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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2장 병든 조선, 사대부들의 집안 싸움(붕당)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2장 병든 조선, 사대부들의 집안 싸움(붕당)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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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부들의 집안 싸움

 

 

국왕마저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진 데다가, 이념도 성리학으로 완전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권력다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부터 사이좋게 권력을 분담하고 조선을 지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실제의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툴 이유가 모두 사라졌는데도 사대부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심하게 다투기 시작한다. 외부의 적이 없어졌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 싸운다. 이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당쟁이고, 세련된 용어로 포장하면 붕당정치(朋黨政治).

 

차라리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무장 조직을 동원해서 내전을 벌이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차라리 왕권을 빼앗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대부들은 주먹다짐 같은 것도 없이 입만 가지고 싸우며, 왕이 되려는 게 아니라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막후 실력자가 되기 위해 싸운다. 전 시대와 같은 양아치 정치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도 더 치사하고 시시하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봐도 내전과 반란은 흔하지만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처럼 시시콜콜하게 말꼬리나 잡으며 박터지게 싸운 경우는 없다.

 

사대부들은 일찍이 예종(睿宗) 때 남이의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거치며 말만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는 화려한 말솜씨를 갈고 닦아왔다. 이 탁월한 재능을 유감없이 선보인 무대가 바로 당쟁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당쟁이 시작되는 과정에서부터 치졸한 말싸움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권신 이양을 축출하는 데 공이 컸던 심의겸은 인순왕후의 동생이라는 신분상의 한계(사림의 세상에서는 왕실 외척이라는 게 오히려 단점이다)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으므로 사대부들 간에 명망이 높았고 선ㆍ후배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승지와 대사간, 이조참의 등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하면서 그는 촉망받는 소장 관료이자 미래의 정승감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런 그의 심기를 뒤틀어놓는 일이 일어났다. 1572년 느닷없이 김효원(金孝元, 1532~90)이라는 자가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추천을 받은 것이다. 이조는 문관 최고의 부서이고 전랑은 인사권을 담당하는 관직이니까 출세가 보장된 직책이다. 따라서 소장 관료라면 누구나 탐내지 않을 수 없는 자리다. 일찍이 심의겸은 윤원형이 권세를 휘두르던 시절에 그의 집에 갔다가 김효원의 침구가 있는 것을 보고 공부깨나 한 자가 권력에 아부한다며 멸시한 적이 있었으니 김효원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효원은 전랑 자리를 꿰어차고 만다. 피차 간에 원한을 품을 만한 사연이 발생했다.

 

3년 뒤인 1575년 이번에는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 1545~94)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김효원이 딴지를 걸고 나선다. “척족(戚族, 외척)에게 어떻게 전랑 자리를 맡길 수 있느냐?”는 게 그 근거다. 김효원의 책동으로 동생이 이조전랑을 따내지 못하자 심의겸은 입이 잔뜩 부르튼다. 이제 두 사람은 단순한 라이벌이 아니라 아예 원수지간이 된다. 그러나 분쟁은 두 사람만의 대립에 그치지 않는다. 일찍이 심의겸의 도움을 받아 관직에 오른 자들은 서대문 부근의 정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모였고, 그에게 반대하는 신진 사대부들은 도성 동쪽의 낙산(지금의 종로구, 동대문구,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산)에 있는 김효원의 집으로 모였다. 그들을 각각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부르게 되면서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당쟁이라는 거친 용어 대신 붕당정치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흔히 사대부들 간의 파벌싸움이 학문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치졸한 권력다툼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용어일 뿐이므로 오히려 그 의도가 수상스럽다(당쟁이 시작되는 과정 어디에서도 철학적인 입장 차이 같은 건 볼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학맥이라 할 만한 건 있다. 당쟁을 주도한 사대부(士大夫)들은 대개 이황조식(曺植, 1501~72)의 제자였기 때문이다(심의겸과 김효원은 둘 다 이황의 제자다). 관직 생활을 했던 이황과 달리 조식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오로지 제자들만 길러냈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이는 조선 특유의 학자 - 관료 지배 체제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실은 이상할 게 없다. 이황과 조식은 모두 당대에 큰 존경을 받은 인물들이지만, 결국 제자들이 당쟁을 일삼았으니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당쟁의 배후 조종자였다고 할 수 있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자 자연히 중개에 나서서 화해와 사태 수습을 도맡은 인물들도 생겨나게 된다. 이이노수신(盧守愼, 1515~90)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이는 서인의 계열이긴 하지만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을 했던 당대의 천재였으니 영향력이 크고, 노수신은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양재역 대자보 사건으로 사화(士禍)의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었으니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반목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심의겸이 한동안 한양을 떠나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쟁은 냉각기를 갖게 된다. 아울러 말썽많은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제가 폐지된 것도 당쟁의 불씨를 억누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한양으로 돌아온 심의겸이 1584년에 이이가 죽은 뒤 동인의 조직적인 반격을 받아 파직당하면서 당쟁의 열기는 더 후끈 달아오른다.

 

이제는 탐색전도 없이 본격적인 격투다. 서인과 동인은 무리의 주도자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당파를 이루었고 당쟁 역시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동과 서의 글씨 위쪽은 서인의 시작인 심의겸의 글씨고, 아래쪽은 동인의 원조인 김효원의 글씨다. 서로 바뀌었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비슷한 글씨체인데, 실제로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은 글씨만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 정치 이념에서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당쟁을 시작한 것은 흔히 잘못 알려져 있는 것처럼 철학이나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양아치 세상

윗물이 흐리면

동북아 질서의 근본구조

사대부들의 집안 싸움

당쟁의 사상적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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