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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짧은 통일과 긴 분열: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짧은 통일과 긴 분열: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건방진방랑자 2021. 6. 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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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마우리아가 멸망한 뒤 4세기에 굽타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인도는 500년간의 분열기를 겪게 되는데, 이 긴 기간 동안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분열된 상황에다 정치적 구심점조차 없었던 탓에 이 시기 인도에는 이민족의 침략도 잦았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게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다. 그가 잠시 펀자브를 장악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인들의 일부는 아예 인도의 서북부에 눌러앉아 그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숭가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칸바(kanva) 왕조는 전력을 다해 그리스계 민족의 남하를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서북부 지역은 인도인의 손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일찍이 아소카 왕 시절에 인도의 서북부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대월지)와 파르티아(안식국)가 발흥하고 있었다. 박트리아는 펀자브 지방을 지배하면서 한때 북인도의 중앙부까지 영향권으로 거느렸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에 급격한 민족이동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의 세력 판도는 크게 변하게 된다. 발단은 중국의 한 무제. 무제의 압박 정책으로 중국에서 밀려난 흉노가 서쪽으로 진출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대월지를 밀어낸 것이다. 대월지는 또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고 있던 이란계 유목민족인 사카족(saka)을 밀어냈다. 졸지에 터전을 잃은 사카족은 인도 쪽으로 남하해 그곳에 있던 박트리아를 멸망시켰다. 이런 도미노 현상이 벌어진 끝에 사카와 파르티아는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었다.

 

한편 멸망당한 박트리아에서는 쿠산족(Kushan, 인도인들은 대월지를 쿠샨이라고 불렀다)이 일어났다. 쿠산의 카드피세스 1세는 인근 부족들을 통합해 세력을 키우고, 파르티아를 서쪽으로 밀어붙여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쿠샨 왕조를 열었다. 이리하여 1세기 무렵에는 인도 서쪽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방에는 파르티아가 자리 잡고, 인도 서북부와 북인도는 쿠샨이 지배하는 형국이 되었다.

 

 

쿠샨 왕조는 2세기 중반 카니슈카(Kanishka)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카니슈카 왕은 동쪽으로 갠지스 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남인도의 상당 부분까지 손에 넣어 거의 통일 왕조에 맞먹는 강역을 구축했다. 특히 그는 정복 사업뿐 아니라 불교의 진흥에도 열심이었으므로 제2의 아소카라고도 불린다. 그는 학문 활동을 적극 후원하는 한편 불교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고 표준 이론을 세우기 위해 카슈미르에서 최초의 불교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대승불교의 교리는 훗날 중국과 한반도,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된다역사 교과서에는 아소카가 소승불교를 전파하고 카니슈카가 대승불교를 확산시켰다고 나오지만, 아소카의 시절에는 어차피 소승불교밖에 없었다. 실은 소승불교라는 명칭도 없었는데, 훗날 대승불교파가 기존의 불교를 경멸하는 의미로 소승불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은 수레라는 뜻이다). 소승불교는 부처를 신이 아니라 성불(成佛)한 존재, 인간의 궁극적 단계인 열반에 도달한 존재로 본다. 불교는 원래 이런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아소카 시절에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되면서부터는 정식 교단으로서의 성격이 필요해졌다. 개인적 수양만 강조하는 무신론으로 교세를 확장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후에는 부처를 신의 화신으로 섬기는 대승불교가 발달했다(여기에는 헬레니즘으로 인한 그리스 다신교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인도의 토착 다신교인 힌두교와 맞서면서 자연스럽게 불교가 유신론으로 발달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며, 중생을 제도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원래 불교의 교리와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불교가 체계적인 교단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은 대승불교의 덕분이 크다.

 

쿠샨 왕조는 통일 제국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마우리아 제국보다 한층 확고한 기반을 갖춘 데다 인도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널리 알린 나라였다. 특히 수도인 페샤와르(Peshawar)가 있는 간다라 지방은 동서 문명이 융합하는 중심지였다. 때마침 2세기경에는 로마 제국의 국경이 동쪽으로 시리아까지 확장되어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뿌린 헬레니즘의 씨앗이 개화할 조건이 충분히 성숙해 있었다. 당시에 사용하던 화폐에는 그리스 신들의 모습도 많이 보이며, 이란계 군주의 이름, 심지어 로마 황제의 칭호도 등장한다. 또한 쿠샨은 동쪽으로부터 중국 문화도 받아들였다. 쿠샨의 왕들은 중국 황제처럼 천자를 자칭할 정도였으니, 중국의 중앙집권 체제를 꽤나 부러워했던 듯하다.

 

쿠샨 왕조가 지속적으로 발전했더라면 마우리아를 능가하는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서 문물의 활발한 교류는 쿠샨에 약도 되었지만 병도 가져왔다. 지리적 요충지에 있다는 것은 자체의 힘이 강할 때는 중심이 되지만 약할 때는 남의 먹잇감이 될 따름이다. 3세기 초반 쿠샨 왕조는 파르티아를 대신해 일어난 강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멸망당하고 만다. 이후 인도 전역은 약 100년 동안 다시 수많은 소국가로 분열되었다가 굽타 왕조에 의해 재통일된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한 번 뿐이고 무척 길었지만, 인도판 춘추전국시대는 짧으면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안드라의 불교 미술 북인도에 쿠샨 왕조가 강성할 무렵 데칸과 남인도에는 안드라의 사타바하나 왕조가 있었다. 남인도는 북인도처럼 외부의 침입이 잦지 않았던 덕분에 왕조 교체가 비교적 빈번하지 않아 사타바하나는 3세기까지 존속했다. 위 탑문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와 조상 들을 보면 당시 불교 미술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법에 의한 정복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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