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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작은 천하와 작은 제국: 쇄국을 통한 안정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작은 천하와 작은 제국: 쇄국을 통한 안정

건방진방랑자 2021. 6. 9.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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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쇄국을 통한 안정

 

제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내부가 안정되자 일본의 시선은 다시 밖으로 향했다. 중국이 수비형 제국이라면, 히데요시의 야망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기회만 닿으면 밖으로 눈을 돌리는 공격형 제국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히데요시와 같은 침략이 아니라 경제적 해외 진출이었다. 어느 바쿠후보다도 경제에 관심이 많았던 에도 바쿠후는 노부나가 시절부터 맛들이기 시작한 해외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무역은 상인들이 하는 일이지만 바쿠후가 앞장서는 무역이니 당연히 바쿠후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사무역을 금지하고 모든 무역은 바쿠후의 허가를 받도록 하면 된다. 마침 명의 감합 무역이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되었다. 에도 바쿠후는 바쿠후의 면허장을 받은 선박에게만 해외 무역을 허가하는데, 명의 감합에 해당하는 이 면허장을 슈인(朱印, 붉은 도장)이라고 불렀다.

 

17세기 초반 슈인센(朱印船)들은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폭넓게 무역을 전개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명과의 공식적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원래 명에서는 사무역이 널리 성행했으므로 중국 무역선도 자주 일본의 항구를 찾았다다만 조선의 경우에는 쓰시마의 도주(島主)가 사적으로 무역선을 부산에 보냈을 뿐, 조선의 상선이 일본에 오는 일은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을 사대로 받들고 여진과 일본을 교린으로 무마한다는 이른바 사 대교린 무역이 행해졌는데, 사실상 일본이 통일하면서부터는 일본과의 관계도 교린이 아니었다. 그나마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이 명에서 오랑캐의 청으로 바뀌는 등 동북아시아 정세가 급변하자 사대교린의 근거는 완전히 무너졌다.

 

무역의 내용을 보면 일본은 주로 중국산 생사(生絲)와 견직물, 동남아시아의 짐승 가죽과 향료, , 금 등을 수입했고, 수출품은 은이었다. 이재에 밝은 바쿠후는 외국 상선이 항구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물품을 구입하고 나머지를 일반 상인들에게 넘겼으며, 때로는 매점매석도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국내 생사의 가격이 오르면 보유하고 있던 생사를 풀어 큰 차액을 남기는 식이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정치권력을 이용한 전형적인 부정 축재였다.

 

바쿠후가 주도하는 것이라 해도 해외 무역이 계속 활성화되었더라면 일본은 실제 역사보다 200여 년 앞서 자력으로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민간의 사무역은 금지되었지만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의 동남아시아 진출도 크게 늘었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만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의 섬들, 그리고 월남과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 일대에는 많은 일본인 자치 구역이 형성되었다.

 

심지어 바쿠후의 명으로 일본의 상선은 유럽의 에스파냐와 이탈리아까지 갔으며, 1613년에는 태평양을 횡단해 지구 반대편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상륙하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대항해시대 1세대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쇠락하고 2세대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바통을 이어받았는데, 바깥 세계를 향한 일본의 진취적 기상이 유지되었더라면 일본은 어쩌면 영국과 어깨를 견줄 만한 해양 국가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감합을 모방한 붉은 도장 에도 바쿠후는 명의 감합 무역을 모방해 슈인센 무역 방식을 채택했다. 바쿠후의 붉은 도장(슈인)을 받은 선박에만 무역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 무역을 통해 바쿠후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그런데 바쿠후는 황금 알을 낳아주던 해외 무역을 스스로의 손으로 금지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교 때문이었다. 해외 무역이 활발하던 17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에 오는 서양인들은 바쿠후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에 표류한 네덜란드의 선원들을 고문으로 삼았으며, 유럽 상선들의 입항을 허락하고 항구에 통상처까지 마련해주었다. 시기를 놓고 본다면 일본은 오히려 가까운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유럽과 먼저 거래를 튼 셈이다.

 

서양인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자연히 서양의 문물도 함께 들어왔다. 서양의 그리스도교는 이미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일본에 들어와 민간에 퍼졌다. 중국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세력이 크게 위축된 구교의 선교사들은 먼 동방에서 활로를 찾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할 무렵에는 이미 상당수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는 히데요시가 그리스도교를 반가워할 리 없었다. 그는 일본은 신국(神國)이므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라면서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금지하고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가 그것과 별도로 서양과의 무역을 계속 장려했으므로 선교사들은 비공식적으로 포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가 보여주듯이 박해가 심할수록, 순교자가 대량으로 나올수록 더욱 널리 퍼지는 그리스도교의 생리는 일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물론 다이묘나 무사들에게서도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생겨나고 늘어났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해외 무역의 활성화였다.

 

처음에는 무역의 매력에 이끌려 그리스도교를 관대하게 봐주던 이에야스는 측근 중에도 그리스도교 신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위험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죽기 3년 전인 1613년에 재차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내렸는데, 그의 사후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는 외국인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일본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에게까지도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다.

 

신도들이 박해를 피해 종교를 부정하자 진짜 신도를 가려내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되었다. 백성들에게 예수와 마리아의 그림을 밟게 한 것이다. 진정한 신도라면 차마 밟지 못할 터였다. 후미에(踏繪, 그림을 밟는다는 뜻)라고 불린 이 지극히 일본다운방법은 과연 효과가 입증되어 나가사키에서 금세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639년부터 바쿠후는 쇄국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고 모든 서양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심지어 해외에 오랫동안 거주한 일본인마저 그리스도교 신도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귀국이 금지되었다. 한 가지 예외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만은 제한적으로나마 무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에야스 시절부터 생긴 네덜란드와의 각별한 친교 때문인데,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일본에는 특별히 네덜란드와 관련된 근대의 유적들이 많이 있다18세기 초반부터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군사학, 세계의 지리와 역사를 연구하려는 학문이 크게 성행했는데, 이것을 란가쿠(蘭學: 네덜란드는 한자로 和蘭이라고 표기했다)라고 불렀다. 바쿠후는 네덜란드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으며, 네덜란드 역시 그 호의에 충실히 부응했다. 1844년에 네덜란드 국왕은 일본의 쇼군에게 친서를 보내 세계정세의 변화를 설명하고 개국을 충고한 일이 있었다. 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1853년 무렵에 네덜란드는 몇 년 전부터 미국이 곧 일본에 함대를 보내 통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정보를 여러 차례 전해주었다.

 

센고쿠 시대를 끝으로 일본은 다시 전란으로 얼룩지는 사태 없이 300년에 가까운 번영과 평화의 시대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에 일본은 쇄국으로 일관했다. 묘한 것은 그 쇄국의 앞과 뒤가 대외 침략이라는 점이다. 에도 시대처럼 공식적인 쇄국은 아니지만 일본은 중국과의 교류를 끊은 8세기 이후 전국을 통일한 16세기까지도 대외적으로는 쇄국기였다. 첫 번째 쇄국이 끝난 뒤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고, 두 번째 쇄국이 끝난 뒤에도 다시 조선을 노렸다. 그렇다면 일본 역사에서 쇄국은 곧 대외 침략을 위한 웅크림이었던 것일까?

 

 

일본 최초의 서양인 일본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서양인은 1543년의 포르투갈인이었다. 일본에 온 서양인들은 단지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들에게 호기심을 보인 것은 오히려 일본인들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최후의 승자가 된 2인자

마지막 내전

바쿠후를 보완한 바쿠한

쇄국을 통한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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