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건국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지 500년 이상이 지나도록 신라는 기나긴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그 오랜 시절 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백제와 지난한 다툼을 벌였고 동해안을 수시로 침범하는 왜구에 시달렸는가 하면 고구려의 속령이 되는 경험까지 겪었다. 또 그런 가운데서도 꾸준히 강역을 늘리고 외부로부터 이주민들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신라의 부족국가적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물왕(奈勿王) 이전까지 400여 년 동안 왕계조차 고정되지 못했다는 게 그 단적인 사례다.
이렇듯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처지게 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선진적인 대륙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라가 일찍부터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시대를 이루었던 것처럼 후대에 알려지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삼국사기』 덕분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진짜 삼국시대의 출발은 5세기 중반 장수왕(長壽王)의 압박 정책으로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는 때부터다. 이 무렵부터 백제를 통해 신라는 뒤늦게나마 중국 문명을 수입하게 된다.
몰락한 백제와 하향평준화를 이루면서 상대적으로 위상이 강화된 신라는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 커다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그런 시점에서 즉위한 지증왕은 상황에 어울리는 뛰어난 순발력을 보였다. 건국 이래 가장 대규모로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한 것이다. 우선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자신의 호칭이다. 그 전까지 사용해 오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호칭은 알고 보니 원시 부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이름일 따름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첨단 문명의 바람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왕’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중국의 천자를 제외한 천하 각지의 수령은 모름지기 왕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공식 직함을 왕으로 정한다(앞서 말했듯이 지금까지 우리는 신라의 경우에도 편의상 왕이라는 호칭을 썼으나 실제 신라의 ‘왕’은 지증왕이 최초다), 그 덕분에 그는 마립간으로 즉위해서 왕으로 치세를 마친 유일무이한 지배자가 되었다.
이왕 이름이 문제되었으니 그 다음은 나라 이름이 개혁 대상이다. 그 전까지 신라는 신라라는 이름 이외에도 사로, 사려 등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했는데【박혁거세가 건국할 당시의 이름은 서라벌(혹은 서나벌, 서야벌, 서벌)이었다. 여기서 ‘벌’이란 성읍이나 도시를 뜻하는 고대어인데, 후대에 가면서 이 말이 탈락되어 사로, 사려, 신라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서라, 서나, 사로, 사려 등은 모두 ‘위’를 뜻하는 ‘솟’과 ‘나라’ 또는 벌판을 뜻하는 ‘라’가 합쳐진 말이므로 대략 ‘윗나라’ 즉 ‘넓은 나라’라는 뜻이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지증왕조의 기사에 신라 대신의 말을 빌려 신라의 ‘신’을 ‘새롭다’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신라라는 이름이 신라에 한자가 도입되기 전부터 사용해 온 것을 감안하면 한자의 뜻으로 이름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김부식의 잘못이 아니라 그가 참조한 신라 사서의 잘못일 수도 있겠지만, 김부식이 이두문에 무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긴, 당대의 대유학자가 어찌 이두 같은 조잡한 문자 체계에 관심을 가졌으랴?】, 무릇 한 나라의 이름이 여러 가지라면 누가 봐도 제대로 된 나라라 할 수 없다. 비록 그 이름들이 모두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뜻만이 아니라 표기도 통일되어야 한다(이로 미루어보면 아마 이 무렵부터 신라는 한지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국가 문서도 작성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지증왕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라라는 이름으로 통일한다. 이렇게 해서 국가와 국왕의 명칭이 확정되었으니 사실상 신라는 이때 새로 건국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증왕의 개혁 드라이브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과거로부터 전해지던 악습인 순장의 풍습을 폐지하는데, 이건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한 것에 해당하는 충격적인 조치다. 신라의 순장 풍습은 국왕이 죽었을 경우 남녀 다섯 명씩을 함께 매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철저했던 시기에 지증왕이 그런 결심을 굳힌 것은 실로 대단히 용기있고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게다가 그는 소를 이용하여 논밭을 경작하는 우경(牛耕)을 최초로 도입하는가 하면 이사부(異斯夫)를 시켜 우산국, 즉 지금의 울릉도를 영토화하기도 했으니 다방면에서 획기적인 개혁을 이룬 팔방미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신라가 시대에 크게 뒤처졌다는 자각이 있었으리라.
개혁과 재건국의 열기는 그의 아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와서도 전혀 사그러들지 않는다. 지증왕의 개혁이 멀리서 바람에 실려오는 중국 문명의 냄새를 맡은 것이라면 법흥왕은 본격적인 중국화의 개혁을 추진한다. 520년에 율령을 제정하고 관직의 서열을 정한 게 그것이다. 이어 이듬해에는 직접 첨단 문명을 직수입하는 루트를 개척한다. 백제의 사신이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갈 때 신라의 사신을 딸려보낸 것이다. 양나라의 역사서인 『양서(梁書)』에는 당시 백제 사신이 신라 사신의 통역까지 해주었다고 전하니, 이것 역시 그 무렵부터 신라가 문자(한자)를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렇게 내부를 정비한 뒤 법흥왕은 대외 사업으로 손을 뻗친다. 고대국가의 성장 지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영토 확장인데, 신라로서 영토를 늘리려면 남진밖에 없다. 그래서 남쪽의 가야를 정복하는 프로젝트가 입안된다. 522년 법흥왕은 대가야와 통혼을 이용해서 동맹을 맺어 기반을 구축한 다음, 10년 뒤에는 본가야(금관가야)를 복속시켰다. 물론 말로 안 되면 군사력을 동원해야겠지만,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본가야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식솔들과 보물들을 가지고 함께 투항해 온 덕분에 복속 작업이 한결 쉬워졌다. 손대지 않고 코를 푼 법흥왕은 구해의 아들 김무력(金武力)에게 관직을 주어 후대하는데, 그로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장차 신라가 반도의 주인으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무력은 신라로 귀화한 이후 신라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칠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김유신(金庾信, 595~673)이라는 손자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당대 법흥왕의 최대 개혁 성과는 불교의 수입이다. 사실 불교는 이미 수십 년 전인 눌지왕(訥祗王) 때부터 신라에 들어와 있었다. 당시 신라의 시각에서 유일한 선진국은 신라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있던 고구려였으므로 고구려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무렵 고구려의 승려인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에 와서 왕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했는데, 아마 그의 전도 사업은 신통치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눌지왕의 딸이 중병에 걸렸을 때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불경을 읊어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적어도 신라 왕실에서는 이때부터 불교를 믿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내세를 위한 보험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내세에서의 삶을 대비해 병사나 하인을 순장시키는 것은 고대 세계의 보편적 관습이었다. 하지만 아주 지독한 지배자가 아니라면 대개 실제 사람을 순장하지 않고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진흙 인형을 묻었다. 중국 진 시황제의 병마용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실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불교가 퍼지는 것이다. 극동의 불교는 대부분 호국불교였으므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대환영이지만 신라 귀족들의 입장은 약간 다르다. 지증왕 때부터 제2의 건국을 추진하면서 개혁의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자 그들은 한편으로 나라가 선진화되는 게 싫지 않으면서도 왕이 직접 개혁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심정일 수밖에 없다. 국왕과 국가의 명칭을 확정하는 문제, 순장을 금지하는 조치 등에 관해서는 찬성과 지지를 보낼 수 있으나 자신의 국가관과 인생관까지 영향을 미치는 목을 베었고 이차돈이 미리 예언한 대로 그의 목에 불교의 문제라면 마냥 동의하기 어려운 처지다. 더구나 전통적인 무속 신앙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는 데도 머리를 박박 밀고 이상한 옷을 입은 승려가 괴상한 주문을 중얼거리는 신흥 종교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귀족들은 마지 못해 불교 장려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실행에 옮기는 데는 주저한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 이차돈(異次頓, 506~527)이라는 젊은이다. 어릴 때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귀족들이 불교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법흥왕에게 자신을 죽여 불교를 일으키는 데 이용하라고 권한다. 갓 스물의 청년다운 패기일까? 법흥왕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지만 이차돈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의 결심은 절을 짓는 것, 그러나 절은 당시 불법이었으니 그의 행위는 일부러 죽을 죄를 짓는 격이다. 그러자 왕은 그의 목을 베었는데 이차돈이 미리 예언한 대로 그의 목에서는 흰 피가 솟구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의 귀족들은 앞다투어 불교로 전향하는데, 사실 이 이야기에는 사기극의 냄새가 농후하다. 물론 이차돈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는 것은 믿을 수도 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목을 베는 것을 보면 법흥왕은 적어도 이차돈의 순교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다음 시나리오에 따라 기적을 조작한 게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불교의 도입으로 법흥왕은 모든 개혁을 완료했다. 마음이 상한 귀족들을 위로할 겸해서 신라의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을 비롯하여 관제 신설을 마무리한 다음 536년에 그는 신라 역사상 최초로 연호까지 제정하는데,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바로 그런 것일 터이다【앞서 말했듯이 달력(역법)과 연호는 독립국의 상징이므로 이제 비로소 신라는 당당한 왕국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세계의 대부분이 서양의 달력(서기)을 쓰니까 달력의 존재를 당연시하지만, 사실 공통적인 달력이 없을 때는 나라마다 연도를 셈하는 기준이 달랐다. 가장 일반적인 기준은 현직 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인데, 이를테면 서기 536년을 법흥왕 23년이라고 하는 식이다. 물론 중국에서 비롯된 전통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에서도 파라오의 즉위를 기준으로 연도를 셈했으니 세계사적으로 보편적인 역법인 셈이다. 참고로 서기 2000년은 단군기년(檀君紀年)으로는 4333년이고, 공자기년(孔子紀年)으로는 2551년이며, 불기(佛紀)로는 2544년, 이슬람력으로는 1379년, 북한에서 현재 사용하는 주체력으로 따지면 89년에 해당한다(일본도 공식적으로는 아직 천황의 연호를 사용한다). 이렇게 보면 이른바 ‘새천년’이란 서양식 달력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일 뿐이다】. 최초의 연호답게 그 연호는 건원(建元, ‘기원을 세운다’)이었고, 그가 죽은 뒤 신하들은 처음으로 불교를 도입한 왕답게 그에게 법흥(法興, 여기서 법이란 불법을 뜻한다)이라는 묘호를 선사했다.
▲ 종교와 기적 무릇 신흥 종교가 뿌리를 내리려면 적절한(?) 기적이 필요한 법이다. 사진은 신라에 불교가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차돈의 순교 공양비다. 그는 원래 박씨로 왕족의 후예였고 법흥왕의 측근이었으니, 아무래도 그가 보여준 기적에는 사기극의 냄새가 풍긴다. 물론 그의 순교는 의심할 필요가 없겠지만 거기에는 아마도 법흥왕의 사전 밀약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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