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백우에게 이런 병이 들 줄이야
6-8. 백우가 몹쓸 병에 걸렸다. 공자께서 병문안을 가시었다. 6-8. 伯牛有疾, 子問之. 방안으로 들어가시지는 않으시고 창으로 그 손만 잡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맥이 없구나! 명이 다 했구나!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自牖執其手, 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
참으로 중후한 공자의 인품과 삶의 비운의 한 장면을 가슴 저미게 보여주는 훌륭한 장이다. 이런 파편은 거의 공자 생전 그대로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 등장하는 염백우는 염구ㆍ염웅과 함께 노나라 염씨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십철(四科十哲)에 덕행으로 손꼽힌 공문의 무게있는 인물이다. 성이 염(冉) 이름이 경(耕), 자가 백우(伯牛). 공자보다 7세 연하인데, 혹설에는 염옹의 아버지라고도 하나, 아마도 염구ㆍ염옹ㆍ염백우가 모두 가까운 집안사람이긴 해도 염옹의 부친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자로와 비슷한 나이이니까(자로보다 두 살 위)공문에서는 한참 고참이다. 그는 중도(中都)의 재를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염백우에 관한 것은 「선진(先進)」 2의 사과십철 명단 외로는 여기 단 한 번 등장한다.
염백우는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려 죽었다. 나병으로 죽어가는 제자의 거의 임종에 다다른 순간에 공자는 그 집을 방문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병자의 침실에서 병자는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북벽에 붙어 누워있다. 그런 상태에서 공자가 들어가면 공자가 신하처럼 북면하게 되므로 곤란하다. 예로부터 임금이 병문안하러 오면 침대를 남쪽벽으로 옮기고 임금이 북쪽으로부터 남면 하여 문안케 된다는 것이다. 공자가 도착하자 염씨집에서 이러한 예의를 다하였으므로, 공자는 겸허하게 임금대접 받는 것을 거절하고 그냥 입실치 아니 하 고 창으로부터만 손을 잡으셨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설에 전면으로 반대한다. 문제는 지금 이러한 예의를 따질 상황이 아닌 것이다. 지금 향방이 어쩌니 저쩌니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공자는 이런 상황에서 도무지 그런 격식에 따라 행동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본 문을 잘 읽어보면 전혀 의례(儀禮)의 문제가 개입될 건덕지가 없다. 창[유牖]도 황간이 남창으로 소를 달았기 때문에 남창을 고집하지만[牖, 南窗也], 그것이 남창이어야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북창일 수도 있고, 남창일 수도 있고, 서 창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집의 가옥구조에 딸린 것이지 고정된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환자의 방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했다. 무엇보다도 문둥병이라는 특수상황이 있다. 위생적으로도 들어가기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문둥병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본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덕행이 출중하여 고결하게 산 훌륭한 제자의 모습을 고름투성이 일그러진 채로 본다는 것은 공자 자신에게도 몹쓸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염백우 본인에게 송구스럽고 애처로운 일이다. 그래서 공자는 야단법석을 일체 중지시키고 아무런 격식없이 그가 누워있는 곁 창문으로 그의 손만을 잡은 것이다. 나의 이러한 설은, 고주를 잘 읽어보면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포씨가 말하였다: “염백우는 몹쓸 병에 걸렸다. 본인 스스로 사람을 직접 대면하고 싶어하지 아니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창문으로부터 그 손만 잡은 것이다[苞氏曰: “牛有惡疾, 不欲見人. 故孔子從牖 執其手也.]” ‘不欲見人’을 공자를 주어로 해서 해석할 수도 있다. ‘염백우가 악질에 걸렸다. 공자께서는 그 사람을 직접 보기를 꺼려하셨다. 그러므로 창으로부터 그 손만 잡으신 것이다[牛有惡疾. 不欲見人, 故孔子從牖執其手也].’】. 다음에 손을 잡고 하는 말에 주석가들은 모두 확신있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망지(亡之), 명의부(命矣夫)!
1) 고주대로 ’망지(亡之)‘를 ’틀렸구나[喪也]로 해석하는 것이다. 살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병인에게 대놓고 ‘너 죽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박절하며 예의에 벗어난다는 것이다.
2) 따라서 다른 주석은 ‘이럴 수가 있나!’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태다! 이렇게 훌륭한 덕망이 있는 자가 이런 몹쓸 병에 걸리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사태라는 것에 대한 한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주석이 매우 단순한 고대인의 생활습관을 무시하고 있다. 공자는 장인이었으며 의학에도 밝은 인물이었다. 여기 창으로부터 손을 잡는다[自牖執其手)는 것은 건성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맥을 잡는 것이다. 이 집맥의 전통은 이미 공자시대에도 엄존하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다음의 ‘망지(亡之)’는 해석이 명료해진다. ‘망(亡)’이란 있던 것이 없어지는 사태에 대한 기술이다. 그리고 여기 문맥상 결코 추상적인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의 맥을 잡고 그 마지막 순간을 감지한 것이다: ‘없구나[亡之]!’ 여기 없구나는 활맥[活脈]이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탄식인 것이다. 그 다음의 탄식도 매우 명료해진다. ‘명의부(命矣夫)!’ 이것은 맥이 스러져가는 그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천명(天命)이라는 것이다. 염백우도, 주변의 사람도, 공자 본인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천명이라는 것이다. 「자한」 편의 첫머리에 공자는 명을 드물게 말했다 했지만, 공자는 분명 이렇게 거대한 자연의 조화 앞에, 덕행의 유무와 관계없이 스러져가는 제자의 운명을 탄식하면서 ‘천명의 형이상학’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하도다! 공자여!
‘夫’는 ‘부(扶)’라고 발음한다. ○ ‘백우(伯牛)’는 공자의 제자이다. 성이 염(冉)이고, 이름 이 경(耕)이다. ‘유질(有疾)’이라 함은 선유(先儒)들이 나병으로 고증한 것이다. ‘유(牖)’는 남쪽 창이다. 예(禮)에 병자는 북쪽 창 아래에 거하니, 임금이 문병오시면, 침상을 남쪽 창 밑으로 옮겨, 임금으로 하여금 남면하여 자신을 볼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당시 염백우의 집안에서는 이 예로써 공자를 높이니, 공자께서는 불감당(不敢當)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그 방에 들어가시질 아니 하고 창으로부터만 그 손을 잡으시니, 대저 염백우와 영결(永訣)하신 것이리라. ‘명(命)’은 천명을 일컬은 것이다. 이 사람이 이런 병이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인데 지금 걸렸으니, 이 어찌 하늘의 명한 바가 아니리오? 그러한즉, 그의 생활태도가 근실치 못하여 이런 병에 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夫, 音扶. ○ 伯牛, 孔子弟子, 姓冉, 名耕. 有疾, 先儒以爲癩也. 牖, 南牖也. 禮: 病者居北牖下. 君視之, 則遷於南牖下, 使君得以南面視己. 時伯牛家以此禮尊孔子, 孔子不敢當, 故不入其室. 而自牖執其手, 蓋與之永訣也. 命, 謂天命. 言此人不應有此疾, 而今乃有之, 是乃天之所命也. 然則非其不能謹疾而有以致之, 亦可見矣.
○ 후씨가 말하였다: “염백우는 덕행으로 칭송을 받고 안자ㆍ민자 다음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으려하매 공자께서 더욱 통절하게 애석해하신 것이다.”
○ 侯氏曰: “伯牛以德行稱, 亞於顔ㆍ閔. 故其將死也, 孔子尤痛惜之.”
여기 후씨는 생졸연대 미상으로 후중량(侯仲良, 허우 종리앙, Hou Zhong-liang)이라고 한다. 중량은 북송시대 사람으로 호북성(湖北省) 하동(河東) 출신이다. 자는 사성(師聖), 형문선생(荊門先生)이라고 칭한다. 이정자(二程子)의 장인[舅]인 화음선생(華陰先生) 후무가(侯無可)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생활이 매우 깨끗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주희는 ‘그의 학문이 대체로 명백경정(明白勁正)하다’고 말했다. 『송원학안(宋元學案)』 「유리제유학안(劉李諸儒學案)」에 기사가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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