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임금들이 공자와 정치를 논하는 까닭
1-10. 자금이 자공에게 물어 말하였다: “부자(夫子: 선생님)께서는 한 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를 들으시었습니다. 그것은 부자께서 스스로 구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런 기회가 상대방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1-10.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자공이 대답하였다: “부자께서는 따뜻하고 솔직하고 위엄있고 검소하고 사양하심으로써 그런 기회를 얻으셨다. 부자께서 구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子貢曰: “夫子溫, 良, 恭, 儉, 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
자금(子禽)의 시니컬
이 장에는 두 명의 중요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자금(子禽, 쯔친, Zi-qin)이요, 그 하나는 자공(子貢, 쯔꽁, Zi-gong)이다. 자금은 「중니제자열전」에 공자의 제자로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 7에는 실려있다. 다음과 같은 평어가 있을 뿐이다: ‘진항(陳亢)은 진나라 사람이다. 자를 자항(子亢)이라고도 하고 자금(子禽)이라고도 한다. 공자보다 40세 어리다[陳亢, 陳人, 字子亢, 一字子禽, 少孔子四十歲].’ 그에 대한 추론은 대부분 『논어』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혹자는 자금이 자공의 제자였기 때문에 「열전」에 안 올랐다고 한다. 자금이 자공에게 묻는 장면이 『논어』에 두 번 등장하는데 자공을 ‘자(子)’로 부르고 있어 그러한 가설도 전혀 무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금이 나오는 파편은 제나라 전승일 가능성이 높다고 키무라는 말한다(제나라 방언이 섞여있다).
그러나 한 편 자금을 노나라 토박이 출신으로 나이 어린 그룹에 속한 공자의 제자로 보는 설도 있다. 자금은 공자의 사후에도 공자교단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자금은 성이 진(陳)이요 명이 항(亢, 캉, Kang)이다. 자금은 그의 자(字)이다. 노나라에서 자라 공단의 분위기를 잘 알고, 공자의 문하에 입문하였으면서도 센터에 들어 오지 않고 주위를 맴맴 돌면서 공자를 삐딱하게 보는 매우 부정적 인간이었을 수도 있다. 본장에서도 자금이 공자를 보는 시각은 매우 씨니칼(cynical)하다: “공자는 치사하게 이 나라 저 나라 정가에 끼웃거린 사람이 아니겠수?”
지금도 곡부(曲阜)의 공자고택에 가면 ‘시례당(詩詩堂)’이라는 널찍한 건물과 정원이 있다. 물론 옛 모습은 아니겠지만, 그곳이 바로 공자가 그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詩)와 례(禮)를 가르쳤다는 곳이다. 그런데 이 시례당에 얽힌 고사는 「계씨」 13에 나온다. 자금이 백어와 단둘이 있을 때(백어가 20살 연상) 슬그머니 묻는 말이 이런 것이었다: “백어님이시여! 아버님께 뭐 좀 특별하게 배우는 것이 없소이까?” 이에 대한 백어의 대답은 특별하게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詩)를 모르면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예(禮)를 모르면 사람구실 제대로 못한다고 평소에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고사에서 자금의 태도 또한 무엇인가를 ‘염탐하는’ 낌새가 있다. 하여튼 좀 삐딱한 인물이다.
이 삐딱한 자금의 캐릭터는 공자 사후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자금은 자기의 선생인 자공을 부추기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자장(子張)」 25에 “자공 선생님께서 그렇게 겸손하게 당신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하의 제후를 휘어잡는 선생님이야말로 공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아니시겠습니까?” 자공은 이러한 유혹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공자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유감 없이 드러낸다. 하여튼 자금과 같이 좀 치사한 느낌이 드는 인물은 지금 상술할 필요는 없다. 자금(子禽)과 재여(宰予)는 모두 공자에게 있어서는 ‘가롯 유다’와 같은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었다. 물론 위대한 자의 인격은 이런 부정적 인물들 때문에 더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탁월한 지략가인 자공(子貢)
자공(子貢)은 위(衛)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31세 연하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니까 「열전」의 기록으로 보면 안회보다 한살 어리다. 사기열전」의 나이기록이 정확하다고만 볼 수 없지만 하여튼 자공과 안회는 같은 또래의 제자로 공자의 초기제자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야장(公冶長)」 8에는 공자가 자공 보고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냐?”라고 물었던 것이다. 자공과 안회는 같이 생활하면서 같이 비견되었던 인물들이었음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대화의 초기 파편이다.
자공에 관하여 『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 1에는 놀라웁게도 ‘단목사, 그의 자는 자공이다. 위나라사람, 말솜씨로 이름을 드날렸다[단목사(端木賜), 자자공(字子貢), 위인(衛人). 유구재저명(有口才著名)]’이라는 짤막한 한마디만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에서는 자공에 관한 기록이 72제자 중에서 최장의 드라마로서 스릴있게 전개되고 있다. 『공자가어』와 「열전」을 비교하면서 느끼는 것은 사마천의 「열전」의 기술이야말로 곧 사마천의 이매지네이션(Imagination)을 옮겨놓은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그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깨뜨리고 그의 가슴에 자결의 비수를 꽂게 만드는 그 슬픈 이야기의 역사적 환경이, 모두 제나라의 전상(田常, 티엔츠앙, Tian-chang)【「헌문」 22에 나오는 진성자(陳成子)의 다른 이름. 제나라 간공(簡公)을 시해하였다】이 노(魯)나라를 칠려고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자공의 외교적 수완으로 비롯되어 형성된 대하드라마로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의 배후에 자공이라는 탁월한 유세가의 활약이 그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그 진상을 과연 누가 밝힐 수 있을까?
사마천이라는 탁월한 문장가의 기술을 잘 뜯어보면 그것은 공자가 자공(子貢)과 재아(宰我) 두 사람을 언어(言語)에 능한 제자로 꼽은 공자자신의 언급【「선진(先進)」 2】의 테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어떤 소설적 각색 같다는 느낌을 배제하기 힘들다. 자공의 당대 제후들과의 언변은 모두 역사적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 복잡하게 얽힌 국제정세의 가닥을 교묘하게 풀어가면서 매우 유창한 언어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노(魯), 제(齊), 오(吳), 월(越), 진(晋), 다섯 나라의 역학관계가 자의 언어에 의하여 재조정된다. “자공이 한 번 나섬에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오나라를 격파시키고,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고, 월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다[子貢一出, 存魯, 亂齊, 破吳, 彊晋而覇越].”라고 사마천은 쓰고 있다. 이것은 곧 자공이라는 인물이 구 재(口才)에 능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단지 자공이라는 역사적 개인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공자교단 전체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마천은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사마천만큼 자공이라는 인물을 잘 이해할 수는 있는 입장에 있었던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자공은 탁월한 웅변가며 지략가며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국제적 ‘물류(物流)’를 잘 파악하여 막대한 재부를 축적하는 호상(商)이었다. 그는 진시황(秦 始皇)을 탄생시킨 여불위(呂不韋)의 전신이었다. 요즈음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가장 유능한 국제적 ‘비지니스맨’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항상 정치적ㆍ사회적 현실에 있었다.
자공은 『논어』의 실제적 주인공이다. 안회는 너무 완벽하게 이상화되어있고, 자로는 최다출연자이기는 하지만 항상 조연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 자공은 자로를 제외하면 『논어』의 최다출연자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스승 공자와 맞대 결하면서 깨달음을 축적해가는 주인공적 캐릭터로서 등장한다. 자공이 없으면 『논어』는 무너진다. 바로 자공을 제1편에 등장시켜 그로 하여금 공자에 관하여 이야기하게 한다는 것이 학이편 편자의 탁월한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자공에게 공자학단의 대표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말한 주제는 바로 공자의 일생에 관하여 후대에 가장 많은 비판을 몰아온 측면에 대한 격조 높은 아폴로지라는 데 그 특색이 있다. 「학이(學而)」편에서 선포한 공자의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을 『논어』 전편이 전개해나가고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단순히 자공의 아폴로지의 수준이 아니라 공자의 인간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덕성이라는 것을 『논어』는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은 『논어』를 읽어나가면서 온량공검양한 공자의 거대한 인격을 스스로 발견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짜릿한 예수의 천국운동 메시지와는 또 다른 매우 은은한 자기품성의 도야와 관련되는 것이다.
공자의 삶은 자로와의 만남과 더불어 시작했고 자로의 죽음과 더불어 그 삶이 종료되었다면, 공자의 자공과의 만남은 공자의 삶의 크나큰 행운이었다. 공자는 자로와 더불어 죽었지만, 자공과 더불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대하다! 자공이여!
자공의 성이 단목(端木)이라는 사실은 아마도 그의 집안이 목재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賜)라는 명(名)과 공(貢)【정주간본(定州簡本)에는 ‘𣹟’으로 되어있고, 한석경(漢石經)에는 ‘贛’으로 되어있다】이라는 자(字)의 연관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위(衛)나라의 조정에 물자를 납품하는 어용상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자공을 가리켜, “재화를 늘리는 데 있어서는 그는 천운조차 개의치 않는다! 억측을 해도 번번이 들어맞으니[賜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선진(先進)」 18)라고, 자공의 실제적 정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세속적인 논평을 하고 있다. 자공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증권가의 큰 손’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교단은 실제적으로 자공에 의해서 그 재정이 확보되었던 것이다. 자공이 없었더라면 공자교단의 형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자공이라는 젊고 영민하며 항상 배움에 게으름이 없는 물주의 사심 없는 헌신 때문에 공자교단이 유지된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자공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하였다. 그러면서도 결코 자공을 천대하지는 않았다.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원칙에 비교하면 공자가 자공을 평가하여 ‘너는 한 그릇에 불과하다[女, 器也。 「공야장(公冶長)」 3]’ 라고 한 것은 매우 인색한 평가다. 그러나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호련(瑚璉)’이라는 찬란한 옥그릇에 비유한 것은 자공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한 것이었다.
공자는 죽을 때도 자공의 품을 애타게 기다렸다. 공자의 죽음의 침상에는 이미 사랑하는 아들 백어도, 항상 그리워했던 제자 안회도 뻥끗하면 나무랬던 친구 자로도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공자는 죽어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오직 자공만을 기억했던 것이다. 공자는 자공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공의 눈물 속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공은 공자가 눈을 감는 순간 안회처럼, 자로처럼 항상 공자를 곁에서 못 모신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3년상을 치르고 떠났는데도, 자공만은 홀로 3년을 더 복상하고 떠났다. 스승의 무덤 옆에서 6년을 산다는 것 자체가 결코 간단한 고행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당대의 거부였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자공이 6년의 수묘(守墓)【여묘(廬墓)라고도 한다】를 감내해냈다는 사실은, 그의 개인적 심리의 보상기재(compensation), 즉 살았을 때 공자 곁을 충분히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대한 보상심리로서 일어난 행위라고만 분석할 수는 없다. 자공의 6년 수묘는 그 나름대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공자 말년의 제자들이 모두 공자의 유랑장정에 참여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공자의 장정세대로서는 자공 한 사람이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공의 나이는 비교적 어리다. 공자가 죽었을 때 그는 40세를 갓 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공자의 초기제자그룹의 주요멤버였다. 따라서 그는 공자학단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장정세대로서 특별한 본을 보여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만년제자들을 정신적으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구심점으로서의 행위양식이어야만 했다. 공자는 은나라의 후예이며, 은나라의 전통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그는 죽을 때도 은나라 예법을 따라 죽었다. 3년상은 은ㆍ송전승의 핵심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미 공자학단의 핵심적 사상으로서 3년상을 고집했다. 자공의 6년상은 스승 공자에 대한 충정의 본보기로서 더 이상 없는 과시였던 것이다. 자공은 그런 방식으로 공자학단 내부에 공자에 대한 절대적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공자는 자공의 6년수묘와 더불어 제자들의 마음에 부활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기교단이 세차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밑거름이요 저력이었다.
『논어』 내의 자공과 공자의 대화는 대체적으로 오리지날한 파편으로 간주된다. 자공이 6년 수묘기간 동안에 정리한 것이거나, 그 기간 동안에 자공이 말한 것을 공문제자들이 전송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증자의 ‘충서(忠恕)’ 운운도, 사실 알고 보면, 공자가 자공에게 나는 결코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하나로 꿰뚫는 사람이라고 말한 「위령공」 2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명제와, 자공이 공자에게 종신토록 기억할만한 이야기 한마디만 해달라고 조르니까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고 한 「위 령공」 23의 ‘서(恕)’의 명제를 합성하여 윤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공의 파편 이 훨씬 더 생생한 그대로의 공자모습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오늘날의 공자가 된 것은 실상 자공 덕분이라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자공은 공자 사후에도 공자에 대한 철저한 로얄티를 지켰다. 공자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추호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에 돈을 싸들고 제후를 찾아다니면서 공자의 위대함을 선양하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화식열전(貨殖列傳)」 7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비단뭉치의 선물을 들고 제후들을 방문하였으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뜰의 양쪽으로 내려서서 자공과 대등한 예를 행하지 않는 국군이 없었다. 무릇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골고루 알려지게 된 것은, 자공이 그를 앞뒤로 모시고 도왔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이른바 세력을 얻으면 그 이름이 세상에 더욱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貨殖列傳」第六十九, 정범진 역, 7-1177).
子貢結駟連騎, 束帛之幣以聘享諸侯, 所至, 國君無不分庭與之抗禮. 夫使孔子名布揚於天下者, 子貢先後之也. 此所謂得埶而益彰者乎?
자공이 위(衛)나라 사람이라는 사실도 매우 『논어』를 읽는 데 중요한 함수로 작용한다. 공자의 유랑이 기나긴 장정이기는 했지만 그 루트를 잘 뜯어보면 항상 위(衛)나라를 거점으로 해서 움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장정의 비용을 댄 것이 바로 자공이었다. 자공의 위나라 재정기반이 없었더라면 공자의 장정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가 상당부분 위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자의 고난의 시절에 위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자공은 부자(夫子)의 문장(文章)은 들을 수 있지만,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볼 수가 없다【「공야장(公冶長)」 12】라고 말했다. 이 장을 들어 많은 학자들이 공자의 사상 자체가 성(性)과 천도(天道)와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배제하고 있다고 구구한 논변을 펴지만, 그것은 자공과 공자와의 관계의 구체적 맥락을 떠나서는 무의미한 말임을 일차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즉 공자는 자공과 같은 현실적 인간에게는 성(性)과 천도(天道)와 같은 심오한 이야기를 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얘기가 상호간에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공자는 아마도 성과 천도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안회와 실컷 나누었을 것이다. 안회의 내면성의 깊이를 자공은 가지고 있지를 못했다. 그러나 자공은 자신의 분수를 명확히 깨닫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의 한계 내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오히려 예리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게 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그는 끊임없이 물음으로써 배워간 인간이었다. 그는 학문(學問)의 인간이 아니라 문학(問學)의 인간이었다. 학문이란 본시 문학(問學)이다. 물음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자공의 사회과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접근에서 출발하여 공자의 인문과학적 인(仁)의 사상의 핵심으로 나아가는 진로(進路)야말로 『논어』라는 서물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배움의 과정이다. 자공은 우리와 같은 매우 상식적이고 현실적으로 민활한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자공과 더불어 깨달음의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자금의 질문
먼저 자금의 질문을 살펴보자. ‘부자(夫子)’라는 표현은 고증가들이 말하기를 대부(大夫)를 지낸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경칭이라고 하지만(楊伯峻), ‘부자(夫子)’는 앞서 타케우찌(武內義雄)의 논증이 설파했듯이 그런 구체적 맥락에서 쓰여진 말은 아니다. 제자들이 스승으로 존중하여 부른, 공자교단내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말이었다. ‘우리 그[夫] 선생님[子]’이라는 매우 평범한 말이 존숭의 의미가 강화되어 독립된 개념으로 발전하여 갔을 것이다. 우리가 영어로 ‘Confucius’라고 쓰는 것은 콩후우쯔(孔夫子, Kongfuzi)라는 중국말을 서양선교사들이 라틴어화(Latinization)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에서 ‘공부자(孔夫子)’라는 식으로 쓰인 예는 별로 없다. ‘Confucius’는 서양선교사들의 발명이라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다.
‘지어시방(至於是邦)’의 ‘시(是)’는 ‘어떤 하나’의 뜻이며, 비특정의 지시대명사로서 구어적인 어기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필문기정(必聞其政)’의 ‘문(聞)’은 그냥 ‘듣는다’의 뜻이라기보다는 정사에 관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구지여(求之與)? 억여지여(抑與之與)?’에서 ‘억(抑)’은 영어의 ‘if not(그렇지 않다면)’의 뜻이다. ‘구지(求之)’는 내가 자발적으로 구한다는 뜻이고, ‘여지(與之)’는 정치를 하고 있는 저편에서(치자들이) 구한다는 뜻이다. 즉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여(與)? ……여(與)?’의 구문에서 ‘여(與)’는 단순한 의문을 나타낸다.
대답의 다양한 해석
이러한 자금의 야릇한 ‘비꼼’에 대하여 자공은 강력하게 정면으로 공자를 옹호한다. 그러나 자금의 ‘비꼼’의 내용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기회 닿는 대로 여기저기의 나라에서 정치에 끼웃거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실을 자공은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케이! 좋다! 우리 선생님은 정치참여의 기회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구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온(溫)ㆍ 량(良)ㆍ 공(恭)ㆍ검(儉)ㆍ양(讓)의 다섯 가지 덕성을 갖추어서 구한 것이다. 범인들이 정치에 끼웃거리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실 자공의 변호는 좀 궁색한 듯이 보인다. 그래서 다산은 이 구절을 좀 다르게 해석하였다. ‘부자온량공검(夫子溫良恭儉)’에서 일단 문장을 끊고 ‘양(讓)’을 아랫구에 붙여 읽는다. 그리하면 ‘양이득지(讓以得之)’가 된다. 그러면 우리 선생은 온량공검 하셔서, ‘사양하셨는데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따름이다’라고 자금의 비판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새로운 의미맥락이 생겨난다. 그러나 명백하게 다음의 구절, 즉 ‘부자지구지야(夫子之求之也), 기저이호인지구지여(其諸異乎人之求之與)!’의 시인과 약간 괴리가 생겨난다. 그래도 억지로 다산식으로 새길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냥 평범한 해석을 따랐다.
여기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것은 문체다. ‘부자지구지야(夫子之求之也), 기저이호인지구지여(其諸異乎人之求之與)!’에서 ‘지(之)’가 네 번이나 들어가 있고, ‘……야(也), ……(여)’와 같은 조사가 끝에 붙어 있는가 하면, 별의미 없는 ‘기저(其諸)’가 중간에 끼어있다. 이것은 얼마나 『논어』의 문체가 일상적 말(구어체) 그대로에 충실하려고 애썼는가를 나타내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논어』의 문장은 바로 이런 데서 어떤 생동감을 발출한다. 마지막의 ‘여(與)’는 앞의 단순한 의문을 나타내는 ‘여(與)’와는 달리, 단정을 보류하면서 상대방의 강한 긍정을 유도해내는 어기를 담고 있다. ‘기저(其諸)’ 그냥 리듬을 나타내는 조사일 수도 있고 양 뿨쥔(楊伯峻)의 고증대로 노나라의 방언이나 습벽일 수도 있다. 그냥 ‘부자구지(夫子求之), 이인구지(異人求之)’라 해도 될 말이 이렇게 길어진 것이다. 키무라(木村英一)는 이 구어용법이 제나라의 방언을 나타낸다고 본다. 자공이 말년에 제나라에서 죽었으므로 제나라의 전승이 기록되어 내려온 파편이라는 것이다. 제론(齊論)의 일부일 수도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논어』에 대한 가설은 끝없이 다양하다.
성북동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선생의 고택에 이 장의 구절이 걸려 있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
주희 | 다산 |
溫良恭儉讓, 以得之 | 溫良恭儉, 讓以得之 |
溫良恭儉讓으로써 그것을 얻으셨다. | 溫良恭儉하셔서 사양하셨지만 그것을 얻게 됐다. |
지여(之與)‘의 ’여與”는 평성이다. 이하의 용례도 동일하다. ○ 자금은 성이 진(陳)이고 명이 항(亢)이다. 자공은 성이 단목(端木)이고 명이 사(賜)이다. 둘 다 모두 공자의 제자이다. 혹자는 항(亢)은 자공의 제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설이 맞는지는 알 바 없다. ‘억(抑)’은 반어사(反語辭)이다.
之與之與, 平聲, 下同. ○ 子禽, 姓陳, 名亢. 子貢, 姓端木, 名賜. 皆孔子弟子. 或曰: “亢, 子貢弟子.” 未知孰是. 抑, 反語辭.
‘온(溫)’은 온화하고 도타운 느낌이다. ‘량(良)’은 상식적이고 솔직한 것이다. ‘공(恭)’은 장중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검(儉)’은 절약하고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다. ‘양(讓)’은 겸손한 것이다. 이 다 섯 가지는 부자의 우러넘치는 덕이 광채를 발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기저(其諸)’는 실제적 뜻이 없는 어기사이다. ‘인(人)’은 타인을 가리킨다. 이것은 부자께서 스스로 자진해서 구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 후덕한 모습이 이와 같은 고로 당시의 군주들이 그를 경애하고 믿어 그들 스스로 정사를 가지고 찾아와 물은 것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타인들이 스스로 자진하여 구한 후에 정사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성인이 지나감에 감화를 미치고 마음에 남는 것이 신성해지는 그 묘미는 실로 눈에 보이게 측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에 즉하여 보면 그 덕이 풍성해지고 예가 공손해져서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게 됨을 깨달을 수 있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잠심(潛心)하여 배움의 내면에만 힘쓸 것이다.
溫, 和厚也. 良, 易直也. 恭, 莊敬也. 儉, 節制也. 讓, 謙遜也. 五者, 夫子之盛德光輝接於人者也. 其諸, 語辭也. 人, 他人也. 言夫子未嘗求之, 但其德容如是, 故時君敬信, 自以其政就而問之耳, 非若他人必求之而後得也. 聖人過化存神之妙, 未易窺測, 然卽此而觀, 則其德盛禮恭而不願乎外, 亦可見矣. 學者所當潛心而勉學也.
○ 사씨가 말하였다: “배우는 자는 성인의 위엄있고 예의가 바른 삶의 자세 속에서 관찰하면 또한 그 덕이 진보할 수가 있다. 자공과 같은 사람이라면 성인을 잘 관찰했다고 일컬을 만하고, 또 그 성인의 덕행을 잘 형용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지금 성인으로부터의 거리가 1천 5백 년이나 되었지만 이 다섯 가지로 그 형용을 잘 상상하여 보면 우리로 하여금 흥기(興起)케 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하물며 성인께 직접 배우고 감화를 입은 자에게 있어서랴!”
○ 謝氏曰: “學者觀於聖人威儀之間, 亦可以進德矣. 若子貢亦可謂善觀聖人矣, 亦可謂善言德行矣. 今去聖人千五百年, 以此五者想見其形容, 尙能使人興起, 而況於親炙之者乎?”
장경부가 말하였다: “부자께서 한 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정사를 들으셨으나, 그 아무도 부자에게 나라를 맡기어 정사를 행하도록 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저 성인의 위엄있는 모범을 보고서 그에게 정사를 고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은 항상 도리를 잡고 덕을 좋아하는 인간의 보편적 양심일 것이나, 인간의 사욕은 항상 이러한 양심을 가려버린다. 그래서 종내 공자를 기용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張敬夫曰: “夫子至是邦必聞其政, 而未有能委國而授之以政者. 蓋見聖人之儀刑而樂告之者, 秉彝好德之良心也, 而私欲害之, 是以終不能用耳.”
사량좌의 말이 매우 가슴에 와닿는다. 고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진실하다. 감정의 이입이 없이 고전을 대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여기 장경부(張敬夫, 장 징후우, Zhang Jing-fu, 1133~1180)는 남송의 장식(張栻, 장스, Zhang Shi)이다. 경부가 자(字)인데, 낙재(樂齋)라는 자도 있다. 보통 남헌선생(南軒先生)이라 호(號)한다. 여기 주희 주에서 ‘장씨’라 하지 않고 장경부라 한 것은 ‘장씨’라 하면 장횡거(張橫渠)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희와 완전히 동시대인이며, 사천성 한주(漢州) 면주(綿竹) 사람이다. 주희ㆍ여조겸(呂組謙)과 더불어 동남삼현(東南三賢)으로 병칭된다. 아버지 장준(張浚)이 효종 때 승상을 지내었기 때문에 그도 일찍 출사하여 거관(居官) 생활 10여 년에 이르렀다. 어디에 가든지 백성의 질고를 물었고, 폐정을 개혁하고, 약자의 부담을 경감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지방학교를 장려하였다. 화(和議)에 반대하고 항금(抗金)을 주장하였다. 어려서부터 가학의 훈도가 깊었고 장성하여서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 호굉(胡宏) 밑에서 수학하면서 이정(二程)의 학문을 익히고 주 희와 교유하면서 유가의 도통을 밝히는 데 힘썼다. 그는 치세의 경험을 살리어 유가전통의 중민사상(重民思想)을 강조하였고 민심(民心)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리학 정통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면서도 매우 폭넓은 관점을 유지하였다. 천(天)과 성(性)과 심(心)이 모두 일체(一體)이며 리(理)에 근본하고 있다. 리는 사(事)에 선재하며, 리는 사(事)와 물(物)을 주재한다. 리가 있으면 사가 있고 물이 있다. 그는 태극(太極)의 개념으로 인(人)과 물(物)의 본원(本原)을 설명하였다. 태극이 동(動)하여 이기(氣)가 형성되고, 이기가 형성되어 만물이 생성된다. 그는 리(理)를 강조하면서도 심(心)의 포괄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심이야말로 만사(萬事)를 관통하며 만리(萬理)를 통섭하여 만물의 주재가 된다. 그리고 그는 치세의 경험으로부터 ‘의리지변(義利之辨)’을 아주 냉혹하게 강조하였다. 위학(爲學)의 제1 요의(要義)가 바로 의리지변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표준이 곧 의(義)와 이(利)라는 것이다. 의 에서 나온 행위는 선(善)하고 이(利)에서 나온 행위는 불선(不善)하다. 예(禮)라는 것도 결국 천리(天理)이며, 천리의 소당연[天理之所當然]을 밝히는 것이다. 그것도 결국 의리지변에서 결정나는 것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안빈낙도할 줄 알아야 하며 이(利)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군주(君主)도 알욕(遏欲)해야 한다. 군주가 검욕한 생활을 해야 모두가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절대시하였고, 인간에게 불선(不善)이 있는 것은 기품지성(氣稟之性)이 조성한 것이다. 본래의 소품지성(所稟之性)의 본연의 선[本然之善]을 회복해야 한다. 변화기질(變化氣質)을 말하였고 모든 사람이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도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의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격물의 격(格)은 결국 ‘주일무적(主一無適)’의 경(敬)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며 그것은 인욕을 거하여 천리를 존하는 것이다. 그는 천리인욕으로써 의리(義利)를 해석하였고 경세(經世)의 사회적 공능을 항상 학문과 연결시켰다. 그런데 그는 심(心)을 만사만리를 관통하고 만물을 주 재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후세에 심학(心學)이 발전케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리학(理學)이 심학(心學)으로 전향되는 발단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주자시대의 성리학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심(心)에 대한 좁은 소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도 그를 인간적으로 경애(敬愛)하였으며 그의 ‘명리거경(明理居敬)’ 사상을 높게 평가하였다. 『남헌문집(南軒文集)』 서(序)에 이르기를 “그 이름 일세를 휘덮기에 족하다[足以名于一世].”라고 평하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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