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하나라와 은나라는 말기의 현상이 매우 비슷하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은 말희(妹喜)라는 미녀에게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탐닉한 폭군이었다. 둘 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었다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인물들이다. 수백 년이나 존속한 두 왕조가 결국 한낱 여인 때문에 망했다는 것은 공교로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 왕조가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나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쿠데타의 주역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전 나라의 마지막 왕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 중국 역대 왕조의 특기이기도 하다.
폭군인 걸왕(桀王)을 무너뜨리고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당연히 걸왕과 정반대로 자애롭고 고매한 인덕을 가진 인물로 기록된다. 또한 은나라의 주왕을 타도하고(그는 궁전에 불을 지르고 그 불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도 마찬가지로 후대에 현군으로 전한다. 하기야, 새 왕조의 건국자 치고 역사에 인품과 지혜를 갖춘 인물로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
주족(周族)은 은나라 말기인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은나라의 서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씨족이었다. 그들을 경계한 주왕은 주족의 문왕에게 서백(西伯)이라는 관직을 주고 왕국의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은나라가 이미 지는 해라는 사실을 간파한 문왕은 도읍을 동쪽 풍(豊)으로 옮기고 은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던 차에 문왕이 병사하고 그 대신 아들 무왕(武王)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때마침 주왕은 동쪽 변방의 원정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때문에 국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 틈을 타서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1111년경에 주나라를 세웠다. 은나라는 하나라보다 더 오랜 700년 가까이 존속했으나, 그 기간 동안 내내 중원을 강력히 지배한 왕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주나라 때부터는 왕국의 성격이 한층 뚜렷해지고 체제도 훨씬 견고해진다. 사실상 중국 역사의 첫 왕조나 다름없다. 그래서 주나라는 수천 년 뒤, 나아가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의 영원한 고향 같은 왕조로 남게 된다. 물론 출범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생국 주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우선 은나라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국토부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넓어졌다. 그런 광대한 중원에는 여전히 수많은 씨족사회가 분립해 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엄청난 격전을 치렀는데, 이는 은나라의 잔존 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은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어도 전 왕조의 귀족 세력이 전부 주나라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선진국 은나라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서 무왕은 은나라의 옛 지배 집단을 회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나라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제사도 그대로 지내도록 했다. 다른 귀족들도 주나라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영토를 나누어주고 지배권을 부여했다. 물론 철저한 감시가 따르지 않고서 그렇게 한다면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무왕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은나라 잔존 세력을 감시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식 봉건제(封建制)의 기원이다【중국식 봉건제는 중세 유럽의 서양식 봉건제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근본적인 성격에서는 크게 다르다. 서양에서는 상급 군주가 하급 군주에게 토지의 소유권 자체를 넘겨준 데 반해, 중국에서는 오로지 최고 지배자만이 토지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사적 소유의 관념이 생겨날 수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천하의 단독 주인, 즉 황제만이 모든 것의 진정한 소유권자였다. 이 차이는 중앙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서양에서는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강력한 중앙 권력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후대에 두 문명의 성격을 좌우하게 된다】.
무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을 맡게 되는데, 그의 통치 시기에 주나라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형이 다스리던 시대에 비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주공은 아예 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봉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은나라는 존속 기간이 길었어도 수백 개의 씨족국가들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성한 나라였을 뿐 특별히 중심지라 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주변의 약소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평상시에 그들에게서 필요한 물자를 약탈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의 군사를 동원할 뿐 별다른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와 달리 주나라는 공식적으로 중원의 중심임을 자처하고 주변의 나라들을 휘하에 거느리고자 했다.
흔히 서양 중세 영주들의 작위를 공작ㆍ후작ㆍ백작ㆍ자작ㆍ남작 등으로 구분하는데, 원래 이 5관등의 작위는 주나라 시대에 성립된 것이다. 주나라 왕실은 주변 제후국들에 다양한 작위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영지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평상시에는 제후국의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자치에 맡겨두었지만,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주나라 왕실을 방문해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바쳐야 했다. 이것이 바로 조공(朝貢)이다. 이렇게 시작된 조공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주요한 외교(때로는 무역) 수단이 된다.
이렇게 보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제법 합리적이고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제도인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은나라가 망한 이유는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은나라는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동쪽 변방에 있는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갑골문에 나와 있는 은나라의 국가 행사들은 대부분이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이었다. 그만큼 은나라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은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주나라는 주변 약소국들을 확실하게 제압해야 했다. 그런데 드넓은 중원 일대를 주나라 혼자만의 힘으로 직접 지배할 수는 없다. 각 지역마다 일일이 주나라 군대를 파견하거나 주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외교적인 수단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봉건제였던 것이다.
▲ ‘중국형’ 인물도. 왼쪽부터 주나라 건국의 핵심 인물들인 문왕, 무왕, 주공의 초상이다. 보다시피 앞서 본 황제의 모습과 거의 닮은 얼굴이다. 이후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초상도 대개 비슷하다. 중국인의 영원한 고향인 주나라는 인물에서도 중국인의 전형적인 표준인 걸까?
그러나 주나라에서 아무리 애쓴다 해도 이웃 제후국들이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주나라는 제후국들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무왕이 동생들을 제후국에 파견했듯이, 주나라 왕실은 가족 관계와 혼인 관계를 이용해 인근 나라들과 봉건적 연관을 맺었다. 말하자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서양 중세의 봉건제처럼 계약에 의한 군신 관계라기보다는 본가와 분가의 관계와 같았다. 이렇게 혈연에 기반을 둔 관계를 종법(宗法) 봉건제라고 부른다. 주나라 초기에 제후국은 100개가 훨씬 넘었는데, 그 가운데는 주나라 왕실의 성인 희(姬)씨 제후국이 3분의 1 이상이었다【제후국이라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정식 국경을 가진 나라를 연상하면 안 된다. 당시의 국가들은 서로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게 아니라 도시국가에 가까웠다. 제후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성읍을 조성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는데, 이것을 ‘국(國)’이라고 불렀다】.
또한 각각의 제후국도 나름대로 혈족을 바탕으로 지배 집단을 구성했다. 제후는 휘하에 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의 관등 위계를 두어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게 했으며, 주의 왕실에서 영지를 분봉받았듯이 귀족들에게 다시 토지를 분배했다. 경제적 생산을 담당한 것은 전통적인 농민과 노예 들이었다.
농민들은 농업 생산을 맡았다. 모든 토지는 지배 귀족의 소유였으므로 농민들은 그들에게서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그 대가로 조세를 납부했다. 공동체적 경작 방식으로 유명한 정전법(井田法)이 주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토지제도다【토지를 ‘井자’형으로 9등분하고 한가운데 토지는 조세 납부를 위한 공용 토지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밖에도 귀족을 위한 각종 노역을 담당해야 했다. 조세와 부역, 이 두 가지는 점차 제도화되면서 고대국가의 재정을 구성하는 양대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주로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노예들은 농사를 담당하지 않고 건축과 무기 제조, 귀족을 위한 사치품 제작 등을 담당했다【이 점도 서양과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는 로마 시대부터 중세, 나아가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에 이르기까지 노예를 거의 농업 생산에만 사용했다】.
봉건제는 중심과 변방의 구분을 전제로 한다. 주나라가 봉건제를 시행함에 따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의 중심이 형성되었다. 주나라는 원래 도읍인 호경(鎬京, 지금의 시안 부근)【중국 지명은 원래 중국식 한자 발음으로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시안이나 뤄양 같은 지명은 현대에도 존재하는 데 반해 호경이나 낙읍 같은 옛 지명은 지금 사용되지 않으므로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대체한다. 참고로, 중국 인명의 표기는 20세기 이전의 인물은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20세기 이후는 중국식 한자 발음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고, 정치ㆍ경제ㆍ군사의 새로운 중심지로 뤄양 서쪽에 낙읍(洛邑)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중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봉건 제후국. 지도에 등장하는 제후국들은 오늘날과 같은 영토 국가가 아니라 성곽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다. 그러므로 그 사이의 넓은 ‘여백’에서 살아가는 농민들은 어느 특정한 제후국에 속한 ‘국민’이 아니다. 도시국가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가 잘 알려져 있지만 고대에는 세계 어디서나 보편적인 국가 형태였다.
그러나 주나라는 중국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인 것만이 아니었다. 중국에 중심이 생겼다는 것은 단순히 현실의 정치적ㆍ경제적 ‘사건’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대체했다고 하지만, 사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은나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농업 생산에서는 은나라를 능가하지 못했고(농기구는 여전히 석기였고, 생산 방식도 은대와 같은 집단 경작이었다), 청동기 주조 기술은 오히려 퇴보했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그런 생산적인 분야에 기여한 게 아니라 정치 이념에서 후대에 길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앞서 말했듯이, 주나라는 건국할 때부터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을 강조했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해 은나라를 멸한 것은 천명이다. 심지어 주나라 문왕이 서백으로 재직할 무렵 장차 주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이 되는 여상망 태공(강태공)을 만난 것도 꿈에서 천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명을 받은 주나라의 왕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다. 천자는 당연히 천하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 바로 여기에 봉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이 들어 있다. 천자를 받드는 제후들은 북극성 주변을 따라 하늘을 도는 별자리들처럼 한가운데 있는 천자의 나라를 예(禮)로써 섬겨야 한다. 그것이 곧 법으로 정해진 질서, 즉 종법 질서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자연히 주변이 된다. 그래서 주나라라는 천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제후국들의 관할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모두 ‘오랑캐’의 나라가 되었다. 이것이 곧 중화사상(中華思想)이며,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주양이(尊周攘夷) 혹은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중국적 전통의 시작이다.
이렇게 천자의 개념, 예의 관념, 중화사상 등 중국적 유교 질서의 싹은 모두 주나라의 봉건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나라는 이후 3000년 동안 중국 역대 왕조의 영원한 이상향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중국인들은 주나라를 포함해 하은주의 세 왕조가 교대한 기원전 2200년경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혼란이 시작되는 기원전 8세기까지를 삼대(三代)라고 부르며 그리워하는데, 여기에 그 이전의 요순시대까지 합치면 중국의 ‘좋았던 옛날’은 무려 2000년에 달하는 셈이다】.
▲ 주나라의 문자 기원전 8세기 서주(西周) 시대 청동 종에 새겨진 문자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그리 달라진 게 없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지역마다 다르게 쓰던 한자의 서체를 통일하면서 중국의 한자는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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