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
사실 원성왕(元聖王)이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는 핸디캡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인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상대등이었던 그는 다른 대권 후보였던 왕손 김주원(金周元, 김춘추의 6세손)을 누르고 즉위했던 것이다【이 문제는 한참 뒤인 822년에 반란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아버지가 즉위하지 못한 원한을 40년이나 잊지 않고 있다가 웅천주 도독으로 부임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의 전북과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장안국이라는 국호와 경운이라는 연호까지 제정하면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경주 귀족들에게 진압되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김헌창이 잠시나마 별도의 나라까지 세운 것은 당시 중국으로부터 불어온 혼돈의 바람에 힘입은 것이다】. 비록 군신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취했으므로 유혈 쿠데타는 아니었지만, 적법한 계승자가 아닌 것은 명백하다. 그런 만큼 기존 귀족들의 눈초리가 따가웠을 테니 원성왕으로서는 귀족 세력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변형된 형태로나마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실은 수 문제가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한다는 것은 곧 국왕이 마음대로 정치를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이니까. 하기야, 이런 점에서는 오늘날의 국가고시도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최고 권좌에 오른다면 현대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절차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 라는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의 타이틀을 연속 방어한 박정희와 그 뒤를 이은 전두환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처음부터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으니 권력 승계의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이 점에선 8세기 신라의 원성왕도 다르지 않다. 그는 선덕왕의 즉위 전에 둘이 함께 또 다른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상대등에 오른 신군부 세력의 한 보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국왕이 쿠데타를 벌였다면 뭔가 사연이 있다는 이야기다. 과연 여기에는, 작게는 신라 왕실이 흔들리고 크게는 동아시아의 중심이 흔들리게 된 사연이 있다.
때는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65년에 죽은 경덕왕(景德王)은 신라 역사에서 성덕왕에 이어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재위 기간 내내 행복을 누린 임금이었다. 따라서 신라 왕들의 운명으로 보면 이제부터 행복 끝, 불행 시작이다. 8세에 왕위를 이은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惠恭王, 재위 758~780)은 즉위 초부터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인기를 잃었다. 그게 어린아이의 탓일 리는 없지만 문제는 귀족들이 그것을 기회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우선 768년에 일길찬(一吉飡)이었던 대공(大恭)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곧 진압되었지만 삼국통일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반란이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아니나 다를까, 2년 뒤에는 이찬 김융(金融)이 ‘금융’ 대란이 아닌 반란을 일으켰고 다시 5년 뒤에는 시중 김은거(金隱居)가 ‘은거’는커녕 모반을 했다.
시중이라면 국무총리 격인데 그런 자가 반란을 주동하다니! 아무래도 중국식 관직명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 혜공왕의 측근들은 이듬해인 776년에 관직명을 도로 신라식으로 바꾼다(사실 경덕왕이 중국식으로 바꾼 데는 왕권 강화의 목적이 있었으니 귀족들은 불만이었을 게다). 그러나 780년에 다시 일어난 반란으로 결국 혜공왕은 한창 나이인 23세에 아내와 함께 살해당한다. 이 반란을 진압한 일등공신이 당시 상대등이던 김양상(金良相)과 김경신(金敬信)인데, 김양상은 선덕왕(宣德王)이 되었고 김경신은 상대등을 물려받았다가 나중에 원성왕(元聖王)이 된 것이다(경덕왕의 중국화 작업으로 시중에 눌렸던 상대등은 권력이 잠시 약화됐다가 이를 계기로 다시 2인자의 지위에 올랐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에 36대 왕인 혜공왕을 끝으로 신라의 중대(태종무열왕 - 혜공왕)가 끝나고 하대의 쇠퇴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했는데, 실상 신라의 하대는 쇠퇴기 정도가 아니라 혼란기라고 해야 한다. 그런 현실을 말해주는 한 가지 예가 왕위계승의 불안정이다. 혜공왕 이후 신라가 멸망하는 935년까지 약 150년 동안 신라의 왕들은 무려 20명이 등장한다. 그 전까지의 전체 신라 역사 840년 동안 36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인플레이며, 따라서 평균 재위 기간도 예전의 1/3이 채 못 된다(게다가 그 중 네 명은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 중대의 시조 통일신라기의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한 원성왕릉이다. 12지신상을 비롯한 여러 석상까지 거느려 격식을 잘 갖춘 왕릉인데, 그도 그럴 것이 원성왕은 신라 중대 약 80년에 걸쳐 지속되는 새로운 왕계를 확립했으므로 말하자면 ‘중대의 시조’인 셈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끝으로 신라의 번영과 안정은 끝난다. 그 이유는 원성왕(元聖王)의 무덤을 잘못 쓴 탓이 아니라 모국인 당나라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바로 한 세대 전만 해도 최전성기를 구가하다가 갑작스럽게 혼탁해진 이유는 뭘까? 아무리 어린 왕이 즉위했다 해도 그것만으로 시대의 흐름이 갑자기 바뀐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더구나 시대의 흐름이 급박해진 것은 신라만이 아니다. 중국을 모방하는 데 신라와 함께 누가누가 잘하나를 벌이던 일본도 8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런 탓인지 경덕왕은 전 왕인 성덕왕과 달리 일본과의 교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일본의 사정으로 눈을 돌려보면, 당시 동아시아를 휩쓴 혼란의 파도를 좀더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혼란의 신호탄은 최첨단 수입품인 율령이 유명무실화된 것이다. 원래 율령은 관료제의 바탕 위에서만 기능하게 마련이다. 율령이란 지금으로 치면 헌법에 해당하는데, 법이 있어도 집행할 관리들이 없으면 말짱 헛것이다. 관료제 수준이 보잘것없다는 점에서는 신라나 일본이나 오십보백보, 따라서 비록 독자적 율령을 만들었다 해도 일본은 아직 율령제 국가가 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국가의 골간인 율령이 기능하지 못하자 다른 제도들도 우르르 무너진다. 중국의 균전제(均田制)를 본따 만든 반전제(班田制)가 붕괴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토지 사유화에 나서 장원제가 발달한다. 급기야 780년에 징병제가 사라지자 귀족들은 또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사병양성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9세기에 이르면 일본은 각지에서 장원의 영주로 탈바꿈한 귀족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서로 박터지게 싸우는 치열한 내전시대로 돌입한다(10세기를 넘어서면 그 사무라이들이 독자적
세력화를 이루며, 더 나중에는 바쿠후幕府라는 일본 특유의 무인권력체를 형성한다).
이렇듯 신라와 일본이 같은 시기에 급속도로 체제 붕괴를 맞게 된 이유는 뭘까? 당시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한 가지 변화에 주목해보면 추측이 가능하다. 한때 당풍에 그토록 열광하던 일본의 귀족들은 9세기 중반부터 중국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며 견당사도 보내지 않는다(일본사에서는 이것을 국풍 또는 야마토풍이라 부르는데, 그것을 계기로 일본은 고유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서서 가나라는 일본 문자를 만들게 된다).
중국에서 배울 게 없다는 일본의 말은 물론 다분히 허풍 섞인 주장이지만 적어도 중국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인 중국에서 뭔가 변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어떤 사태일까?
신라의 성덕왕이 ‘오 해피 데이!’를 외칠 무렵 당 나라도 전성기를 맞았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세력이 타도된 뒤 당나라 황실은 중종의 처가인 위씨 세력이 잠시 갖고 놀았으나 중종의 조카인 이융기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들을 축출하고 712년에 제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현종(玄宗, 재위 712~756)인데, 만년에 며느리 양귀비와 놀아난 행위로 후대에 영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지만 어쨌든 그의 치세 전반은 개원(開元, 현종의 연호)의 치‘라 불리는 당나라 최대의 번영기였다【적법한 제위 계승자가 아니었던 탓에 현종은 처음부터 신라에 대해 까다롭게 굴었다. 이름을 가지고 트집을 부린 게 그 예다. 그의 이름은 융기(隆基)인데 공교롭게도 성덕왕의 이름과 똑같았다. 비록 성은 이씨와 김씨로 다르지만, 앞서 연개소문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황제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역사 왜곡도 서슴지 않는 당의 황실에서 그것을 가만 놔둘 리 없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보다 10년이나 앞서 즉위한 성덕왕의 이름을 고치라고 명한다. 할 수 없이 성덕왕은 멀쩡히 쓰던 자기 이름을 흥광(興光)이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다. 오늘날의 주권 국가라면 마땅히 불쾌감을 나타내야 하겠지만 당시 신라 왕실은 오히려 그것마저도 모방했다. 성덕왕의 아들 효성왕(孝成王, 재위 737~742)은 관직명에 쓰는 승(丞)이 자신의 이름 승경(承慶)과 같다는 이유로 좌(佐)로 고치게 했으니 말이다】. 당시 장안은 동아시아 각국만이 아니라 아라비아에서 온 이슬람 상인들까지 드나드는 국제도시였으며,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대의 대도시였다.
▲ 천하를 주무른 여성 당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그의 아들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의 행차 장면이다. 그녀는 황후에 머물지 않고 최초의 여제가 되어 중국 천하를 손 안에 넣었다. 신라의 여왕들이 과도기를 잘 헤쳐나간 반면 측천무후는 당말오대의 씨를 심었으니 여왕과 여제의 차이일까?
그러나 세계제국 당은 현종의 시대에 산꼭대기에서 갑자기 절벽으로 추락하게 된다. 사실 갑자기‘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기부터 제국의 골간이었던 균전제(均田制)가 서서히 무너져온 게 화근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제국의 몸집은 커가는데 제도의 옷은 전혀 늘리지 않은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균전제란 쉽게 말해서 토지[田]를 농민들에게 고르게[均] 나누어주고 일정량의 생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인다는 제도다(일본의 반전제도 내용은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평범해서 굳이 제도라 부를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깜찍하고 참신한 제도였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균전제도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래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토지가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이전 왕조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새로이 분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기쯤 되면 토지가 부족해진다. 인구는 늘어나고 봉급을 줘야 할 관리도 늘어난다(관리의 봉급은 물론 토지다), 결국 그 부담은 농민들에게 지워지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떠난다.
제국의 경제적 토대인 균전제가 흔들리자 모든 게 흔들린다. 우선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가 무너진다. 조용조 역시 균전제(均田制)와 마찬가지로 북위에서 처음 만든 제도인데, 삼국시대에 한반도에도 전해졌고 통일신라는 물론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도 기본적인 조세제도로 기능하게 되니까 여기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앞의 조(租)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즉 곡물이다)이고, 뒤의 조(調)는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원래는 특산물인데 일반적으로는 베를 짜서 국가에 바치는 것이었다)이며, 용(庸)은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농민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것이다. 비록 조세의 명칭은 세 가지지만 모두 농민들을 쥐어짜는 것인데,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하는 판에 이런 제도가 멀쩡할 리 없다【균전제(均田制)와 조용조(租庸調)는 전형적인 농경문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비록 농민에 비해 숫자가 훨씬 적기는 하지만 지주도 있고 상인이나 수공업자도 있는데 조세 담당 주체는 오로지 농민으로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당은 양세법(兩稅法)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행하지만, 초기에만 잠깐 효과를 볼 뿐 곧 이것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서양의 경우는 중국처럼 정치적 통일이 견고하지 못했기에 통일적인 조세제도가 없었다. 중국에서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진 시기, 즉 9세기 초반의 유럽에서는 세금이라는 게 없었고, 국가 재정은 귀족과 지주들의 기부금으로만 충당했다. 이후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들은 장원의 방앗간, 대장간, 부두 시설 등의 이용료를 받고 토지 생산물의 경우에도 농노들에게서 지대(地代)의 개념으로 세금을 거두었으므로, 정치권력의 힘으로 유지되는 동양식 왕조의 조세제도와는 성격이 달랐다】.
말이 전성기일 뿐 실상 현종 대에는 그동안 서서히 누적되어 온 제국 체제의 모순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결국 그 모순이 고름으로 터져나오는 순간이 닥친다. 755년 번진의 절도사였던 안녹산(安祿山)과 그 부하인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그것이다. 난리 초기에 현종은 멀리 쓰촨까지 도망쳤다가 이듬해 아들에게 제위를 이양하고 장안에 돌아왔으나 유폐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신라의 경덕왕은 쓰촨으로 도망친 현종에게까지 사신을 보냈는데, 이 ‘특별한 오랑캐’의 지극정성에 감격한 현종은 직접 시 한 수를 지어 보내 치하했다). 안사의 난은 10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결국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당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한다. 오죽하면 후대의 역사가들이 이후의 시대를 당말오대(唐末五代, 907년 당이 멸망하고 나서 다섯 왕조가 교대로 들어서는데 이것을 오대라 부른다)라고 부를까?
그렇다면 신라가 혜공왕 때부터 그렇듯 갑작스럽게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유는 분명해진다. 혜공왕 대에 귀족들의 반란이 갑자기 잦아진 이유는 모국이라 할 중국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신라의 토지제도는 당의 균전제(均田制)를 모방한 것이었기에 신라 사회 역시 당과 똑같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제 중심은 없다. 일본은 아예 당에게서 등을 돌렸고 신라는 더 이상 사대하고 모방할 대상이 사라졌다. 질서의 축이 무너진 동아시아는 서서히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두 명의 신라인
원래부터 경주 부근에만 중앙정부의 힘이 미칠 만큼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데다, 마땅히 등대가 되어줘야 할 중국이 당말오대에 접어들면서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취약한 신라 호가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은 뻔하다. 중앙이 약해지면 지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거의 물리적 법칙이다. 앞서 말한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은 이런 배경에서 터져나왔다. 물론 김헌창 개인으로서는 아버지(김주원)가 원성왕(元聖王)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따라서 자신도 왕위계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원한에 사무칠 수 있었겠지만, 이미 40년이나 지난 일인 데다 원성왕의 증손인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이 재위하는 중에 새삼스럽게 해묵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어지러운 정세를 이용해서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이제 지방 호족들이 스스럼없이 왕권을 넘볼 만큼 권력구조가 취약해졌다는 이야기다. 침몰해가는 신라 호, 그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승객이 있다. 후대에까지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장보고(張保皐, ?~846)와 최치원(崔致遠, 857~?)이 그들이다. 그들을 프리즘으로 삼아 9세기 신라의 스펙트럼을 한번 보자.
어린 시절이었는지, 젊은 시절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라고도 하는데 이두 이름이니까 같은 발음이었을 것이다)이라는 신라인은 일찍부터 중국에 건너가 당의 지방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장보고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바꾼 것을 보면 아마 그에게는 당시 세계의 중심인 중국에서 출세해 보겠다는 야심이 있었을 터, 그러나 그는 해적(왜구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들이 한반도의 해안지방에서 잡아 당나라에 팔아넘긴 신라인들에게 부당한 대우가 가해지는 것을 보고 분개한다. 그래서 해적들을 소탕하겠다는 각오로 그는 828년에 신라로 귀국해서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에게 군대 모집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내가 할 일을 대신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으니 흥덕왕은 당연히 대환영이다. 물론 충정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신라의 중앙권력이 힘을 잃은 게 아니라면 그렇듯 민간인이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을까? 또 장보고가 그런 제안을 했다고 해서 신라 정부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어쨌든 장보고는 군사적 재능만이 아니라 무역과 외교적 감각에도 두루 능한 탁월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군사 1만과 청해진 대사라는 벼슬을 얻어 완도(‘청해’는 완도의 옛 이름이다)에 진지를 차린 그는 흥덕왕과 약속한 대로 해적들을 소탕한다. 게다가 그는 해적들에게 장악되었던 동아시아 무역로를 복구하는 것은 물론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독점하게 된다【장보고는 당에 견당매물사와 교관선을 보내 당과 신라의 수출입을 독점했으며, 중국에 있는 신라인들을 조직해서 무역로를 더욱 넓히기도 했다. 특히 그는 산둥에 유학 승려들을 위한 절을 세우는 등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실은 장보고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것도 그 덕분이다. 천태종의 고승으로 이름이 높은 일본의 승려 엔닌(円仁)은 당에 유학갔다가 돌아올 때 배편을 장보고에게 부탁했으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자신의 책에 장보고의 이름과 그에게서 받은 깊은 인상을 기록했다】. 순식간에 막대한 부를 쌓고 국제적 거물로 발돋움했으니 그에게 정치적 야망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 청해진 원래 무역기지로 설치되었으나 장보고는 이곳을 ‘본부’로 삼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당시에는 목책까지 둘러 성곽처럼 꾸몄다.
836년에 스폰서였던 흥덕왕이 죽은 것은 그에게 좋은 기회다. 흥덕왕은 즉위 초에 왕비가 죽고 나서 시녀조차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평생 수절(?)한 왕이었으니 후사가 있을 리 없다. 왕위계승을 놓고 흥덕왕의 동생과 조카가 다툼을 벌이자 여기에 귀족들이 편을 갈라 합세했다. 여기서 삼촌 김균정(金均貞)은 일찍이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었으나 결국 조카인 김제륭(金悌隆)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김제륭이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으로 즉위하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권력을 추구하기 이전에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식솔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낙동강을 빠져나가 완도에 있는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당시 신라 중앙정치의 혼탁한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데, 더 큰 혼란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던가? 쿠데타로 집권한 희강왕은 재위 3년 만에 옛 동지였던 김명(金明)의 쿠데타로 궁중에서 자살하고 김명이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으로 즉위하는데, 그렇잖아도 경주를 노리던 장보고에게 그것은 거병의 명분이 되었다. 그는 즉각 군사 5천을 경주로 보내 민애왕을 살해하고, 보관하고 있던 김우징 카드를 뽑아든다. 비록 장보고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김우징은 839년에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년 4~7월)이 되어 아버지의 한을 풀었다. 문제는 석달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건데, 그래도 그는 나름대로 꼭두각시의 소임은 다했다【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에서부터 45대 신무왕까지 여섯 명의 왕은 모두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이다. 비록 그 중세 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는 했지만, 800년에서 839년까지 40년 동안 신라 왕위는 친형제 셋을 포함해서 형제들끼리 주고받은 셈이다. 만약 당의 제국정부가 예전처럼 굳건했더라면 그렇듯 신라의 왕위계승이 어지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쿠데타로 집권한 신라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문책을 가했을 테니까. 그러나 당시 당의 황실은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으므로 변방의 사정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같은 기간에 당의 황제는 무려 다섯 명이 즉위했고, 그 중에서 두 명이 암살당했으니 결코 신라 왕실보다 나은 사정이 아니었다】.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라는 벼슬을 내려 보답한 데다 자신의 아들이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으로 즉위하게 했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문성왕에게서 청해장군이라는 직함을 받은 것에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에 이르기까지 그는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었다. 심지어 840년에 그는 일본에 무역을 요청하는 특파원까지 마음대로 보낼 정도였으니 사실상 신라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진 자의 욕심이란 원래 끝이 없게 마련이 아니던가? 비록 자신이 직접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킹메이커의 자리만큼은 계속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책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딸을 왕비로 만들면 되니까. 근친혼이 행해지던 왕실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그에 따르면 신라 왕비는 무조건 김씨나 박씨여야 한다) 장보고는 딸을 둘째 왕후로 집어넣으려 한다. 예상했듯이 문성왕은 장보고의 절대적 지원으로 팔자에 없던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싫든 좋든 반대할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미 신라의 왕권이 실추될 대로 실추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고, 왕 대신 실권을 쥔 경주 귀족들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거센 반대로 결국 장보고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지만, 거기서 멈출 거였다면 아예 걸음을 떼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연 이듬해에 그는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다. 그가 킹메이커일 뿐만 아니라 ‘킹킬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문성왕과 경주 귀족들은 이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공포에 휩싸인 그들에게 구원의 검은 손길이 다가온다. 일찍이 김우징의 쿠데타에서 공을 세웠던 염장(閻長)이라는 자가 단신으로 장보고를 암살하겠노라고 장담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인 문성왕은 반신반의했지만 알고 보니 그 지푸라기는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염장은 문성왕을 배반한 것처럼 가장하고 장보고에게 접근해서는 환영석상에서 그를 찔러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장보고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던 청해진은 한때 동아시아 해상을 지배했던 근거지답지 않게 일순간에 몰락한다.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신라의 왕권마저 넘볼 수 있었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당나라가 더 이상 동아시아 질서의 축으로 역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렸다. 변방의 번진들은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었고, 중앙의 황실은 환관들이 쥐고 흔드는 판이다(안사의 난 이후 황실에서는 감군사를 보내 번진을 감독하게 했는데, 그 임무를 맡은 게 바로 환관들이었다). 오죽하면 이 무렵의 황제들을 따로 부르는 이름까지 생겼을까? 9세기 초반의 덕종부터 당나라가 문을 닫는 907년까지 100년 동안 11명의 황제들 중 한 명만 제외하고는 모두 환관들이 옹립했는데, 환관의 테스트를 거쳐 제위에 올랐다 해서 이 황제들은 ‘문생천자(門生天子)’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으로 불린다.
결국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당나라의 명맥을 죄는 사태가 터졌다. 875년 소금 밀매업자였던 황소(黃巢)가 일으킨 반란이 그것이다. 산둥에서 봉기한 그들은 소금 밀매 유통망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전국으로 세력을 확대했으며, 880년에는 수도인 장안까지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당의 관리로 있던 어느 신라인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문장을 지어 황소에게 보냈는데, 워낙 명문이었던 탓에 그것을 읽은 황소가 깜짝 놀라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바로 최치원(崔致遠)이다.
최치원이 당에 유학을 떠난 것은 열두 살 때니까 아마 장보고보다도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최씨라면 왕족은 못 되지만 신라 초기 6성 가운데 하나다. 성씨로 짐작할 수 있듯이 최치원은 신라의 두품 가운데 최고인 6두품 출신이었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진골이 정치와 행정을 독점한 세태에 한껏 불만을 품은 지식인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최치원(崔致遠)은 교육열에 불타는 아버지의 바짓바람에 힘입어 869년에 멀고 먼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신라의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은 어려서부터 지혜와 총기를 자랑하던 인물로서 학문을 권장하는 데 힘썼으니 최치원이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데는 아마 그런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왕의 모자를 만드는 사람이 경문왕의 큰 귀를 보고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다가 죽기 직전에 대나무 숲에서 마음껏 외쳐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왕들과 달리 그에 관해 이런 설화가 전해지는 이유는 그가 특이한 과정으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아들이 없었던 헌안왕(憲安王, 재위 957~961)의 눈에 들어 맏사위가 되었다가 장인의 왕위를 이었다. 사위 계승은 신라 초기에는 흔했지만 중기 이후에는 그가 유일했으니 아무래도 이야깃감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헌안왕이 사위로 대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장차 또 한 명의 여왕인 진성여왕이 즉위할 때 다시금 문젯거리가 된다】.
장보고가 군사, 경제, 외교 등 사회과학의 천재라면 최치원은 역사와 문장 등 인문학의 천재였다. 그는 유학 생활 5년 만에 거뜬히 당의 과거에 합격했고 2년 뒤에는 관직까지 따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종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를 침대에서 떨어뜨리고 당의 황실을 감격케 한다. 이렇게 ‘대단한 신라인’으로 대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어떤 계기에선지 885년 한창 일할 나이인 스물여덟 살에 신라로 귀국한다. 좋게 보면 선진 세계에서 갈고 닦은 경륜으로 고향을 위해 일해보겠다는 뜻일 테고, 나쁘게 보면 아무리 대국이라 해도 지방 군수 정도의 직위에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날 미국 유학을 갔다 와서 쉽게 교수직을 얻은 얼치기 교수보다는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에 가까웠을 것이다.
일단은 금의환향이다. 그러나 박동혁이 그랬듯이 청운의 뜻을 품은 최치원(崔致遠)도 현지 방해꾼들의 시기와 농간에 견디지 못한다. 신라의 중앙 정치는 그의 아버지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경주 귀족들은 그를 어디서 날아온 낙하산처럼 여긴다. 좌절한 그는 중앙 정치를 포기하고 지방 군수직을 맡겠다고 자청하는데, 이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다. 몇 년 동안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닭이나 잡던 그는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에게 시국 해결책인 시무 10여조를 제출해서 6두품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인 아찬에 임명된다. 중앙 정치로의 성공적 복귀일까? 그러나 아니었다. 오히려 경주 귀족들의 한층 날이 선 시선에 못 이겨 그는 아예 정계에서 은퇴해 버린다.
최치원이 느낀 좌절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신분의 한계다. 6두품으로서는 중대 이래 진골들이 독점해 온 중앙 정치 무대에서 뜻을 펼 수 없었다. 둘째는 신라의 지적 수준의 한계다. 그가 배운 학문은 당시 첨단 학문이었던 유학이었다. 알다시피 유학은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이었으니, 불교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전통적인 귀족제 사회의 틀을 벗지 못한 신라에서 그게 통할 리 없다. 오히려 그는 유학이 성행하는 고려시대에 고인에게 주는 벼슬을 받았고 조선시대의 서원들에 이름을 남겨 시대를 앞서간 인물의 자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최치원(崔致遠)이 신라의 중앙 정치를 개혁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오히려 그의 이름은 후대에 길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유학만이 아니라 불교, 도교, 그리고 고유의 풍수지리 사상에도 두루 능한 만물박사였던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집필에 몰두해서 역사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과 불교 서적, 각종 비문 등을 남겼다. 그러나 정작으로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아쉽게도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저작이 아니라 당나라에 있을 때 써둔 시문들을 모은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뿐이다(그래도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유학을 다룬 문헌 중 가장 오래 된 문헌이다).
▲ 사관과 신사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를 앓는다는 것은 오늘의 현상만이 아니다. 중국이 비틀거리자 신라는 아예 주저앉았다. 이 시대에 걷고 뛰었던 두 명의 신라인이 있었는데, 바로 장보고(위쪽)와 최치원(崔致遠, 아래쪽)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당의 지방정권, 대내적으로는 경주 정권에 불과했던 신라 왕조는 이미 이들의 포부를 끌어안을 여유와 능력이 없었다.
북방의 새로운 기운
구심력이 약해지면 원심력이 작용하는 게 이치다. 소용돌이의 동아시아에도 중심인 남과 변방인 북의 분위기는 달랐다. 당나라가 기침하고 신라가 몸살을 앓으며 동아시아 남쪽의 중화세계가 무너져갈 때 비중화세계인 북쪽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중국의 통일제국이 약화되면 항상 장성 이북의 이민족들이 흥기했던 것은 이제 동아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이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의 주고받음이라면 그 신호탄은 두 문명의 중간, 즉 반농반목 문명이라 할 수 있는 발해다.
남쪽의 신라에서 장보고의 야망과 최치원(崔致遠)의 개혁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무렵 발해는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다. 8세기까지 아홉 명의 왕을 왕명부에 올린 것 말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던 발해는 9세기 초 선왕(宣王, 재위 818~830) 대에 이르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우선 영토 확장이 눈부시다. 선왕은 멀리 북쪽의 헤이룽강까지 강역을 크게 넓혀 만주 전역을 손에 넣었으며, 말갈족 중에서 유일하게 발해를 적대시하던 흑수말갈을 복속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그때부터 흑수말갈은 당에 보내는 조공을 끊었는데, 당말오대에 접어든 당보다는 가까이 있는 발해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나와 있는 이른바 5경 15부 62주라는 발해의 강역은 바로 이 무렵에 형성되었으며, 『신당서』에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등재된 것도 이 시기의 발해를 가리킨다【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선왕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당의 국력이 약해졌다는 배경 덕택이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 그러니까 8세기 초반만 해도 발해는 헤이룽강 하구의 흑수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당나라와 싸우다가 실패한 바 있었다. 726년 무왕의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흑수말갈을 공력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발해는 그의 송환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일이 있고, 6년 뒤에는 거란의 제의로 발해의 장군 장문휴(張文休)가 산둥을 공략했다가 물러난 적이 있었다(당시 신라는 당 현종의 명령으로 발해의 남부를 공격하러 나섰다가 폭설 때문에 퇴각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은 신라 군대를 징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발해는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다가 당나라가 힘을 잃는 것을 기회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선왕 이후 발해의 역사는 중국 측 사서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것 이외에 상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왕계조차 불확실하지만 대체로 전성기의 강역을 유지하면서 만주의 패자로 군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적어도 한반도의 신라에게 최악의 시기였던 9세기 동안 발해는 별다른 위기를 맞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부터 그랬듯 이 발해는 전성기 때조차도 랴오둥을 노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발해의 운명을 위해서는 커다란 판단 미스였을 뿐 아니라 당말오대에 북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분위기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설사 힘이 모자란다 해도 당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해는 어떻게든 랴오둥에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만주를 근거지로 삼는 왕조로서 랴오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것은 일찍이 고구려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분명한 사실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만주에 안주한 것은 곧 북방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를 대신해서 세대교체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한 것은 거란이었다. 몽골 초원의 동부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던 거란은 당의 약화를 틈타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남북조시대에 북조를 지배했던 옛 선비족의 후예, 당시에는 북중국을 차지한 대신 랴오둥을 고구려에게 넘겨주었지만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 노릇을 포기한 이상 랴오둥의 임자는 그들이 될 수밖에 없다. 황소의 난을 진압한 절도사 주전충(朱全忠, 852~912)이 장안의 황궁으로 들어가 환관들을 잡아죽이고 당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애제(哀帝)’라면 ‘슬픈 황제’라는 뜻이니까 황제의 시호로는 영 이상하게 보이는데, 시호 자체가 죽은 뒤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중국 역사에서 비운에 죽었거나 한 왕조의 마지막이 된 황제는 대개 애제 또는 공제(恭帝)라고 부른다. 재위 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살해당한 신라의 혜공왕, 애장왕, 민애왕 등의 시호에 ‘공(恭)’이나 ‘애(哀)’가 들어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에게서 황위를 이양받은 907년, 거란의 지도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드디어 랴오둥의 나라 요(遼)를 건국한다(랴오둥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요동遼東이 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국호는 그랬어도 야율아보기는 랴오둥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916년 그는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당당한 제국으로 발돋움한 요나라의 태조가 된 뒤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원을 노린다. 그렇다면 맨먼저 할 일은 후방 다지기다. 랴오둥의 후방이라면 바로 발해가 아닌가? 과연 925년 12월 말에 야율아보기는 발해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에 나섰다. 불과 보름 만인 926년 1월 14일에 거란군은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장악했고, 이것으로 227년 동안 우리 역사의 일부분을 담당했던 발해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다(당시 거란은 발해가 방심한 틈을 타서 싸우지 않고도 이겼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로 미루어 아마 심각한 내부 권력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성기 발해에 눌려 북방의 군소 민족으로 남아 있었던 거란, 그러나 현실에 만족한 토끼는 잠만 자고 있었고 거북은 꾸준히 발을 놀려 마침내 토끼를 따라잡았다. 이후 요나라가 우리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고려 초기인데, 나중에 보겠지만 그때도 역시 고려는 후방 다지기 작업에 들어간 요나라에게 호되게 시달린다.
▲ 움츠림의 결과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터다. 발해는 당말오대라는 천금의 기회를 잘 이용해서 북방의 패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랴오둥을 끝내 포기하고 동만주에만 안주한 나머지 랴오둥에서 일어난 거란에게 결국 멸망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밖으로 뻗어나가야 할 때 안으로 움츠린 결과 발해는 개국 초부터 거창하게 내세운 구호와는 달리 끝내 고구려의 후예가 되지 못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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