1073, 호가 렴계濂溪)가 남상을 이루었고, 장재(張載)ㆍ이정(二程)에 의하여 대하를 형성하여 주희(朱熹)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이들의 출신지를 따라 염락관민지학(濂洛關閩之學)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여기 주희 집주에 인용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대체로 이정(二程) 문하생들이며, 복건성 사람들이 많고, 정치성향은 한결같이 구법당(舊法黨) 계통이며, 금(金)나라와의 화의를 거부하는 주전파(主戰派)의 정치입장을 견지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주희는 매우 강렬한 주전파의 입장에 서있었지만 구법당의 완고함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을 비롯한 원우당인들의 수구사상은 인순(因循)에 빠져있다고 통박했으며, 왕안석(王安石)의 변법(變法)도 시대의 당연한 흐름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亦是勢當如此]. 그리고 놀라웁게도 우리가 오늘 생각하는 강렬한 배불론(排佛論)을 표방하는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초기의 송유들은 불교의 이론에 깊게 심취하여 있었다는 것이다.
북송의 자유분방한 사상풍토에서 도학의 이념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요 나 서하(西夏), 금(金)과 같은 이민족의 발흥에 대하여 민족주의적 정서를 그 외투로 삼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내면의 철리(哲理)는 불교적 논리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불학에 심취한 대다수의 지식계층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기 위해서는 그들의 내면적 논리와 상통하는 어떤 개념적 틀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치도 먹던 습관이 있던 사람들에게나 그 묘미가 체득되는 것이다.
나는 앞서 통서(通序)에서 말한 바 아시아대륙의 사상체계는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새로 배타적인 외투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근원적인 사고의 틀에는 상통하는 심층구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기독교ㆍ대승불학ㆍ신유학이 모두 하나로 소통될 수 있는 것이다. 대승불학의 관심이 주자학적 외투로 바뀌고 주자학적 외투가 또다시 기독교적 이원론이나 리고리즘(rigorism)으로 변해간 것이 한국의 고려말에서 20세기까지 이르는 사상사의 변천이었다.
불교 Buddhism |
욕망ㆍ번뇌의 세계 | 해탈의 세계 |
윤회(saṃsāra) | 열반(nirvāṇa) | |
신유학 Neo-Confucianism |
인심(人心)ㆍ인욕(人欲) | 도심(道心)ㆍ천리(天理) |
기(氣) | 리(理) | |
기독교 Christianity |
코스모스(kosmos) | 바실레이아(basileia) |
어둠(skotia) | 빛(phōs) |
각기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상론하자면 매우 복잡한 동이(同異)를 운운케 되지만 하여튼 그 심층구조(deep structure)는 한눈에 들어온다. 주자학적 틀이 7세기 동안 동아시아문명권을 지배하게 된 소이연을 이제 보다 거시적으로 조망할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불교적 세계관을 신유학이 흡수한 것만큼도, 우리는 아직 기독교적 세계관을 우리화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도유러피안적 사유체계를 신유학이 변용시킨 수준을 아직도 우리나라 사상 계가 서양사상에 대해 달성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오씨는 남송의 사람 오역(吳棫, 우 위, Wu Yu, ?~1154)이다. 복건성 건안(建安) 출신. 자는 재로(才老)이다. 주희는 그의 학문을 평하여, “근대 훈석(訓釋)의 학문은 재로를 따라갈 자가 없다[近代訓釋之學, 唯才老爲優].”고 상찬하였다. 고문 『상서(尙書)』가 위찬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 청대 염약거(閻若璩)의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에 영향을 주었다. 음운학에도 밝아 『자학운보(字學韻補)』를 지었다. 저(著)에 『논어지장(論語指掌)』, 『서비전(書裨傳)』, 『시보음(詩補音)』 『초사석음(楚辭釋音)』 등이 있다. 『송원학안(宋元學案)』 『경우학안(景迂學案)」에 실려있다.
▲ 송 휘종(徽宗, 1082~1135)의 수금체(瘦金體)라 불리는 글씨. 이 대관성작지비(大觀聖作之碑)는 1108년에 송 휘종 조길(趙佶)이 직접 짓고 쓴 것이다. 내용은 새로 도입한 과거제도에 관한 것이다. 당시 이 비를 모각하여 전국 각 주현의 학교에 두루 세웠다. 섬서성 건현 문묘에 있던 것이 지금 서안비림에 보존되어 있다. 휘종은 문아의 극치를 달린 문화인이었으며 그의 치세기간인 선화(宣和) 연간은 중국미술의 황금시대라 불리운다. 미불(米芾)산수가 휩쓸던 시기이다. 휘종은 글씨도 대 서가의 반열에 정도로 잘 썼지만 정강지변(靖康之變)을 자초한 어리석은 인물, 금과의 약속을 어기고 망해가는 요나라와 밀통하여 금의 분노를 샀다. 금은 원래 송을 멸망시킬 그런 의도가 있었던 왕조가 아니었다. 금나라에 붙잡혀 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다. 그 시체도 나중에 비싼 대가를 치루고 찾아왔는데 실제로 영구차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 북녘 회령(會寧) 운두산성(雲頭山城)에 거대한 여러 능이 있는데 과거에 송제지묘(宋帝之墓)라는 비가 있었고 동네사람들은 그것이 휘종과 흠종의 무덤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적혀있다. 휘종은 결국 우리나라 북녘 땅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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