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분열의 시대
주나라의 봉건제는 일찍 도입되었으나 일순간에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봉건제는 주나라의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달하고 숙성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나라식의 종법 봉건제는 처음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혈연에 바탕을 둔 관계는 가장 끈끈하지만 생명력이 짧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혈연관계란 세대교체가 거듭될수록 아무래도 엷어지게 마련이니까.
주나라가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던 전성기까지는 종법 봉건제가 별 문제 없이 기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혈연관계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역(疆域)이 팽창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혈연은 힘을 잃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종의 계약에 바탕을 둔 제도로 바뀌면서 종법 질서를 발전적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 왕실과 점차 관계가 소원해지는 제후국들이 생겨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경제와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들 제후국은 국력이 강성해졌다. 개중에는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해 주나라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제후국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혈연관계에 기반을 둔 종법 질서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모순이 발동한 것이다.
게다가 주나라를 뒤흔드는 요소는 바깥에도 있었다. 은나라 때도 부단히 다툼을 벌였던 이른바 ‘오랑캐’ 나라들의 힘이 점차 강해진 것이다. 비록 봉건제 덕분에 제후국들이라는 방패막이 생겨 주나라는 은나라 시절처럼 심각한 위협을 받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변방 너머까지 무력으로 확실히 복속시키지는 못한 터였다.
주나라의 중기를 넘어서면서 중원 바깥 지역의 이민족 나라들은 끊임없이 중원을 넘보며 침략해 들어왔다. 이들 가운데는 주나라의 지배권 안에 자리 잡은 나라들도 꽤 있었으나, 대개는 중원의 북쪽과 남쪽에 세력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문헌에는 이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夷)ㆍ융(戎)ㆍ만(蠻)ㆍ적(狄) 등이 등장하는데, 다 오랑캐라는 의미다. 훗날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 그 오랑캐들을 방위에 따라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으로 부르게 된다.
이처럼 내부적 요소(봉건제의 동요)와 외부적 요소(이민족의 침입)가 결합되어 주나라 왕실은 이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마침내 그 동요를 붕괴로 만든 계기가 생겨났다. 역사는 가혹하게 되풀이 되었다. 하나라를 망친 걸왕과 말희, 은나라를 망친 주왕과 달기의 콤비가 주나라에도 등장한 것이다. 바로 유왕(幽王)과 포사(褎姒)가 그들이다. 유왕은 선배들보다 한술 더 떠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임명하려 했다. 왕실이 문란해졌으니 오랑캐고 뭐고 가릴 게 없었다. 유왕의 조치에 반발하는 세력은 북쪽의 이민족 국가인 견융(犬戎)을 끌어들여 주 왕실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유왕이 전사하고 수도인 호경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아직 북방 민족은 중원을 통치하려 하지는 않았다. 승리한 견융이 물러가자 제후국들은 새로 평왕(平王)을 옹립했다. 견융이 또다시 침입해올까 두려워한 평왕은 수도를 동쪽의 낙읍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기원전 770년 주의 동천(東遷)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역사학자들은 동천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원래 주나라를 서주(西周), 그 이후를 동주(東周)로 구분한다.
주의 동천(東遷)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침입이 주의 동천을 불러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올렸다면, 그동안 강성해진 제후국들은 이렇게 마련된 무대에서 주나라를 조연으로 물러앉히고 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간 지속된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분열기를 가리키는데, 크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양분된다. 춘추시대는 주의 동천에서부터 당시 가장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진(晋)이 분열되는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를 가리키며, 전국시대는 이때부터 중원 서쪽의 강국인 진이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가리킨다. 춘추와 전국이라는 말은 모두 문헌에서 따온 명칭이다. 춘추는 공자(孔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나왔고, 전국은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전국책(戰國策)』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춘추전국시대라는 명칭은 당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것이다.
동천 이후로 주나라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중국 대륙은 열강이 지역에 할거해 다툼을 벌이는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나라의 역할이다. 춘추시대에 활동한 열강들은 굳이 동주를 멸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이빨과 발톱까지 빠져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인데도 강국들은 동주를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전보다 더 보호하고 섬겼다. 주나라에 바치던 조공도 계속 유지하고 제후들이 정기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는 행사도 여전히 계속했다. 주나라 왕실은 사나운 제후국들 틈바구니에서 매년 천제(天祭)도 계속 지냈고, 제후국에서 새로운 제후가 왕위에 오르면 형식적으로나마 이를 승인하는 권위도 유지했다.
물론 제후국들이 실제로 옛날처럼 주나라를 성심성의껏 받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름밖에 남지 않았어도 제후국들에 주나라는 여전히 천하의 중심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오히려 주나라 왕실을 보호하는 것은 주나라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적통 제후국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 덕분에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동주 시대부터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250년까지도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다(그래서 주나라는 서주와 동주를 합쳐 850여 년이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수명이 왕조가 되었다).
▲ 한자의 변천. 갑골문에서 오늘날 한자까지 변해온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칸이 주나라 시대의 문자에 해당하며, 네 번째 칸은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한 직후 사용된 전서체(篆書體)다.
하지만 주나라라는 중심은 상징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는 무력해졌다. 그래서 제후국들은 명칭만 제후국일 뿐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에 대해 형식적인 예의만 갖추면서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춘추시대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교대로 패권을 잡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잠시 정(鄭)나라가 세력을 떨치지만 본격적인 패자의 시대는 제(齊)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이른바 춘추 5패로 불리는 제(齊)ㆍ진(晋)ㆍ초(楚)ㆍ오(吳)ㆍ월(越)이 번갈아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춘추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제와 진의 지배기는 아직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상당히 살아 있던 무렵이었다. 제의 환공(桓公, 기원전 ?~기원전 643)은 제후들의 맏형처럼 처신하면서 동주를 부모의 나라처럼 받들었으며, 이민족들의 침입으로부터 약소 제후국들을 지원하는 등 중원을 이끌었다. 제의 뒤를 이은 진(晋)의 문공(文公, 기원전 697~기원전 628) 역시 환공과 마찬가지로 중원의 관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존왕양이의 정책을 계승했다. 제와 진은 사실 그럴 만한 처지였다. 제는 일찍이 주의 개국공신인 강태공(姜太公)에게 분봉된 전통에 빛나는 제후국이었고, 진은 원래 주의 성왕(成王)이 자기 당숙에게 분봉한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는 주나라 건국 공신의 후예였고, 진은 주나라와 돈독한 혈연관계에 있는 제후국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의 후반기를 장식하는 초ㆍ오ㆍ월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세 나라는 황하는 물론 화이허보다도 더 남쪽인 양쯔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남방 국가들이다. 하ㆍ은ㆍ주의 삼대는 전부 북중국의 중원을 기반으로 삼은 왕조였다. 그러므로 전통 제후국의 입장에서 보면 초ㆍ오ㆍ월은 원래 ‘양이(攘夷)’의 대상인 오랑캐들이었다.
초나라는 이미 제 환공 시대부터 남중국의 넓고 비옥한 영토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중원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제 환공은 초나라의 위협을 받는 중원의 약소국들이 도움을 요청하자 이를 무력으로 막아내고 중원을 지킨 바 있었다. 진 문공 역시 재차 북상을 추진한 초의 공격을 막는 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와 진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제 초나라의 발목을 잡는 것은 사라졌다. 진 문공이 죽고 진의 대외 정책이 소극적으로 전환되는 틈을 타초의 장왕(莊王)은 진의 군대를 격파하고 채(蔡)ㆍ정(鄭)ㆍ진(陳)ㆍ송(宋)ㆍ노(魯)ㆍ조(曹) 등의 약소국들을 복속시켜 마침내 중원의 서열 1위로 우뚝 섰다. 남중국 왕조가 중원을 정복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거칠 것이 없던 초의 발목을 잡은 것은 전통의 북중국 제후국이 아니라 같은 남중국의 오와 월이었다. 중원의 진과 남방의 초가 대립하고 있던 기원전 6세기 무렵 오와 월은 양쯔 강 이남에서 세력을 키운 뒤 북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와 월은 서로 패권을 주고받으면서 춘추시대의 마지막 50년간을 장식한다. 당시 오의 합려(闔閭) 대 월의 구천(句踐), 오의 부차(夫差) 대 월의 구천으로 이어지는 오와 월의 다툼은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로 후대까지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심하게 다투던 오와 월은 이후 초의 손에 멸망당했다.
▲ 와신상담의 무기. 왼쪽은 오나라 왕 부차의 동검이고, 오른쪽은 월나라 왕 구천의 동검이다. 춘추시대 장수들이 사용하던 전형적인 무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은 청동제 무기지만 전국시대에 들면 철제 무기로 바뀌고 싸움도 더 치열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춘추시대 후반기를 통해 초ㆍ오ㆍ월 같은 남중국 왕조들이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원래 중국 문명은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에서 탄생했으며, 주나라(서주) 시대까지도 북중국이 문명의 적통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양쯔강 이남의 남중국 지역까지 자연스럽게 중원 문화권에 포함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원을 포함하는 화북과 강남으로 확정된 중국의 강역은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넓어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시대의 경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7세기 만주족의 정복 왕조 청(淸)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만주가 중국의 강역에 포함되기까지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역사는 춘추시대에 정해진 경계를 무대로 해서 전개되는 것이다. 춘추시대 이후에는 ‘오랑캐’라는 말도 남중국과는 무관해지고 고비 사막 너머 몽골 지역과 서북부 변방의 북방 민족들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한반도를 가리키는 ‘동이(東夷)’라는 이름도 한반도의 역사가 중화 질서에 편입되는 7세기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부터는 사라지게 된다】.
▲ 춘추 5패와 전국 7웅 양쯔강 이남에 자리 잡은 초ㆍ오ㆍ월 3국은 춘추시대를 거쳐 중원 문화권에 포함되었다. 만약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춘추시대 이전 서주(西周) 시대에 완성되었다면, 중원의 나라들은 강남의 나라들을 오랑캐로 분류하고 적대시했을지도 모른다. 강남이 중원 문화권에 포함됨으로써 이제부터 ‘오랑캐’는 북방 이민족들만 남게 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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