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타고난 대로 살리
6-1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의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은 반듯하다. 그런데 그것을 구부리어 사는 삶이란 요행으로 면하는 삶일 뿐이다.” 6-17. 子曰: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
참으로 위대한 공자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맹자의 성(性)의 주장 이 맹자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요, 그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는 모두 공자에게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기온이라 할 것이다. 우선 이 장을 해석하는 고주의 입장과 신주의 입장이 매우 다르다. 우선 첫 번째 구절에 대한 마융馬融)의 주석을 한번 살펴보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스스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정직의 도(道)로써 일관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言人之所以生於世而自終者, 以其正直之道也.
그러니까 우선 ‘직(直)’이라는 것을 정직(正直)이라는 도덕적 덕목으로 풀었다【‘正直’은 『상서(尙書)』 「홍범(洪範)」, 다섯 번째 황극(皇極)의 범주 속에 ‘왕도정직(王道正直)’이라는 표현이 있고, 또 여섯 번째 삼덕(三德)의 범주의 하나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후천적 노력으로 달성되는 것으로 푼 것이다. 사는 동안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뜻이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때로는 고주가 한대(漢代) 의 도덕관념을 더 지독하게 덮어씌울 때가 많다. 오래되었다고 고의(古意)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풀이방식이 더 도식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공자의 시대와 이 들 고주의 시대가 이미 6ㆍ700년의 시차가 있다. 공자에게서 600년을 떨어지나, 1700년을 떨어지나 2500년을 떨어지나, 떨어지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이미 600년 정도의 시차라는 것은 고(古)의 진실성을 확보하기에는 너무도 떨어져 있는 것이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오히려 풍요로운 정보의 개발과, 사유의 개방으로 인하여 공자의 시대의 원래 모습에 더 접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 구절도 첫 구절과 관련하여 포씨(苞氏)는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정직한 도를 무망(미혹하고 굽게 만든다)케 하여도 역시 살아가기는 하는데, 이러한 삶은 요행으로 면하는 삶일 뿐이다.
誣罔正直之道而亦生, 是幸而免也.
신주는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을 생리(生理)의 본래 모습으로 풀었다. 즉 후천이 아니라 선천적 본성으로 푼 것이다. 나는 일단 신주에 동의한다. 신주처럼 해석해야만 원래의 맥락에 부합될 뿐 아니라 의미의 지평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우선 황본 텍스트를 보면 본문이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이 아니라 ‘인생야직(人生也直)’으로 되어있다. 고본 텍스트가 정확한 원래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人生也直’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만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곧다’라는 뜻이다. 여기는 서양철학적인 선천(a priori)과 후천(a posteriori)의 개념이 개개될 여지가 없다.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선천ㆍ후천은 임마누엘 칸트의 논의를 포함하여 기독교의 천국론적 사고나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전제로 한 형이상학적 독단(Dogma)에 물들어 있다. 선천과 후천은 그 경계를 논할 수 없다. 선천을 후천적 습득 이전의 사태로 규정한다 해도 그것은 후천의 배경으로서의 선천이며, 이때의 선천이란 후천과 공재(共在)하는 것이다. 선ㆍ후천을 어떠한 경우에도 시간의 선ㆍ후로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본성에 있어서의 선천의 문제는 생리학적 문제일 뿐이며 그것은 앞으로 분자생물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일 뿐이다. 이러한 나의 주장을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말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말하는 자들의 선ㆍ후천에 관한 모든 주장이 형이상학적 오류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한 선험(先驗: 경험 이전의 사태)이 무엇인지에 관한 모든 논의는 불가지론 위에 덧입혀지는 임의적 색칠에 불과한 것이다.
최소한 공자의 논의는 인간의 본성론이나 본체론에 관한 논의가 아니다. ‘인생야직(人生也直)!’ 인간의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은 직(直)하다는 것이다. 여기 ‘직(直)’이라는 것을 한유ㆍ송유를 막론하고 모두 ‘정직’ 이라는 도덕적 덕목으로 풀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도덕적 덕목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直’은 ‘곧다(straight)’라는 사물의 사태에 대한 객관적 기술일 뿐이다. 물론 이미 가치판단이 개재되어 있을 수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기술(Description)을 위주로 한 것이다.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망(罔)’은 물론 ‘직(直)’과 대비되는 형용사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명도의 말대로 ‘부직(不直)’이며 ‘곧지 못한 것’이다. 즉 ‘구부러짐’이다. 그런데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을 ‘인생야직(人生也直)’으로 봐야하듯이, ‘망지생야(罔之生罔)’에서 ‘지(之)’라는 조사는 빼어버려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망생야행이면(罔生也幸而免)’이 된다. 다시 말해서 ‘망(罔)’이 ‘구부리다’라는 타동사가 되는 것이다. ‘망생야(罔生也)’는 ‘타고난 대로의 곧은 삶을 구부린다면’의 뜻이 되는 것이다. 고주는 이미 ‘망(罔)’을 ‘무망케 만들다’라는 타동사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은 곧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모습을 구부려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한 삶은 결국 요행으로 환난을 면해가는 삶일 뿐이다. 얼마나 솔직담백한 공자의 교훈인가? 여기에 어떤 형이상학적 폭력(metaphysical violence)이나 독단이 개재될 여지가 없다. 소박한 인간의 본래 모습에 대한 예찬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곧다’ ‘굽다’라는 기술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술적 언어에 이미 공자의 가치 판단이 개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자의 인격과, 삶의 자세와, 인간에 대한 신뢰와, 후학들의 삶에 대한 정도에로의 권유를 나타내는 따사로운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아름답도다! 공자의 말씀이여!
정명도가 말하였다: “사람의 생긴 대로의 이치[理]가 본래 곧은[直] 것이다. ‘망(罔)’이라는 것은 곧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부러진 채 살아가는 자는 요행으로 면해갈 뿐이다.”
程子曰: “生理本直. 罔, 不直也, 而亦生者, 幸而免爾.”
명도(明道)의 주석이 명작이다. 본 장의 공자의 말은 다음 장의 말과 내면적 연속성이 있다. 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달하게 되는 인생의 경지를 술(述)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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