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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5. 제후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5. 제후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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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제후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

 

 

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천수레의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매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게 하며, 쓰임을 절도 있게 하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리는 데는 반드시 때에 맞추어 해야 한다.”
1-5.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공문에 찾아올 사회 엘리트에 관한 메시지

 

앞서 말했듯이 45장 사이에는 ()’이라는 개념이 공통되어 전송자에게 연상작용을 일으켰을 수도 있지만, 다시 공자의 말을 배열케 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학이(學而)편 전체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1에서부터 표명했듯이 본 편은 공문학교에 오는 학생들에게 군자의 덕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군자의 양성이 공문(孔門)의 소이연(所以然)이라면 군자상을 그리는 학생들에게 군자의 덕성의 핵심적 측면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 핵심적 측면이란 바로 군자는 사회 엘리트이며, 위정자(爲政者)로서 국가를 지도해야만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군자는 정치의 원칙을 심득(心得)해야 한다. 위정은 군자의 본업인 것이다. 그리고 본 장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공자의 말이 특칭(特稱)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든가, 구체적 상황에서 발출한 언급이 아니라, 보편적 상황을 전제로 한 일반적 언급(general statements)이라는 것이다. 다음의 6제자들이여!’하고 시작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이 보편적으로 고수해야 할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를 훈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 장의 애인(愛人)과 다음 장의 애중(愛衆)은 같은 테마로 연결되고 있다.

 

옛날에는 지식인의 당연한 임무 중의 하나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정치에 참여한다 하는 것을 요즈음 논어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장관자리에 앉거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공자의 시대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오히려 요새말로 하면 국방의무를 다한다는 뜻에 더 가까운 의미였다. 공자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전쟁국가시대였다. 작은 성읍 간에 잦은 전쟁으로 인민이 시달림을 받던 그런 시대였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전쟁이었다. 따라서 공자의 말씀으로 군사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 첫 이야기가 학이(學而)편의 다섯 번째 학칙(學則)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으로 보아 공자 자신의 말로 간주된다. 브룩스는 이 장을 천승지국(千乘之國)’ 개념에 착안하여 BC 3세기경의 이라는 기자가 BC5세기경의 노나라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기술한 것으로 보아, 양화(陽貨)편 뒤로 옮겨놓고 있다. 목공() 이전의 BC 5세기 노나라는 천승지국의 규모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브룩스의 주장은 임의적이다. 그 필연성을 찾기 어렵다. 하여튼 브룩스는 이 장을 BC 270년경에 성립한 파편으로 간주한다.

 

 

천승지국

 

공자세가(孔子世家)6에는 공자가 35세 전후에 제나라에 갔을 때, 제나라 경공(景公)을 만나는 장면에서 이 장과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한 대목 나오고 있다.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은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안연11)였다. 즉 제나라의 정치가 명분에서 이미 어그러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경공이 공자의 이러한 지적에 크게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공자는 기대하면서 물러났다. 며칠 있다가(他日) 경공은 공자를 다시 불러 정치에 관해 또 묻는다. 그때 공자가 한 유명한 대답이 다음의 한마디다:

 

 

정치란 재화의 쓰임새를 절도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政在節財.

 

 

이것은 공자가 제나라의 경제구조가 너무 대국의 소비지향적인 낭비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경공(景公)은 감명을 받아 공자를 니계()에 봉()하여 대부로 삼으려 한다. 이때 법가계열의 제나라 재상인 안영(晏嬰)이 가만히 좌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안영의 혹독한 비판으로 공자는 출세(出世: 세상으로 나아감)의 기회를 좌절당한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그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공자의 정치적 입장, 특히 경제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이 정재절재(政在節財)’이 한 마디에 압축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세가절재(節財)’와 이 장의 절용(節用)’은 같은 뜻이다. 아마도 세가의 논의를 따른다면 이 장은 공자가 제나라에서 한 말로 비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천승지국(千乘之國)’은 제나라가 될 것이다브룩스가 노나라도 목공(穆公, BC 410~377 재위) 이전에 이미 천승국 규모였다고 말한 것은 아무래도 과장된 것이다. The Original Analects, 170. 일승(一乘)은 말이 네 마리가 끄는 병거(兵庫). 천승(千乘)이면 말이 4천 마리가 된다. 계씨12에는 제경공이 말 4천 마리를 소유하였다는 이야기가 명기되어 있다[有馬千駟].

 

그리고 한 수레에 말 모는 사람이 한 명, 활 쏘는 사람이 한 명, 그리고 모과(矛戈) 등의 장병병기(長柄兵器)를 휘두르는 사람이 한 명, 도합 3명이 타게 된다. 그렇다면 천승(千乘)이면 수레 인원만 해도 3천 명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보병과 치중대(輜重隊)를 어떻게 편성하냐에 따라 그 숫자는 천문학적 숫자로 늘어난다. 공자시대에는 보병의 위치가 전쟁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 전차당 보병이 10명 정도 할당되고, 춘추말기ㆍ전국시대로 내려올수록 그 숫자는 불어나서 약 70~100명 정도는 되었다고 본다. 손자(孫子)』 「작전(作戰)편에 보면손자1972년 산동 은작산(銀雀山) 전한(前漢) 초기묘(初期墓)에서 손빈병법(孫矉兵法)이 출토됨에 따라 춘추말기 때 그 원형이 성립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차(戰車) 천승(千乘)이면, 치중거(輜重車)가 천 대, 그리고 무장군인 보병이 10만 명(帶甲十萬)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마어마한 편제인 것이다. 그런데 실상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보유의 최대규모를 말한 것이며 실제 전쟁에 천승(千乘)이 동원되는 상황은 흔치 않았다. 춘추시기에는 대국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병거(兵車) 천승을 구비하지는 못했다. 좌전희공(僖公) 28년조에 기재되어 있는 성복(城濮)의 전쟁에도 진문공(晋文公)이 칠백승(七百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도 전쟁이 점점 빈번하게 일어나 병탄(倂呑)의 현상이 생기면서 전차보유대수는 급속히 불어났다. 같은 진국(晋國)이 평구(平丘)의 회맹에 이르렀을 때, 숙향(叔向)의 말에 의하면 이미 사천승(四千乘)을 보유하고 있었다(좌전소공 13). 따라서 공자의 시대에도 이미 천승지국이 꼭 대국만을 의미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선진(先進)25의 그 유명한 증석의 무우영귀(舞雩詠歸)’의 장에 자로가 천승지국(千乘之國)이 대국(大國) 사이에 끼어 죽을 못 쓰는 형편인데[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운운하는 것을 보아도 천승지국이 이미 대국 사이에서 압박을 받는 약소국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오히려 맹자』 「양혜왕첫머리만승지국(萬乘之國)의 임금을 시해하는 반란자는 반드시 천승지가(千乘之家)에서 나온다운운하는 시대상황을 반영함으로 오히려 역으로 무우영귀(舞雩詠歸)‘의 장이 이미 내가 논어의 서막에서 말 한 바대로 후대의 조작이라는 것, 즉 맹자 이후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도 있겠지만, 공자 시대에 이미 노나라의 정치규모를 천승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다. 맹자』 「만장7에는 노나라의 무공(繆公, 머우 꽁, Mou Gong)목공(穆公)과 동일인물이다이 자사와 맞먹으려고 같이 벗하자고 하니까, 자사가 섬긴다[事之]하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벗한다[友之]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하며 국공이라 할지라도 선비는 덕으로 보면 스승인데 같이 벗할 수 있겠냐 하며 무공을 엿먹이는 장면이 나온다무공 즉 목공과 자사의 관계는 곽점죽간에 노목공문자사(魯穆公問子思)라는 간책(簡冊)이 나와 리얼하게 부상 되었다. 이때 노나라의 무공은 자신을 천승지국의 군주로 자처하고 있다. 자사의 시대에는 이미 노나라는 천승지국이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수적인 경제정책으로 실각하다

 

하여튼 대체적으로 이 공자의 말은, 천승지국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공자가 젊은 시대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때의 발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카지노부유키(加地伸行)는 이 말을 공자가 대사가 되었을 때의 그의 정강정책을 나타내는 언급으로 풀이하고 있다孔子, 東京: 集英社, 1994, p.147. 그가 노나라를 떠나 유랑의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 거로(去魯)’의 이유와 맞물리는 언급으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대사구가 되어 감행한 정치의 기조는 노나라와 같은 소국의 실정에 적합한 농업공동체적인 에토스에 기초한 절약형 경제정책이었다. 노나라 정공(定公)과 계환자(季桓子)가 제()나라에서 보내온 80명의 미녀와 문마(文馬) 30()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노나라가 공자의 절약형 경제정책을 거부하고 제나라의 소비형 경제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공자를 실각시키려고 하는 제나라의 모략에 휘말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환자는 공자가 두려웠던 것이다. 제나라의 모략을 빌미로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정공도 그 정변에 가담하고만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 역대정권이 미ㆍ일에 대한 의존적 관계를 주축으로 무분별한 팽창주의를 촉진시켜 국가운영의 주체성이 위태롭게 되는 사태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매우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인간은 향락적 소비문화에 쉽게 매혹된다. 이러한 파라독스 속에 서 공자는 실각되고 3(三家)의 공격을 받게 되어 노나라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유랑의 첫 정박지는 위()나라였다.

 

 

()과 민()

 

다음 이 장의 마지막 두 구절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제도사적 사실을 발견한다.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여기 분명 인()과 민()은 분별되어 사용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은 국()의 인()을 말하는 것이요, ()은 야()의 민()을 말하는 것이다. 애인(愛人)의 인은 국인(國人)이요 그들은 노나라의 도성 내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강 사()의 계층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정강정책이 표방하는 ()’이란 도성 밖의 비야(鄙野)의 서인(庶人)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시 절약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쌀 한 톨을 아끼는 사람들이다. 노나라의 경제의 문제는 바로 성내 즉 국중(國中)의 문제인 것이다. 국인들이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공자가 절용(節用)의 에토스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국인(國人), 즉사(), 즉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부패는 공무원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애인(愛人)의 애()는 본시 아낀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서구화된 의미에서의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공자가 절용(節用)을 강조하는 대상은 곧 사()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 아껴주어야 할 계층이 바로 사()인 것이다.

 

사민이시(使民以時)’사민(使民)’은 주로 전역(戰役)과 관련된 것이다. ()은 전차(戰車)를 탈 수 없으며, 보병이나 치중대의 노역에 동원된다. 사민(使民: 백성을 부림) 즉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농한기(農閑期)를 틈타지 않으면 아니 된다.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키면 그것은 승리했더라도 패배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국고가 텅 비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의 대강의 뜻은 공자라고 하는 고급 관리의 입장에서 자기 이외의 세 계층을 대상으로 발한 메시지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장은 반드시 국군(國君)만을 대상으로 한 메시지가 아니라 고급ㆍ중급관리에 넓게 적용되는 치세 에토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 도()

 

경사이(敬事而信)’ 공자가 자기의 윗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말한 것이다. 이때 ()’는 공무원으로서 수행하는 공무를 일컫는 것이다. 위령공37사군(事君), 경기사이후기식(敬其事而後其食)’이라 했을 때의 ()’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군(事君)’에서 발생하는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공경되어 처리하여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라는 글자는 앞서 주주(朱註)에 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Belief)’이라는 의미 때문에 현대어에서 크게 왜곡된 글자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본시 말하는 믿음이란 신앙(Belief)’이나 신조(Credo)’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험의 뜻이다. 즉 경험적으로 증명이 된다는 뜻이다. 즉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은 언()과 관련된 단어이며 그 일차적 의미는 증험될 수 있는 것만 말한다는 뜻이다. ()은 영어의 ‘verification’에 가깝다. “belief‘의 뜻으로 왜곡되면 안 된다.

 

다음의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은 고급관리로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아래의 사인(士人)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사민이시(使民以時)’, ()에 대하여, 밖에 사는 야인(野人)들을 함부로 괴롭히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메시지 그 대상
경사이신(敬事而信) 제후(諸侯)와 대부(大夫)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 ()
사민이시(使民以時) 서인(庶人)

 

소라이(荻生徂徠)는 천승지국의 정치가 이 정도의 소략한 언급에서 끝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 이끈다, 다스린다)’로 해석치 않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아주 색다른 해석을 내렸다. ()는 문자 그대로 길낸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천자(天子)가 천승지국인 제후국들을 순행(巡幸)할 때, 천승지국을 다루는 도리에 관한 몇 가지 주의사항이라는 것이다. 일견 재미있는 해석이지만 이러한 해석은 곧 그가 본문 그 자체의 중층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황본, 정평본에는 모두 로 되어 있다. 논어원래 판본은 일 가능성이 높다.

 

소라이는 논어를 도덕적 교과서로 읽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센노오노미찌(先王之道, sennōnomichi)의 제도사적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왕지도(先王之道)는 초기 중국문명의 제도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육경(六經)’에 요약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육경(六經)으로써 사서(四書)를 읽어야지, 사서로써 육경을 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사서는 송유가 생각하는 도덕의 표방이 아니라, 육경에서 구현된 선왕의 제도 문물의 표방이라는 것이다. 소라이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 고전세계에 있어서는 참으로 특이한 사회과학적 발상을 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정신을 코가쿠(古學, kogaku)’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고학적(古學的) 발상의 대부분이 지나치게 참신하여 대세(大勢)를 포착하지 못하고 본의(本義)를 그르칠 때가 많다. 지나친 창조성(originality)에의 충동은 때로 망발에 머물고 말 수도 있는 것이다.

 

 

()’()’은 모두 거성(去聲)이다. ()’는 다스린다는 뜻이다. ‘천승(千乘)’은 제후지국이니, 그 땅에서 병거(兵車) 천승을 낼 만한 규모의 나라이다. ‘()’이라 하는 것은 주일무적(主一無適, 하나에 전일하게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을 일컫는 것이다. ‘경사이신(敬事而信)’하는 것은 그 일을 공경하게 하여 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다는 것이다. ‘()’란 농한의 틈새를 말하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가 이 다섯 가지에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앞서 말한 본을 힘쓴다[務本]는 뜻일 것이다.

, , 皆去聲. , 治也. 馬氏云: “八百家出車一乘.” 千乘, 諸侯之國, 其地可出兵車千乘者也. 敬者, 主一無適之謂. 敬事而信者, 敬其事而信於民也. , 謂農隙之時. 言治國之要, 在此五者, 亦務本之意也.

 

 

주일무적(主一無適)’은 주자학의 주요개념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섣부르게 번역하지 않고 그 개념을 통째로 전달하였다. 주자학에서는 정자의 학통을 이어 () =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등식을 고수한다. 경이란 단순히 도덕적 공경심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일(主一)의 주()는 주()와 같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로[]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뜻이다.

 

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어텐션(Attention)에 가까운 뜻이다. 인간의 삶의 모든 효율성은 어텐션, 즉 의식의 집중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일(主一)의 문제는 도덕적이기에 앞서 인간의 일상적 삶의 근원적 문제가 된다. 주일(主一)을 해야 사람이 경()해지고 근엄해진다는 것이다.

 

무적(無適)의 적()은 문자 그대로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간다는 뜻은 의식이 산만하게 흐트러진다는 뜻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의식이 하나로 집중되어 흐트러짐이 없음의 뜻이다. 오늘날 자식을 교육시킬 때도, 교육의 핵심은 결국 주일무적의 문제이다. 책상에 10시간을 앉아 있어도 주일무적하지 못하면 성적이 떨어진다. 1시간을 앉아도 주일무적하는 아이는 성적이 좋아지고 삶의 자세가 자연히 근엄하게 된다. 얼굴도 인중에 기가 모아지는 형색이 된다. 근세유학을 우리는 그냥 번쇄한 도덕으로만 잘못 알고 있는데, 그들이 추구한 문제는 도덕을 넘어서는 근원적 문제이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기본적 삶의 문제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서구학문을 앞서는 것이다. ()을 어텐션으로 풀이한 송유들의 해석학적 틀은 매우 컨템퍼러리(Contemporary, 최신의)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근원을 따지고 들자면, 불교의 심리학, 요가행의 방법론이 송유들에게 흡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소라이(荻生徂徠)는 송유들이 경()을 주일무적 운운하는 것을 개똥만큼도 평가하지 않는다. 조선유학자들의 자세와는 너무도 큰 차별이 있다.

 

주자어류21에 보면, ‘경사(敬事)’의 경()소심외근(小心畏謹)’, 다시 말해서 소심하게 두려워하고 삼가는 정도의 뜻이 아닐까요? 선생께서 주일무적 운운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이 아니십니까? 하고 주자의 제자가 주자에게 묻는 대목이 있다.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주자는 양보를 하지 않고, 치자는 주일무적 하는 그러한 집중력을 가지고 정치를 해야만 경박해지지 않고 태만하지 않게 된다고 대답한다.

 

 

정이(程伊川)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매우 얕다. 그렇지만 당시의 제후들이 과연 이 수준만 달성해도 그 나라를 다스리기에 속했던 것이다. 성인은 말씀을 매우 비근하게 하지만, 상하가 다 통하게 된다. 이 세 가지 덕목만 확대해나 가도 요순의 정치도 이에 벗어날 일이 없다. 그러나 성인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말은 비근하면 곧 천박해지고 만다.”

程子曰: “此言至淺, 然當時諸侯果能此, 亦足以治其國矣. 聖人言雖至近, 上下皆通. 此三言者, 若推其極, 舜之治亦不過此. 若常人之言近, 則淺近而已矣.”

 

 

이런 문장을 번역할 때, 처음 구절 차언지천(此言至淺)’부터 애매하게 새기어 독자들이 문의를 잘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는다. 번역할 때는 숨은 주어를 비롯한 모든 상황적 함수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번역자 자신이 확실하게 문장을 이해하고 그 이해구조를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양씨가 말하였다: “윗사람이 공경치 않으면 아랫사람들이 태만하게 되고, 윗사람이 신험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이 의심케 된다. 아랫사람들이 태만하고 의심하면 나랏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매사에 공경스럽게 하고 믿음이 가게 하는 것은 반드시 윗사람이 몸으로 먼저 실천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주역, ‘()하는 것으로써 도()를 컨트롤하면[], 재물을 상하지 않게 되고, 백성을 다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대저 씀새를 사치스럽게 하면 재물을 상하게 되고, 재물을 상하게 되면 반드시 그 해악이 일반백성에게 미친다. 그러므로 백성을 아낌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그 쓰임을 절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을 부림에 바른 때를 타지 않으면, 농사에 힘쓰는 백성들이 스스로 성의를 다할 방도가 없다. 따라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때를 그르치면 사람들은 그 은택을 입을 길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치자들의 마음가짐을 특별히 논한 것이며 어떤 구체적 정사(政事)에 미치지는 아니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 치자의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문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하여질 길이 없는 것이다.”

楊氏曰: “上不敬則下慢, 不信則下疑, 下慢而疑, 事不立矣. 敬事而信, 以身先之也. : ‘節以制度, 不傷財, 不害民.’ 蓋侈用則傷財, 傷財必至於害民. 故愛民必先於節用. 然使之不以其時, 則力本者不獲自盡, 雖有愛人之心, 而人不被其澤矣. 然此特論其所存而已, 未及爲政也. 苟無是心, 則雖有政, 不行焉.”

 

 

양씨(楊氏)는 주희의 직계 선배인 양시(楊時, 양스, Yang Shi, 1053~1135)를 가리킨다. 양송(兩宋)의 사람. ()는 중립(中立), 호는 귀산(龜山, 꿰이산, Gui-shan). 복건성 남검(南劍) 장락(將樂) 출신. 이정자(二程子)에게 직접 배웠고,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남송이 되고나서는 남도낙학(南渡洛學)의 대종(大宗)’이라고 칭송된다. 이정의 학은 양시(楊時)ㆍ나종언(羅從彦)ㆍ이통(李侗)으로 삼전(三傳)되어 주희에 이르는데, 동남(東南) 출신인 주희(朱熹)ㆍ장식(張栻, 南軒)ㆍ여조겸(呂祖謙, 東萊)의 학문은 모두 양시로부터 나온다. 양시는 민학(閩學)의 창시인이다. 희녕(熙寧) 9(1076)에 진사에 급제하였지만 10년간 두문불출하고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오로지 경사(經史)에만 전념하였다. 양시는 특히 정명도의 우주관을 조술하였는데 불학과 명도의 세계관을 중용(中庸)의 성()과 융합시켰다. 중용이야말로 성학의 연원[聖學之淵源]’이라고 하였다. 중용의 성()으로써 이정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인식론을 천명하였다. 격물치 지의 궁극은 만물이 일리(一理)라는 것을 오득(悟得)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정의 리일분수(理一分殊)’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가의 도덕관념과 인생철학에 구체적으로 운용하였다. 여기서도 인용하고 있듯이 그는 또 주역을 매우 중시하였다. 왕안석의 신학(新學)을 공리지학(功利之學)으로 배척하고 강력한 주전파(主戰派)의 논리와 전략을 제시하였다. 양시는 이정의 학설이 주희에게로 내려오는 가장 중요한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인용된 주역의 문장은 절괘(節䷻, 兌下次上)의 단전(象傳)이다.

 

 

호씨가 말하였다: “여기 열거된 몇 가지는 또한 모두 경()으로써 그 주()됨을 삼아야 한다.” 내가(주자 본인) 생각하기엔, 이 장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는 반복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또 각기 차제(次第: 원인의 차례)가 있다. 읽는 자는 이런 문제를 자세히 미루어 생각해야 한다.

胡氏曰: “凡此數者, 又皆以敬爲主.” 愚謂五者反復相因, 各有次第, 讀者宜細推之.

 

 

어류의 설명에 의하면, ‘다섯 가지란 경(), (), 절용(節用), 애 인(愛人), 사민이시(使民以時)이다. 이 다섯 가지는 상인(相因)한다는 것이다. 경하면 신하고, 신하면 절용하고, 절용하면 애인하고, 애인하면 사민이시 하게 된다, 이런 식의 설명이다. 송유들은 구구하지만, 그 구구한 것이 그들의 학문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생활의 사소한 세목을 가지고 어떤 체계적 이론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호씨는 양송의 호인(胡寅, 후 인, Hu Yin, 1098~1156)을 가리킨다. 이학자(理學者) 호안국(胡安國, 후 안꾸어, Hu An-guo, 1074~1138)의 아들이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중호(仲虎), 치당선생(致堂先生)이라고 불리운다. 복건성 숭안(崇安) 출신이다. 진사 갑과에 급제하고 비서성(祕書省) 교서랑(校書郞)으로 있을 때 좨주였던 양시(楊時)에게서 배웠다. 그 역시 강력한 주전파, 진회(秦檜)와 절교하고 유배당한다. 그는 실효를 힘쓰고 허문을 배격한다[務實效, 去虛文)’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당대의 위선을 공격하였다. 치세 각방면에 있어서, ‘허문(虛文)’에 대한 세세한 규정이 있으며 이것들을 통박한다. 유학의 정도(正道)를 숭상하고, 묵가의 겸애(兼愛)와 불교의 출가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출가한 자는 가족은 버리고 오히려 개미새끼에 애긍심을 갖게 됨으로 친소(親疏)의 분별이 없어지고 현부(賢否)의 변별이 불가능해진다고 비판하였다. 사실 그의 학문에는 심학(心學)적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말하는 유학의 심과 불교의 심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불교의 심은 초도덕적이라서 결국은 도덕적 타락을 불러온다. 인간의 마음이란 천지를 멸하고 인세를 몽환(夢幻)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궁구하는 데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천성의 자연 위에서 도덕적 질서를 수립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술[佛敎之術]은 부모ㆍ형제ㆍ군신ㆍ부부의 세간 밖에 덕을 수립한다. 불교의 심법은 실리(實理)가 없기 때문에 무용(無用)하다. 무심(無心)하니 무계(無戒)하여 결국 불교도들은 망언괴행(妄言怪行)에 빠지고 만다. 인간에게 무심(無心)이란 존재할 수 없다. 오직 양심(養心), 택심(宅心), 존심(存心), 세심(洗心)이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은 죽음일 뿐이다[無心則死]. 인간의 마음은 천지의 이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의 배불론적 발상은 주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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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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