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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고대 인도의 르네상스: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고대 인도의 르네상스: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건방진방랑자 2021. 6. 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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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대 인도의 르네상스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쿠샨 왕조가 무너진 이후 약 1세기 동안 지속된 분열 상태를 해소한 사람은 찬드라굽타 1세였다(마우리아의 건국자인 찬드라굽타와 이름이 같기에 보통 1세라는 말을 붙여 구분한다). 그는 320년 소국가들을 통일하고 굽타 제국을 세웠다. 찬드라굽타는 마가다 지방의 지주출신이었다고 전하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명문 귀족인 리치비 가문의 공주와 정략결혼하고 이후에도 그 혈연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것을 보면 원래는 변변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는 쿠샨 왕조 때 생겨난 마하라자 드히라자(maharia dhirajs, 왕 중의 왕)’, 즉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한 왕조의 건국자는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지만,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활동은 전 왕조를 타도하는 데 투입되므로 새 나라에 관해서는 명패만 만든 업적에 그치게 마련이다. 찬드라굽타도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제국을 세운 데 불과했고, 신생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사람은 그의 아들인 사무드라굽타였다.

 

사무드라굽타는 인도 역사상 보기 드문 탁월한 정복 군주였다. 그의 정복 활동으로 굽타는 벵골에서 인더스 하류 지역까지 북인도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심지어 직접 지배를 받지 않는 남인도와 데칸 지방의 소국들도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 사무드라굽타의 치세에 이르러 굽타 왕조는 이전의 쿠샨 왕조와 달리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제법 갖추었으나, 진정한 제국에 어울리는 중앙집권은 역시 미약했다.

 

사무드라굽타에 뒤이어 찬드라굽타 2, 쿠마라굽타 등 유능한 군주들이 계속 출현하면서 굽타의 국력은 크게 신장되었다. 찬드라굽타 2세는 오랜 숙적이던 사카족을 완전히 제압하고 서부의 국경을 튼튼하게 안정시켰다. 또한 쿠마라굽타는 중국에서 밀려난 흉노족의 침입을 물리쳐 다시는 그들이 인도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여기서 잠깐 중국 대륙의 북방을 고향으로 하는 유목민족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자. 지역적으로 이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중국 북쪽 몽골 출신으로는 흉노(훈족)돌궐(튀르크)이 있으며(이들은 별개의 민족이라기보다 시대에 따라 중국 역사서에서 다른 명칭으로 불렸을 뿐이다), 중국 동북쪽 출신의 민족은 랴오둥의 거란과 만주의 여진이 대표적이다. 거란이나 여진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데, 아주 옛날에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느슨한 중앙집권 체제로 강적을 만나 장기전을 치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흉노의 남하를 간신히 막은 굽타 제국은 이후 쿠샨, 사산 등의 민족들에게 서부 변경을 계속 침탈당하면서 100년 동안이나 잦은 전쟁에 시달렸다. 그나마 전성기에는 유능한 군주들이 미약한 중앙집권을 보완해주었지만, 쿠마라 굽타 이후에는 그런 행운도 계속되지 못한다. 결국 굽타는 점차 추락하다가 5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굽타가 멸망한 뒤 또다시 100여 년 동안 인도는 분열과 정치적 혼란의 시대를 맞았다. 벌써 몇 번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인지 모를 일이지만 또다시 통일은 이루어졌다. 난립하던 소국들을 통합하고 강력한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바르다나(Vardhana) 가문의 하르샤(Harsa, 590년경~647년경)였다. 그는 606년에 즉위해 카슈미르와 네팔, 발라비 등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북인도를 평정했다.

 

인도 역사에서는 특이하게도 정복 군주일수록 학문에도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아소카, 카니슈카, 사마드라굽타 등이 모두 그랬는데, 하르샤도 같은 유형의 군주였다. 그는 종교와 문학에 관심이 컸고 직접 희곡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굽타 제국의 재현을 꿈꾸었던 바르다나 왕조는 하르샤가 암살당하면서 급격히 몰락한다. 언제 통일이 되었는가 싶더니 어느새 인도는 예의 수많은 소국이 공존하는 분열기로 접어들었다. 중국의 역사는 통일 제국의 시대가 기본이고 분열기가 사이사이에 잠깐씩 존재했다면(그래서 분열기에는 다들 통일을 지향했다), 인도의 역사는 그 반대로 특별한 중심이 없는 분열기 위주로 전개되면서 이따금씩 통일 왕조가 들어서는 양상이었다.

 

 

굽타의 성 문화 굽타 시대에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위 그림은 당시에 젊은이들에게 사랑의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간행된 카마수트라의 한 장면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성교육용 서적인 셈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가장 인도적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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