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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혜공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혜공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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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

 

 

사실 원성왕(元聖王)이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는 핸디캡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인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상대등이었던 그는 다른 대권 후보였던 왕손 김주원(金周元, 김춘추의 6세손)을 누르고 즉위했던 것이다이 문제는 한참 뒤인 822년에 반란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아버지가 즉위하지 못한 원한을 40년이나 잊지 않고 있다가 웅천주 도독으로 부임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의 전북과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장안국이라는 국호와 경운이라는 연호까지 제정하면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경주 귀족들에게 진압되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김헌창이 잠시나마 별도의 나라까지 세운 것은 당시 중국으로부터 불어온 혼돈의 바람에 힘입은 것이다. 비록 군신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취했으므로 유혈 쿠데타는 아니었지만, 적법한 계승자가 아닌 것은 명백하다. 그런 만큼 기존 귀족들의 눈초리가 따가웠을 테니 원성왕으로서는 귀족 세력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변형된 형태로나마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실은 수 문제가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한다는 것은 곧 국왕이 마음대로 정치를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이니까. 하기야, 이런 점에서는 오늘날의 국가고시도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최고 권좌에 오른다면 현대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절차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 라는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의 타이틀을 연속 방어한 박정희와 그 뒤를 이은 전두환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처음부터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으니 권력 승계의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이 점에선 8세기 신라의 원성왕도 다르지 않다. 그는 선덕왕의 즉위 전에 둘이 함께 또 다른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상대등에 오른 신군부 세력의 한 보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국왕이 쿠데타를 벌였다면 뭔가 사연이 있다는 이야기다. 과연 여기에는, 작게는 신라 왕실이 흔들리고 크게는 동아시아의 중심이 흔들리게 된 사연이 있다.

 

때는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65년에 죽은 경덕왕(景德王)은 신라 역사에서 성덕왕에 이어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재위 기간 내내 행복을 누린 임금이었다. 따라서 신라 왕들의 운명으로 보면 이제부터 행복 끝, 불행 시작이다. 8세에 왕위를 이은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惠恭王, 재위 758~780)은 즉위 초부터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인기를 잃었다. 그게 어린아이의 탓일 리는 없지만 문제는 귀족들이 그것을 기회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우선 768년에 일길찬(一吉飡)이었던 대공(大恭)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곧 진압되었지만 삼국통일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반란이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아니나 다를까, 2년 뒤에는 이찬 김융(金融)금융대란이 아닌 반란을 일으켰고 다시 5년 뒤에는 시중 김은거(金隱居)은거는커녕 모반을 했다.

 

시중이라면 국무총리 격인데 그런 자가 반란을 주동하다니! 아무래도 중국식 관직명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 혜공왕의 측근들은 이듬해인 776년에 관직명을 도로 신라식으로 바꾼다(사실 경덕왕이 중국식으로 바꾼 데는 왕권 강화의 목적이 있었으니 귀족들은 불만이었을 게다). 그러나 780년에 다시 일어난 반란으로 결국 혜공왕은 한창 나이인 23세에 아내와 함께 살해당한다. 이 반란을 진압한 일등공신이 당시 상대등이던 김양상(金良相)과 김경신(金敬信)인데, 김양상은 선덕왕(宣德王)이 되었고 김경신은 상대등을 물려받았다가 나중에 원성왕(元聖王)이 된 것이다(경덕왕의 중국화 작업으로 시중에 눌렸던 상대등은 권력이 잠시 약화됐다가 이를 계기로 다시 2인자의 지위에 올랐다).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36대 왕인 혜공왕을 끝으로 신라의 중대(태종무열왕 - 혜공왕)가 끝나고 하대의 쇠퇴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했는데, 실상 신라의 하대는 쇠퇴기 정도가 아니라 혼란기라고 해야 한다. 그런 현실을 말해주는 한 가지 예가 왕위계승의 불안정이다. 혜공왕 이후 신라가 멸망하는 935년까지 약 150년 동안 신라의 왕들은 무려 20명이 등장한다. 그 전까지의 전체 신라 역사 840년 동안 36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인플레이며, 따라서 평균 재위 기간도 예전의 1/3이 채 못 된다(게다가 그 중 네 명은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중대의 시조 통일신라기의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한 원성왕릉이다. 12지신상을 비롯한 여러 석상까지 거느려 격식을 잘 갖춘 왕릉인데, 그도 그럴 것이 원성왕은 신라 중대 약 80년에 걸쳐 지속되는 새로운 왕계를 확립했으므로 말하자면 중대의 시조인 셈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끝으로 신라의 번영과 안정은 끝난다. 그 이유는 원성왕(元聖王)의 무덤을 잘못 쓴 탓이 아니라 모국인 당나라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바로 한 세대 전만 해도 최전성기를 구가하다가 갑작스럽게 혼탁해진 이유는 뭘까? 아무리 어린 왕이 즉위했다 해도 그것만으로 시대의 흐름이 갑자기 바뀐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더구나 시대의 흐름이 급박해진 것은 신라만이 아니다. 중국을 모방하는 데 신라와 함께 누가누가 잘하나를 벌이던 일본도 8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런 탓인지 경덕왕은 전 왕인 성덕왕과 달리 일본과의 교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일본의 사정으로 눈을 돌려보면, 당시 동아시아를 휩쓴 혼란의 파도를 좀더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혼란의 신호탄은 최첨단 수입품인 율령이 유명무실화된 것이다. 원래 율령은 관료제의 바탕 위에서만 기능하게 마련이다. 율령이란 지금으로 치면 헌법에 해당하는데, 법이 있어도 집행할 관리들이 없으면 말짱 헛것이다. 관료제 수준이 보잘것없다는 점에서는 신라나 일본이나 오십보백보, 따라서 비록 독자적 율령을 만들었다 해도 일본은 아직 율령제 국가가 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국가의 골간인 율령이 기능하지 못하자 다른 제도들도 우르르 무너진다. 중국의 균전제(均田制)를 본따 만든 반전제(班田制)가 붕괴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토지 사유화에 나서 장원제가 발달한다. 급기야 780년에 징병제가 사라지자 귀족들은 또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사병양성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9세기에 이르면 일본은 각지에서 장원의 영주로 탈바꿈한 귀족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서로 박터지게 싸우는 치열한 내전시대로 돌입한다(10세기를 넘어서면 그 사무라이들이 독자적

세력화를 이루며, 더 나중에는 바쿠후幕府라는 일본 특유의 무인권력체를 형성한다).

 

이렇듯 신라와 일본이 같은 시기에 급속도로 체제 붕괴를 맞게 된 이유는 뭘까? 당시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한 가지 변화에 주목해보면 추측이 가능하다. 한때 당풍에 그토록 열광하던 일본의 귀족들은 9세기 중반부터 중국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며 견당사도 보내지 않는다(일본사에서는 이것을 국풍 또는 야마토풍이라 부르는데, 그것을 계기로 일본은 고유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서서 가나라는 일본 문자를 만들게 된다).

 

중국에서 배울 게 없다는 일본의 말은 물론 다분히 허풍 섞인 주장이지만 적어도 중국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인 중국에서 뭔가 변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어떤 사태일까?

 

신라의 성덕왕이 오 해피 데이!’를 외칠 무렵 당 나라도 전성기를 맞았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세력이 타도된 뒤 당나라 황실은 중종의 처가인 위씨 세력이 잠시 갖고 놀았으나 중종의 조카인 이융기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들을 축출하고 712년에 제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현종(玄宗, 재위 712~756)인데, 만년에 며느리 양귀비와 놀아난 행위로 후대에 영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지만 어쨌든 그의 치세 전반은 개원(開元, 현종의 연호)의 치라 불리는 당나라 최대의 번영기였다적법한 제위 계승자가 아니었던 탓에 현종은 처음부터 신라에 대해 까다롭게 굴었다. 이름을 가지고 트집을 부린 게 그 예다. 그의 이름은 융기(隆基)인데 공교롭게도 성덕왕의 이름과 똑같았다. 비록 성은 이씨와 김씨로 다르지만, 앞서 연개소문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황제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역사 왜곡도 서슴지 않는 당의 황실에서 그것을 가만 놔둘 리 없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보다 10년이나 앞서 즉위한 성덕왕의 이름을 고치라고 명한다. 할 수 없이 성덕왕은 멀쩡히 쓰던 자기 이름을 흥광(興光)이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다. 오늘날의 주권 국가라면 마땅히 불쾌감을 나타내야 하겠지만 당시 신라 왕실은 오히려 그것마저도 모방했다. 성덕왕의 아들 효성왕(孝成王, 재위 737~742)은 관직명에 쓰는 승()이 자신의 이름 승경(承慶)과 같다는 이유로 좌()로 고치게 했으니 말이다. 당시 장안은 동아시아 각국만이 아니라 아라비아에서 온 이슬람 상인들까지 드나드는 국제도시였으며,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대의 대도시였다.

 

 

천하를 주무른 여성 당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그의 아들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의 행차 장면이다. 그녀는 황후에 머물지 않고 최초의 여제가 되어 중국 천하를 손 안에 넣었다. 신라의 여왕들이 과도기를 잘 헤쳐나간 반면 측천무후는 당말오대의 씨를 심었으니 여왕과 여제의 차이일까?

 

 

그러나 세계제국 당은 현종의 시대에 산꼭대기에서 갑자기 절벽으로 추락하게 된다. 사실 갑자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기부터 제국의 골간이었던 균전제(均田制)가 서서히 무너져온 게 화근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제국의 몸집은 커가는데 제도의 옷은 전혀 늘리지 않은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균전제란 쉽게 말해서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나누어주고 일정량의 생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인다는 제도다(일본의 반전제도 내용은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평범해서 굳이 제도라 부를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깜찍하고 참신한 제도였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균전제도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래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토지가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이전 왕조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새로이 분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기쯤 되면 토지가 부족해진다. 인구는 늘어나고 봉급을 줘야 할 관리도 늘어난다(관리의 봉급은 물론 토지다), 결국 그 부담은 농민들에게 지워지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떠난다.

 

제국의 경제적 토대인 균전제가 흔들리자 모든 게 흔들린다. 우선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가 무너진다. 조용조 역시 균전제(均田制)와 마찬가지로 북위에서 처음 만든 제도인데, 삼국시대에 한반도에도 전해졌고 통일신라는 물론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도 기본적인 조세제도로 기능하게 되니까 여기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앞의 조()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즉 곡물이다)이고, 뒤의 조(調)는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원래는 특산물인데 일반적으로는 베를 짜서 국가에 바치는 것이었다)이며, ()은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농민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것이다. 비록 조세의 명칭은 세 가지지만 모두 농민들을 쥐어짜는 것인데,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하는 판에 이런 제도가 멀쩡할 리 없다균전제(均田制)조용조(租庸調)는 전형적인 농경문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비록 농민에 비해 숫자가 훨씬 적기는 하지만 지주도 있고 상인이나 수공업자도 있는데 조세 담당 주체는 오로지 농민으로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당은 양세법(兩稅法)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행하지만, 초기에만 잠깐 효과를 볼 뿐 곧 이것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서양의 경우는 중국처럼 정치적 통일이 견고하지 못했기에 통일적인 조세제도가 없었다. 중국에서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진 시기, 9세기 초반의 유럽에서는 세금이라는 게 없었고, 국가 재정은 귀족과 지주들의 기부금으로만 충당했다. 이후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들은 장원의 방앗간, 대장간, 부두 시설 등의 이용료를 받고 토지 생산물의 경우에도 농노들에게서 지대(地代)개념으로 세금을 거두었으므로, 정치권력의 힘으로 유지되는 동양식 왕조의 조세제도와는 성격이 달랐다.

 

말이 전성기일 뿐 실상 현종 대에는 그동안 서서히 누적되어 온 제국 체제의 모순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결국 그 모순이 고름으로 터져나오는 순간이 닥친다. 755년 번진의 절도사였던 안녹산(安祿山)과 그 부하인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그것이다. 난리 초기에 현종은 멀리 쓰촨까지 도망쳤다가 이듬해 아들에게 제위를 이양하고 장안에 돌아왔으나 유폐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신라의 경덕왕은 쓰촨으로 도망친 현종에게까지 사신을 보냈는데, 특별한 오랑캐의 지극정성에 감격한 현종은 직접 시 한 수를 지어 보내 치하했다). 안사의 난은 10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결국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당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한다. 오죽하면 후대의 역사가들이 이후의 시대를 당말오대(唐末五代, 907년 당이 멸망하고 나서 다섯 왕조가 교대로 들어서는데 이것을 오대라 부른다)라고 부를까?

 

그렇다면 신라가 혜공왕 때부터 그렇듯 갑작스럽게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유는 분명해진다. 혜공왕 대에 귀족들의 반란이 갑자기 잦아진 이유는 모국이라 할 중국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신라의 토지제도는 당의 균전제(均田制)를 모방한 것이었기에 신라 사회 역시 당과 똑같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제 중심은 없다. 일본은 아예 당에게서 등을 돌렸고 신라는 더 이상 사대하고 모방할 대상이 사라졌다. 질서의 축이 무너진 동아시아는 서서히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흔들리는 중심

두 명의 신라인

북방의 새로운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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