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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모두가 침묵한 때(황국신민, 창씨개명, 총동원령, 광복)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모두가 침묵한 때(황국신민, 창씨개명, 총동원령, 광복)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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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침묵한 때

 

 

히틀러의 도발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이미 1938년에 일본 군부는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는데, 아마 2차 대전에 연루되는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빠른 스타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재빠르게 운신한 이면에는 사실 중대한 오판이 있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은 속전속결로 중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이 예상한 대로 중국군은 홍군과 조선 유격대까지 가세했어도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대륙을 먹어들어갈수록 중국 정부가 아니라 중국 민중 전체를 상대로 하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전쟁은 아무래도 장기화될 전망이 커졌다. 게다가 이미 장악한 중국의 동해안도 워낙 넓은 탓에 일본은 점령지를 수비할 병력조차 모자랄 정도였다. 자칫하면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에서는 질지도 모르는 상황, 일본 군부가 총동원령을 필요로 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그 덕분에 군부는 일본 내의 기업들은 물론이고 전 국민의 사유재산과 인력까지도 마음대로 동원하고, 국민들의 일상생활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본토가 이럴진대 식민지인 한반도의 사정이 어떨지는 짐작이 간다.

 

만주사변이 끝난 뒤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일본이 만주를 차지하고서도 5년 뒤에야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전쟁 수행을 위해 먼저 만주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 침략이 늦어진 데는 일본 내부의 사정도 있었다. 1932년에 일본에서는 또 다시 수상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 내에서는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신흥 재벌과 결탁한 황도파(皇道派)와 전통재벌과 결탁한 통제파(統制派)가 경합한 결과 통제파가 승리하면서 군부는 비로소 대륙 침략을 결정할 수 있었다. 비록 군국주의의 힘이기는 하지만, 중국과 조선에서는 항일운동을 놓고 벌어진 분열조차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데 비해 일본은 그렇듯 번개같이 분열을 봉합했으니 승패는 뻔한 것이었다. 한반도 북부에 군수공장을 속속 설립하고 광산 개발에 주력한 것이나, 남부에서 미곡 공출량을 크게 늘린 것은 그때부터다(그런 탓에 해방 직후 한반도는 북한의 공업과 남한의 농업으로 심각한 산업적 불균형을 보였다. 물론 분단이 없었더라면 그것은 불균형이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차라리 경제적 착취라면 아무리 심하다 해도 견딜 수 있다. 한국민들에게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일본의 집요한 문화적 수탈, 이른바 민족말살 정책이었다.

 

 

40년대의 국민교육헌장 조선의 어린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있는 장면이다. 두 손을 단전에 모은 모습이 자못 엄숙하다. 이런 유치하고도 군국주의적인 장면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30여 년이나 지나 박정희 유신정권의 국민교육헌장에서 되풀이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20년대 후반 한때 유화 분위기를 보였던 일본은 전쟁 일정이 가시화되면서 다시금 탄압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다. 그 다급한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유사 이래 어느 억압자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교활하면서도 치졸하다는 게 문제다. 어떻게든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던 총독부는 이를 위해 우선 일본과 조선이 한몸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내건 구호가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라는 것이다(‘皇國란 물론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선일체라면 일본과 조선이 차별과 구별이 없는 공동체라는 뜻일 텐데, 어찌 보면 취지는 괜찮은 듯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공동체란 삶과 행복을 함께 하자는 게 아니라 다같이 황국의 신민으로서 공동의 의무, 즉 전쟁의 의무를 함께 나누자는 것이니 눈 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면 굳이 말과 글을 따로 쓸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총독부는 1935년부터 한글 교육을 일체 금지하고,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아예 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만을 사용하라고 명령한다. 동아일보조선일보를 비롯하여 한글을 사용하는 신문과 잡지는 당연히 폐간되었다. 그보다 더 심한 조치는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즉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한글을 쓰지 말라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성씨를 바꾸라는 건 참을 수 없다. 조상 숭배의 오랜 전통과 유학 국가의 오랜 역사를 지녀 온 조선 사람들에게 성씨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45년 전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됐을 때보다도 더 강력한 반발이 따라야 했겠으나, 식민지의 처지인 데다 전시였으므로 그 맹랑한 조치는 그런 대로 먹혀들었다.

 

그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교육과 취업에서 제한을 받은 것은 물론 각종 징용과 노역을 당해야 했으므로 어지간한 강골이 아니고서는 이름을 바꾸지 않고 버티기가 어려웠다이런 강제성이 있었기에 19408월의 마감 기한까지 대상의 약 80퍼센트가 창씨개명을 했다. 해방 직후 한때 창씨개명을 했는지의 여부로써 친일파의 지표를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한국인의 대다수가 친일파의 딱지를 붙이게 되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2의 단발령에 용감하게 맞선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단발령(斷髮令) 때처럼 자살로 항거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자기비하적 인 뜻의 이름을 지어 불복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글과 말을 잊어라 이름을 바꾸게 하고 조선어를 쓰는 것마저 금지할 정도라면 일본이 직전 얼마나 말기적 증상을 보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사진은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일본어를 교육하는 장면인데, 그밖에도 학생들을 시켜 집에서 부모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하기도 했다.

 

 

총독부의 치졸한 일체화 정책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의 역사 전체를 식민사관으로 도배한 조선사(朝鮮史)37권을 간행한 것은 그나마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줄 수도 있겠지만, 동방요배(東方遙拜)라는 이름으로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경배하도록 한다거나, 천황의 신민임을 맹세하는 내용의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외우도록 한 것은 정책이라기보다는 조잡의 극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1968년 박정희는 독재정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걸 만들어 국민들에게 외우도록 강요했는데, 필경 황국신민서사에서 커닝한 구상일 것이다). 그에 비해서는 차라리 초기의 토지조사사업이나 동척의 활동이 오히려 식민지 지배에 어울리는 정책이 아니었을까?

 

사실 당시 일본은 정책의 멋을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곧이어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세계 최강 미국마저 끌어들인 판에 이제는 더 이상 교활한 방식으로 식민지 수탈을 포장할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이전까지 모집이라는 형식을 취했던 인력 충원도 이때부터는 노골적인 강제 징발로 대체된다. 싸울 수 있는 자는 전장으로(징병), 일할 수 있는 자는 광산으로(징용), 심지어 젊은 여성들마저 위안부로 만들어 전장과 광산으로 보내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전쟁 수행을 위한 전면적 수탈 체제로 편제했다. 이제 한반도는 식민지의 어둠을 넘어 캄캄한 암흑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바로 그때 항일운동의 맥이 뚝끊겨 버렸다는 사실이다. 조선공산당이 유명무실화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1930년대에 그토록 치열했던 항일무장투쟁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사그러든다. 가장 어둠이 짙을 때, 나라와 민족이 가장 깊은 도탄에 빠져 있을 때, 항일투쟁이 가장 긴요하고도 절실할 때 항전이 중단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멀리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강점한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유고, 체코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정작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인 한반도에서는 짙은 어둠에 깊은 침묵으로 대응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완전한 침묵은 아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는 1940년에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해서 처음으로 무력 항전의 기치를 내걸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성립한 지 20년 뒤에야 비로소 창설된 군대가 제 기능을 하기는 어렵다. 사령관과 참모를 정하고 지휘 체계와 편성을 갖추느라 부산을 떨다가 정작 필요한 병력은 군대 창설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300명 정도 모집하는 데 그쳤으니 광복군은 그저 임시정부도 군대를 거느렸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당시 유일하게 항일투쟁을 지속한 사람들은 중국 홍군에 속한 조선 유격대원들뿐이었으나 이들은 일단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항전한 것이었으니 논외다1942년 김두봉은 조선의용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해서 무력 투쟁을 계속했다(공교롭게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람이 비슷한 군대를 조직했는데, 그것은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다. 하지만 이 군대는 주로 정보전과 테러에 주력했으니 전투를 위주로 한 조선의용군과는 다를뿐더러 나중에는 광복군에 흡수되었다). 당시 항일투쟁에서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종전 후 정치적 구도에 미치는 영향으로 볼 때 홍군의 해방구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홍군 지휘부의 지휘를 받았던 조선의용군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머지는 모두 뭘 했을까?

 

 

징병 그리고 징용 전쟁이 본격화되자 일제는 전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반도를 군사기지화했다. 왼쪽은 아들을 학병으로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이 남긴 피 맺힌 절규다. 학병은 형식적으로는 자원이었으나 총독부는 각 학교를 통해 사실상 강제동원령을 내렸다.

 

 

조선공산당의 리더인 박헌영(朴憲永, 1900~55)1939년에 만기출소한 뒤 기와공장에 인부로 위장취업해서 동료 공산주의자들과 비밀리에 안부만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보다도 더 편하게 험한 시절을 보낸 사람은 김일성이다. 처음부터 중국공산당과 거리를 두었던 그는 1940년 동북항일연군이 해체되자 이듬해 동료 대원들과 함께 소련으로 가서 소련군 장교가 되어 해방될 때까지 간부 훈련을 받으며 지냈다. 정작 조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았을 때 그는 투쟁을 포기하고 차후 권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이 될 이력서 만들기에 주력했던 것이다.

 

모두가 일어나서 가장 가열차게 항일투쟁을 벌여야 할 때 오히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숨죽여 버렸다. 해방 직후 연합국 측이 한반도를 준전범국으로 취급한 이유는 일본에 의해 인력이 징병되고 징용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에 협력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임시정부, 항일 유격대, 조선공산당 등 항일투쟁의 주력이 되어야 할 세력들이 모조리 침묵했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 직후 연합국 측이 한반도의 어느 세력에게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은 이유는 그 가장 어려운 시기에 어느 세력도 앞장서서 항일투쟁에 투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자한 만큼 이윤을 배분받는 것은 기업계의 원칙만이 아니다. 한반도 토착 세력이 항일에 기여한 게 없으니 해방 후 승전국들이 배분하는 전리품을 그들이 할당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홍군 속의 조선군

모두가 침묵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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