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계씨의 신하되는 걸 거절한 민자건
6-7. 계씨가 민자건(閔子)을 비읍의 읍재(邑宰)로 삼으려 하였다. 6-7. 季氏使閔子騫爲費宰. 민자건은 심부름 온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를 위해 말 좀 잘 해다오. 또다시 나를 부르러 온다면 나는 반드시 문수(汶水)가에 있을 것이다.”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
여기 민자건(閔子騫, 민 쯔치엔, Min Zi-gian)이 처음 나오고 있다. 우선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를 보자.
민손은 노나라사람이다. 자가 자건이다. 덕행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공자는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閔損, 魯人, 字子騫. 以德行著名, 孔子稱其孝焉.
그리고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논어』 기사를 편집한 것 외로는 다음과 같은 정보만 있다.
민손은 자가 자건이고 공자보다 15살 연하이다.
閔損, 字子騫, 少孔子十五歲.
이상의 정보를 요약하면 그가 노나라사람으로서 나이가 지긋한 것으로 보아 비교적 일찍 공문에 들어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과십철(四科十哲)에도 안연ㆍ염백우ㆍ중궁과 함께 덕행(德行)으로 꼽히었으니 공문 내에서 중후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참그룹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의 기록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덕행(德行)과 효(孝)이다. 그의 덕행은 「선진(先進)」 2의 사과십철 기록으로 입증되고, 그의 효심에 관한 공자의 칭찬은 「선진(先進)」 4에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선진」편에 민자건의 기사가 4건이나 편집되어 있어, 호인(胡寅)은 「선진」편이 민자건의 문중에서 성립한 기록일 수도 있다는 설을 편다. 「선진」편에는 민자건을 민자(閔子)라고 호칭하는 장이 들어있다는 것도 그러한 추론의 한 근거이다(11-12). 그러나 「선진」편 전체가 민자 문중에서 성립했다고는 단정키 어려울 것이다. 하여튼 『논어』 속에서 자(子)로써 호칭된 4인 중에 한 사람으로 민자건 이 들어간다【증자(曾子) 14번, 유자(有子) 3번, 염자(冉子) 2번, 민자(閔子) 2번】.
유향의 『설원(說苑)』에 잃어버린 옛 이야기를 채록해놓은 자료에 의하면 민자건은 어렸을 때 엄마를 잃었고, 계모가 들어왔는데, 계모의 학대를 무척 받고 컸다 했다. 이러한 얘기는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흔히 들었던 설화의 전형적 한 패턴이다. 아버지가 계모의 학대를 발견하고 그녀를 내쫓으려 하자, 민자건은 아버지를 말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 참으세요. 그래서 어머니가 계시면 저 혼자 외로울 뿐이지만, 어머니가 떠나시면 세 동생이 굶습니다[母在一子單, 母去三子寒]” 민자건은 하여튼 효행으로 이름이 났고 덕행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가 노나라에서 새 건물을 짓는 것을 반대한 것을 보면 전통을 사랑하는 보수적 성향의 검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그가 평소 말이 없고 신중하다고 평한다. 그런데 한번 말이 입에서 나오면 반드시 도리에 맞는다[言必有中. 11-13]고 했다.
여기 계씨는 계강자(季康子)이다. 그리고 계씨의 성읍 중에서 비읍은 가장 막강했고 가장 골치가 아픈 성읍이었다. 유보남의 『정의』에 의하면 노나라에는 비읍이 두 개가 있는데 계씨의 비읍은 기주부(沂州府) 비현(費縣) 현성(縣城)의 서남 70리에 있다고 말한다. 정공(定公) 12년(BC 498) 계씨의 재(宰)가 된 자로가 비읍의 읍성 성벽을 허물려는 계획을 짰는데, 당시 비읍의 성주 공산불뉴(公山不狃)가 완강한 반항을 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그를 쳐부순 사건이 있다. 공산불뉴는 제나라로 도망쳤지만, 결국 삼도(三都)의 무장해제가 실패로 돌아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유랑길에 들어서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양호 가 비율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도 있다. 하여튼 이 비읍은 골칫거리였다. 따라서 이 골칫거리인 비읍을 공문제자 중에서 덕행이 높은 민자건에게 한 번 맡겨보겠다는 계강자의 속셈은 매우 현명한 도박이었다. 아마도 이 요청은 염유가 계씨의 재(宰)가 된 BC 484년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니까 민자건에게 거절당하고 염유를 초빙했을 수도 있다.
하여튼 민자건에게 그런 오파가 먹힐 리 없다. 민자건은 평소부터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덕행을 소중히 여기는지라 계씨와 같은 도덕성 없는 권력자 밑에서 공연히 몸만 버릴 자리에 구미가 당길 까닭이 없다.
여기 문수(汶水)란 물론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이다. 대문하(大汶河)는 산동성 내무현(萊蕪縣) 동북 원산(原山)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석문수(石汶水), 모문수(牟汶水), 북문수(北汶水) 등 여러 갈래가 있다. 서쪽으로 흘러 대청하(大淸河)ㆍ소청하(小淸河)와 합류하여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데, 여기서 말하는 문수는 당시에는 노나라와 제나라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辭)’는 그냥 잘 말해달라는 부탁일 수도 있고, 사의를 잘 전해달라는 부탁일 수도 있다. 또 벼슬 부탁하러 오면 나는 문수가에 가있겠다고 한 것은 노나라를 버리고 제 나라로 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석을 단다. ‘상(上)’을 문수 위로 번역하여 이미 제나라 영역으로 들어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무리 당시 이민이 자유로운 시절이라고 한다지만, 노나라의 사람 이 그만큼 노국민의 신망을 얻고 있는 자가 벼슬 준다고 제나라로 도망가버리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치사한 느낌이 든다. 그런 식으로 주석을 달면 민자건의 격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문수가에 가있겠다’고 번역을 했는데, 국경을 건너 도망가겠다는 의미보다는 변경의 초야에 묻히겠다든가, 보다 협박조라면 문수에 빠져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장자(莊子)』의 「외물(外物)」 11편을 한번 펴보자!
요임금은 허유에게 천하를 주려했다. 그러나 허유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귀를 씻고 도망가버렸다. 탕임금도 천하를 무광에게 주려했다. 그러자 무광은 노기가 충천했다. 기타는 이 말을 듣자 아예 제자들을 거느리고 관 수 옆에 천막을 치고 쭈그리고 살았다. 제후들은 기타가 관수에 빠져죽을까 두려워 3년이나 그를 찾아가 위문해야 했다. 그러자 신도적은 진짜로 황하에 몸을 날려 빠져죽고 말았다.
堯與許由天下, 許由逃之; 湯與務光, 務光怒之, 紀他聞之, 帥弟子而蹲於窾水, 諸侯吊之, 三年, 申徒狄因以踣河.
이러한 장자(莊子)의 우화는 그 노리고 있는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은 우리가 차분히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하여튼 이러한 우화가 꾸며지는 프로토 타입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논어』의 민자건 ‘문수가 이야기’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논어』를 읽는 사람들이 『논어』의 권위에만 억눌리어 민자건의 덕행을 추앙하기만 하고, 이 구절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아무도 따져보질 않는다. 그리고 민자건이 재 벼슬을 거절하고 문수가로 도망가 있겠다고 한 이야기를 만고의 청렴한 덕행으로 추앙만 하려한다. 그러나 우선 벼슬을 무조건 사양한다 해서 그의 덕행이 높은 것은 아니다. 벼슬을 해서 바른 정치를 행하여야 할 사람이라면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벼슬을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우선 유학의 본질이 이러한 민자건의 감상적 이야기로 인하여 왜곡되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본 장의 언어로써는 도저히 왜 민자건이 계씨의 오파를 거절했어야만 했는지 그 필연적 논리를 파악할 수 없다. 그냥 상식적 추리로 이런 문제를 접근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정당한 벼슬을 하는 것도 정확한 논리가 있어야 하고, 정당치 못한 벼슬을 거절하는 것도 정확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벼슬을 줄 생각도 안 하는데 벼슬 안 한다고 폼 잡는 것은 전혀 청빈이나 이속(離俗)과 관련이 없다. 참으로 그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되는데 하고 간곡히 부탁하는데도 정당한 논리로 거절할 때만이 그 거절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이고 그것은 도덕적 품성에 관련되는 것이다. 한번 슬쩍 찔러 보는 척하다가 거절하든 말든 씨렁방구도 안 꾸는 상황이라면, 전혀 그 사람의 도덕성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벼슬할 자격도 없고 실력도 없고, 벼슬 줄 생각도 아니 하는데 김칫국물부터 마시고 거절했답시고 폼 잡으면서 초야에 묻혀산다는 둥, 나는 권력에 초연하다는 둥 헛소리를 뇌까리는 상황이 허다하다. 장자가 신도적(申徒狄)이 몸을 날려 황하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존경스러운 사람의 덕행으로서 열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천하를 맡길 생각도 아니 하는데, 거절 그 자체가 허영이 되어버린 어리석은 자의 우행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빈이나 이속을 운운하는 대부분의 인간이 이러한 코미디의 한 캐릭터에 불과한 것이다.
벼슬을 아니 하고 초야에 묻히는 것만을 지고의 덕행으로 삼는다면 그 사회는 과연 누가 이끌고 갈 것인가? 젊은이들의 꿈과 비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조선왕조의 폐해는 초야에 묻힌 사람이 적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벼슬을 하여 한 치라도 정도를 걸어간 사람이 적다는 데 있는 것이다. 초야에 묻히는 것이 도대체 뭔 자랑인가? 가을 낙엽이 한 잎 떨어져 썩고마는 것보다도 더 가치가 없는 삶일 수도 있다. 초야에 묻힌다든가, 벼슬을 거절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러한 생활을 통해서도 사회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의미있는 것이다. 초야에서 무위도식하는 불한당들을 왜 존경해야 한단 말인가? 18년의 유배기간에도 발분망식(發憤忘食) 오로지 방대한 저술에 전념한 다산의 행적이나, 불알을 발리는 치욕을 당하고서도 인류 불후의 명작 『사기(史記)』를 남긴 사마천의 눈물어린 세월이야말로 ‘초야’의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민자건의 행태에 관해서는 별 감동이 없다.
‘費’는 음이 ‘비(秘)’이다. ‘위(爲)’는 거성이다. ‘復’은 부우(扶又) 반이다. ‘汶’은 음이 ‘문(問)’이다. ○ ‘민자건(閔子騫)’은 공자의 제자이며, 이름이 손(損)이다. ‘비(費)’는 계씨의 읍(邑)이다. ‘문(汶)’은 물이름이다. 제나라 남쪽, 노나라 북쪽 그 경계상에 있다. 민자는 계씨의 신하노릇 하고 싶질 않았다. 그래서 심부름 온 사자(使者)에게 자기를 위해 잘 좀 말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와서 자기를 벼슬로 부른다면, 반드시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費, 音秘. 爲, 去聲. 復, 扶又反. 汶, 音問. ○ 閔子騫, 孔子弟子, 名損. 費, 季氏邑. 汶, 水名, 在齊南魯北竟上. 閔子不欲臣季氏, 令使者善爲己辭. 言若再來召我, 則當去之齊.
○ 정이천이 말하였다: “중니의 문도로서 대부의 집안에 벼슬하지 않은 자는 민자ㆍ증자 등 몇 사람일 뿐이다.”
○ 程子曰: “仲尼之門, 能不仕大夫之家者, 閔子ㆍ曾子數人而已.”
바로 이러한 이천의 멘트가 유학의 정밀한 논리를 왜곡시킨 것이다. 유학은 출세간의 도가 아니요, 입세간의 도이다.
사랑좌가 말하였다: “배우는 자가 내ㆍ외의 구분을 조금만 파악해도, 모두 안빈낙도할 수 있고 타인의 권세를 잊어버릴 수 있다. 하물며 민자는 성인의 가르침을 얻어 의귀(依歸)로 삼았으니, 계씨의 불의한 부귀를 개ㆍ돼지만도 못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계씨를 따라 신하노릇을 한다 할 때 그 마음이 오죽 했으리오! 성인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그러하지 않음도 있을 수 있다. 어지러운 나라에 살고, 악인을 만나면서도 성인은 몸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성인 이하는 모두 강하면 반드시 화를 입고, 약하면 반드시 욕을 본다. 그러니 민자가 어찌 미리 살펴 그러한 것을 예방치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자로는 제명대로 죽지 못했고, 염구는 계씨를 위하여 재산을 증식시켜주었다. 이런 일들이 어찌 그들의 본심이었으랴! 대저 선견지명이 없으면, 또한 극란(克亂)의 재주도 없는 것이니, 민자를 어질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謝氏曰: “學者能少知內外之分, 皆可以樂道而忘人之勢. 況閔子得聖人爲之依歸, 彼其視季氏不義之富貴, 不啻犬彘. 又從而臣之, 豈其心哉? 在聖人則有不然者, 蓋居亂邦, 見惡人, 在聖人則可; 自聖人以下, 剛則必取禍, 柔則必取辱. 閔子豈不能早見而豫待之乎? 如由也不得其死, 求也爲季氏附益, 夫豈其本心哉? 蓋旣無先見之知, 又無克亂之才故也. 然則閔子其賢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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