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
여러분은 마음이 쓰리도록 아플 때 어떻게 하나요? 넘어져 다리에 상처가 나거나 혹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경우, 우리는 가까운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하나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약간의 상담을 거친 후 우리에게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약을 먹으면 마음의 고통이 조금 완화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약 기운은 곧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또다시 약을 먹어야 할까요? 약을 먹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더라도 분명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할 겁니다. 약에 내성이 생길 테니까 말이죠. 서양의학이 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탁월해도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마저도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찾았던 것은 놀랍게도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불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상이었던 셈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어떻게 불교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일까요?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모두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우리는 불교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전통적으로 불교는 종교의 하나로서 이해되어왔습니다. 물론 종교로서의 성격 때문에 불교를 믿는 신자들 역시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이 모습은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에 나가 하느님과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너는 부처님을 믿고,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이 세상과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 혹은 우리가 죽은 뒤 우리의 행동을 심판할 심판자와 같은 초월적인 신이 없습니다. 사실 ‘부처’라는 말도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붓다(Buddh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영어로 ‘부디즘(Buddhism)’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붓다’라는 말은 ‘깨달은 자’를 의미합니다. 흔히 절에 가보면 가장 크게 만들어져 있는 불상이 하나씩 있기 마련입니다. 이 불상은 깨달음을 처음으로 얻었던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 BC 5632~483?)【고타마 싯다르타는 불교를 창시했으며 석가모니라고도 불린다. ‘석가’라는 것은 싯다르타가 속한 부족의 이름이고, ‘모니’는 성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원래 석가족이 살고 있던 카필라바투라는 작은 도시국가의 왕자였다. 싯다르타가 왕자로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수행을 통해서 얻은 가르침이 바로 네 가지 성스런 진리, 즉 사성제였다. 그의 사상은 『법구경』, 『아함경』 등에 드러나 있다】라는 인물을 본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커다란 불상 옆에 작게 만들어진 수많은 불상이 함께 놓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불교의 가르침을 열었던 싯다르타 이후, 많은 사람이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작은 불상들은 모두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싯다르타와 그를 따라 깨달았던 많은 사람처럼 깨달음을 배우겠다는 의지를 지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그 깨달음을 얻는다면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에서 내려올 때 스님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합장하곤 합니다. “성불(成佛)하십시오!” 여기서 ‘성불’이란 말은 ‘부처[佛]가 된다[成]’는 뜻입니다. 이제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이 조금 궁금하지 않습니까?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은 『법구경(法句經, Dhammpada)』이라는 경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과, 그가 이야기한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에게 귀의하면, 네 가지 진리를 자세히 명상하여 반드시 바른 지혜를 얻으리라. 생사의 ‘고통[苦]’, 이 고통의 원인인 ‘집착[集]’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이미 떠난 ‘소멸[滅]’과 그 소멸로 나아가는 여덟 가지 ‘방법[道]’, 이 네 가지 가르침은 우리를 여러 고통으로부터 건져줄 것이다. 『법구경』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바로 그 유명한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사성제’는 글자 그대로 ‘네 가지[四] 성스러운[聖] 진리[諦]’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고통’, ‘집착’, ‘소멸’, ‘방법’,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정리될 수 있는 네 가르침입니다. 이 네 가지의 가르침은 얼핏 보면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불가피하게 ‘고통’이 찾아오는데, 그 고통의 원인은 바로 ‘집착’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고통은 결과이고, 집착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마음의 집착만 제거하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 상태가 바로 ‘소멸’입니다. 흔히 ‘소멸’을 ‘열반(涅槃)’이라고도 부릅니다. ‘열반’이란 말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것은 ‘니르바나(nirvāṇa)’라는 말을 음역한 것입니다. ‘니르바나’라는 말은 ‘불꽃(vāṇa)’이 ‘꺼진다(nir)’는 의미입니다. 즉 활활 타오르는 집착의 불꽃이 꺼져서 뜨거운 고통의 불빛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죠. 그러면 집착을 어떻게 제거해야 할까요? 바로 ‘방법’이란 것이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여덟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데,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집중[正念], 올바른 참선[正定]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도의 한 작은 도시국가에 살았던 왕자의 깨달음으로부터 기원한 불교는 2000여 년 전에 중국에 들어온 이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하긴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는 방법에 그 누구인들 매료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중국에 동화되어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중국화된 불교 중 가장 중요한 종파 가운데 하나는 선종(禪宗)이라고도 불리는 선불교(禪佛敎)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를 알고 있을 겁니다. 이 절은 우리나라 불교계를 석권하고 있는 조계종(曹溪宗)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조계종도 바로 위에서 말한 선불교에 속하는 종파이지요. 선불교에서는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두(話頭)라고 불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화두라는 방법에는 싯다르타의 팔정도의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라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죠. 우선 깨달은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라고 불리는 어떤 문제를 냅니다. 그러면 제자는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만약 그 문제를 풀게 된다면, 이 제자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두라는 것을 잠시 살펴보면,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두라는 질문은 글자 그대로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풀 수 없게 고안된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paradox)이나 무의미(non-sense)로 가득 차 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황당무계한 질문에 대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집착을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번 도전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럼 여러분을 열반과 해탈로 이끌지도 모를 화두 하나를 제가 먼저 던져보겠습니다. 한번 마음속으로 풀어보세요.
큰스님이 몽둥이를 들고 제자의 머리 위로 흔들며 말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고, 이 몽둥이가 없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다. 만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너는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느냐, 없느냐?”
제가 큰스님이고, 여러분이 제자라고 해봅시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큰스님으로부터 몽둥이세례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지체하지 말고 빨리 대답해야 합니다. 가령 여러분이 침묵만 지키고 있어도 제가 가진 몽둥이는 여러분의 머리를 강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아마 바로 대답하기는 매우 힘들 겁니다. 그럼 잠시 화두 푸는 것을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요. 아직 우리는 열반에 들 준비가 덜 된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고통으로 몰고 가는 집착이란 것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생하는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화두에 대해서는 이번 장 말미에서 저와 같이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집착의 메커니즘
어떤 젊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녀는 옆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갓 돌이 지난 귀여운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천사입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설마 하며 아이의 몸을 만져 보니,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그녀의 천사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아이를 화장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시장에 갔다가 돌아와 문을 열고 장난스런 목소리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왕자님, 많이 기다렸지. 엄마 왔네.” 그러나 거실 한쪽의 조그만 상 위에 있는 아이의 영정과 국화꽃을 보고, 그녀는 허물어지듯이 주저앉고 맙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맑은 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세상의 어느 고통을 이 젊은 엄마의 고통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놀이터에 나가 노는 아이들만 봐도 마음이 쓰리도록 아픕니다. 모두 태웠다고 생각했는데, 청소를 하다가 아이가 신었던 작고 앙증맞은 양말 하나를 발견하고는 다시 울음을 터뜨립니다.
자식을 잃은 그녀의 고통은 과연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이 죽었고, 그래서 지금은 그녀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일까요? 그런데 사정은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녀의 진정한 고통은 오히려 그녀 마음속에 아직도 자신의 아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는 아들을 떠나보냈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아들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음속의 아들과 마음 바깥의 아들! 마음 바깥에서는 분명 아들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아들이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띠며 웃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엄청난 차이, 이 엄청난 간극이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크나큰 간극은 그녀가 마음속의 아들을 떠나보내지 않았기에 생긴 것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부처가 말한 ‘집착’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집착’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제 어떤 모양을 띠게 될까요?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병적인 수준에까지 이른 집착의 사례를 하나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어느 날 아침 너무나 애석하게도 그녀의 아이가 죽은 채로 발견됩니다. 그러나 앞의 경우와는 달리 이 엄마는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생활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죽은 아이가 살아 있다고, 그리고 지금 잠시 침대에 누워 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매번 아이가 밥을 먹을 때가 되면, 아이가 먹을 밥을 정성스레 준비해 가져다주곤 합니다. 물론 이제 썩어가면서 악취를 풍기는 아이가 그것을 먹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는 해맑은 미소로 밥상을 들고 나가며 말하곤 합니다. “먹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그럼 저녁때는 네가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만들어 줄게.” 아이를 잃은 엄마의 이런 병적인 집착은 정상적인 집착에 비해 너무나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서늘한 공포심마저 들게 합니다. 이 경우 엄마는 마음속의 아이뿐만 아니라 마음 바깥의 아이도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마음속의 아이와 마음 바깥의 아이 사이의 간극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사랑스런 내 아이는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면, 내 마음 바깥에도 항상 있어야 돼!’
방금 우리는 집착의 두 가지 사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철학적으로 마음의 고통과 집착의 메커니즘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베르그손(H. Bergson, 1859~1941)【베르그손은 당대 자연과학의 업적을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거대한 생명과 생성의 형이상학을 완성했다. 그에 따르면 생명현상은 우리에게 ‘창조적 진화‘라는 놀라운 과정을 보여주며, 유기체의 발생 과정은 개체 차원에서나 종의 차원에서도 생명의 약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주요 저서로 『창조적 진화』, 『물질과 기억』, 『사유와 운동』 등이 있다】이란 철학자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봅시다. “없음은 있음보다 하나가 더 있다”는 그의 난해해 보이는 주장은 집착의 본질을 성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기억이나 기대를 가지지 않은 존재들은 결코 ‘비어 있음’ 이나 ‘없음’과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단지 있는 것과 지각되는 것만을 표현할 것이다. 그런데 있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이러저런 사물의 현존이지 결코 어떤 것이든 그것의 부재는 아니다. 기억하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만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 아마 그는 어떤 대상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것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대상을 발견한다. 이때 그는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 앞에서 원래의 기억을 상기하게 되고, 자신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자기는 ‘없음’과 조우했다고 말하게 된다. (……)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왜나하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의 관념에 더하여, 다른 것에 의해 그 대상이 없어졌다는 표상까지 합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
베르그손은 ‘집착’이란 현상이 인간에게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가지고 있고, 또 그 기억에 따라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저는 오후 3시에 어떤 친구를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불행히도 갑자기 일이 생겨 10분 정도 늦게 그 카페에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만나기로 한 그 친구가 그곳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 없네.’ 베르그손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무엇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기억과 기대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도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것을 ‘기억’할 수 있었고, 또 그 때문에 약속 시간보다 이미 십여 분이 지난 그 시간에 카페에 친구가 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가 없네’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말이죠. 이런 저의 생각을 베르그손의 말로 풀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나의 기억이나 기대에 따르면 그 친구는 지금 카페에 있어야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이곳에 없네.’
만약 제가 친구와의 약속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물론 친구와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그가 약속 장소에 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제가 친구와의 약속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우연히 그 카페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까처럼 저는 ‘친구가 없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 이런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해야겠죠. 그냥 저는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없음’ 혹은 ‘무(無)’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기억하거나 기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없음은 있음보다 하나가 더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친구가 없네’라는 생각은 결국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 없네’라는 생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베르그손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마음속에 있다’는 사태와 ‘마음 바깥에 있다’는 사태 사이의 차이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친구가 없네’라는 생각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는 그가 있어야만 하지만, 내 마음 바깥에서는 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효 스님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만약 우리가 약속한 친구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우리의 마음이 오지 않은 친구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 와 있어야만 하는 친구가 지금 내 생각 바깥에서는 없다는 것이죠. 결국 마음의 고통은 내 마음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 내 마음 바깥에 없을 때, 전자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경우 발생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카페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냅니까? 차라리 그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을 지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물론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 자체를 완전히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생각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죠. 만약 마음으로부터 그런 생각을 지울 수만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아주 자그마한 평화와 행복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깊은 커피의 향기에 빠져볼 수도, 혹은 은은한 재즈 음률에 몸을 맡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렬해진다면, 이런 작은 행복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항상 불교는 마음이 왜 고통에 사로잡히는지 진지하게 숙고합니다. 싯다르타는 바로 집착이 마음을 고통에 빠뜨리는 원인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집착만 제거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고통을 없앨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생각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베르그손의 이야기처럼 집착은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피한 메커니즘으로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제거하려면 우리는 초인적인 의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마음속에 가득한데, 그 아이는 이미 죽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마음에서 그 아이를 지워버릴 수 없을 때, 아이의 엄마는 고통으로 흐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속에서 그 아이를 정말 떠나보낸다면, 그녀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녀의 고통은 조금씩이나마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전체 인생에 있어 단지 아이의 죽음만이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일까요?
그녀는 살아가는 동안 너무나 많은 사건과 마주칠 것입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집착하다보면, 그녀의 인생은 아마 견디기 어려운 온갖 고통으로 점철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고해(苦海)와도 같다고 하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즉 우리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불교는 단순히 특정한 집착만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 자체를 없애서 고통의 바다 자체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구도자들, 바로 스님들은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원효(元曉, 617~686)【원효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끼친 불교 이론가이다. ‘논쟁을 조화시키려는’ 사유 경향 때문에 그의 사상은 ‘화쟁’사상이라고 이야기된다. 그것은 그가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중관불교와 ‘마음만은 존재한다’는 유식불교를, 정치적으로는 평등을 강조하는 종교 논리와 차별을 긍정하는 국가 논리를 종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주요 저서로 『십문화쟁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이 있다】 스님을 알 겁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진실로 깨달았다고 칭송되는 분이죠. 그래서 원효 스님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깨달음, 즉 집착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잠시 엿볼 생각입니다.
옛날 동국의 원효 법사와 의상 법사 두 분이 함께 스승을 찾아 당나라로 왔다가 밤이 되어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잤다. 원효 법사가 갈증으로 물 생각이 나던 참에 마침 그의 곁에 물이 고여 있어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맛이 좋았다. 다음날 보니, 그것은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그때 마음이 불편하고 토할 것 같았는데, 그 순간 원효 법사는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나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지 나의 마음이고[三界唯心]’ ‘모든 대상이 단지 나의 의식이다[萬法唯識]’라고 하셨던 것을 들었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마침내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였다. 『종경록(宗鏡錄)』
이 이야기는 연수(延壽, 904~975)라는 중국 스님이 지은 『종경록」이란 책에 실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원효 스님과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 중 가장 유명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지요. 원효 스님은 의상(義湘, 625~702) 스님과 함께 불교를 더 깊게 배우기 위해 중국 당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 잘 곳을 찾지 못하여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둑한 밤이었으니 두 스님은 그곳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어쨌든 그곳에서 원효 스님은 오랜 여정에 지친 몸을 눕히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스님은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마침 옆에 고여 있던 물을 발견한 스님은 그 물을 달게 마시고 갈증을 해소합니다.
그런데 날이 밝자 갑자기 모든 상황이 달라집니다. 어제 몸을 눕혔던 곳은 무덤이었으며, 자신이 달게 마신 물은 시체가 썩어 고여 있던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토악질을 참을 수 없던 그때, 원효 스님은 불교의 진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스님은 당나라를 떠나 다시 신라로 돌아옵니다. 더 이상 당나라에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지 나의 마음이고, 모든 대상이 단지 나의 의식이다.” 원효 스님의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원효 스님이 ‘나의 마음’이나 ‘나의 의식’만이 존재하고 그 외의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서양철학사에서는 이런 입장을 ‘절대적 관념론(aubsolute idealism)’【절대적 관념론은 헤겔의 사변철학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이다. 그는 자신의 변증법적 철학을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불렀다. 세계와 역사가 절대정신의 변증법적인 자기 전개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헤겔에게 있어 세계나 역사 속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모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절대정신일 뿐이기 때문이다】이라고 말하고, 그 대표자로 헤겔을 지목합니다. 원효 스님은 과연 헤겔과 같은 관념론을 표방했던 것일까요?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스님의 다음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물이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해주었다는 생각, 그리고 시체가 썩은 물이라서 역겹다는 생각은 오직 스님의 마음속에만 존재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물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았죠.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스님의 마음뿐이었습니다. 원효 스님의 깨달음은 오히려 마음 바깥의 사물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나와 무관하게 그대로 존재한다는 통찰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관념론’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 경험론(radical empiricism)’【근본적 경험론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책, 『근본적 경험론에 입각한 논고들』로부터 유래한 개념이다. 이 책에서 제임스는 모든 철학적인 논의는 인간의 경험이란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도 인간의 경험이란 지평을 매개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모든 것은 나의 마음이나 의식이다’라고 말하면서 스님이 의도했던 것은 사실 ‘없음이란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베르그손의 생각과 공명하는 것입니다. 물이 시원하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고, 썩은 물이라서 토할 것 같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죠. 이런 두 가지 느낌은 단지 내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너무 목이 마를 때 우리는 이전에 마셨던 시원한 물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즉 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덤 속의 물을 찾아서 마셨을 때 원효 스님은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이 토할 것 같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님은 어젯밤 시원하게 마신 물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시원한 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체가 썩어서 생긴 물이라는 것을 알고 토할 것 같았던 것입니다. 시원함과 토할 것 같음.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두 마음의 집착으로부터 유래했고 마음 바깥의 사태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점, 바로 이런 통찰이 원효 스님이 얻었던 깨달음의 핵심인 셈입니다.
보통 불교에서는 원효 스님이 느꼈던 두 가지 감정, 즉 ‘물이 시원하다’는 감정과 ‘토할 것 같다’는 감정을 ‘공(空)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원래 공【공이란 개념은 불교에서 ‘문제되는 X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영혼과 같은 실체가 없다고 할 때 불교는 ’사람은 공하다’, 즉 ‘인공(人空)’이라고 표현한다】이란 말은 순야타(Śūnyatā)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옮긴 것인데, 이 말은 ‘무의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감정은 마음이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이죠. 실제 마음 바깥의 사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공이란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마음 바깥으로 투사하였다는 것을 자각하는 체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불교에는 진여(眞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도 ‘타타타(tathatā)’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힘든 말이죠. 어떤 집착도 없이, 마음 속에 어떤 선입견도 가지지 않고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흔히 ‘타타타’라는 말을 ‘여실(如實)’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실답다’. 즉 ‘실제와 같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었지만, 그 아이를 가슴속에 담고 있는 젊은 엄마는 고통으로 눈물의 나날을 보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그녀를 고통으로부터 건져줄 수 있을까요?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위로하면 그녀는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이 엄마, 아이는 지금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미소 짓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말로도 쉽게 그녀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려고 했다면, 도대체 왜 그 아이를 제게 주셨나요?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하느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예전에 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어느 불교 경전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이를 잃은 어느 여인의 고통을 씻어주기 위해 싯다르타가 사용했던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밧티(Sāvatthī) 성에 키사 고타미(Kisā Gotamī)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결혼 후 심한 학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들을 하나 낳은 후 사람들은 그녀를 칭찬하며 더 이상 학대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뛰어놀 수 있을 만큼 자란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비탄에 잠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등에 업고 약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부처님을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고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죽은 사람이 없는 집안에서 겨자씨를 얻어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여인은 온종일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하려고 했지만 단 한 톨의 겨자씨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비로소 여인은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장로니게(長老尼偈, Therīgāthā)』
「겨자씨 이야기」로도 유명한 이 이야기는 흔히 『법구경』에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장로니게』라는 남방 불교의 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경전 본문도 아니고, 이 경전을 해석했던 다르마팔라(Dharmapāla)라는 스님의 주석에 등장하는 이야기이죠. 이 스님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호법(護法)이라고 알려져 있는 유명한 불교 이론가입니다. 여기서 ‘호법’이란 이름은 ‘다르마팔라’를 의역한 말이지요. 아쉽게도 고대 스리랑카 언어인 팔리어로 쓰인 『장로니게』라는 경전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어로 된 번역본만 있을 뿐이지요. 「겨자씨 이야기」는 키사 고타미라는 여인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키사(Kissa)’라는 말이 말라깽이를 뜻하니까. 이 여인은 ‘말라깽이 고타미(gotami)’라고 불렸던 여인이었을 겁니다. 이 ‘말라깽이 여인’은 너무나 많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게 되자, 그녀는 더 이상 학대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녀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게 해준 아들은 그녀에게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문제는 바로 이 소중한 아들이 어린 나이에 결국 병들어 죽었다는 데 있습니다.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말라깽이 고타미는 아들의 시신을 업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이 불쌍한 여인은 다르타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아마 싯다르타가 고통의 기원과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얻었다는 소문을 그녀도 들었겠지요. 그런데 그는 이 여인에게 어떤 가르침도 주질 않습니다. 가르침을 주기는커녕 불가능한 요구를 할 뿐입니다. 죽음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집안이 있다면, 그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오라고 했으니까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고통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이 세상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집안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결국 싯다르타는 잔인하게도 불쌍한 여인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도록 만들어주었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방법과는 대조적으로 싯다르타의 방법에는 잔인한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싯다르타의 방법은 잔인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바로 그녀가 이미 죽은 아이를 마음속에 품고서 떠나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아이를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집착을 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 고통에 빠진 것도 그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집착 때문에 생긴 고통이기에, 그녀 스스로 집착을 끊을 수 있어야만 고통이 해소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임종할 때 싯다르타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 가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어쨌든 그녀는 이제 있는 그대로 죽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 슬프게도 그 누구도 죽음을 벗어날 수는 없구나.’ 이런 과정을, 그것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체험하면서 그녀는 서서히, 아주 천천히 마음속에 붙잡아두었던 그녀의 사랑스런 아이와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고통이 아이가 죽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죽은 아이에 집착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집착 없이 살아가기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여러분에게 화두 하나를 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그때 저는 여러분께 약속했습니다. 이 화두만 풀 수 있다면 여러분은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화두를 푼 분도 있겠지만,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란 책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지요. 이 이야기는 깨달음, 즉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님 같지도 않던 스님 한 분이 단하(丹霞)라는 스님으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날이 저물자 단하 스님은 하룻밤을 묵기 위해 혜림사라는 절에 찾아갔다. 그러나 이 절을 홀로 지키고 있던 스님은 단하 스님을 차가운 본당 마룻바닥에서 자게 했다. 잠을 청하려고 하다가 이 스님은 단하 스님이 있던 본당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곳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고 보니, 단하 스님이 나무로 만든 불상을 쪼개서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스님은 단하
스님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스님이란 사람이 불상을 태울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단하 스님은 태연하게 말했다.
“불상에서 사리가 나오는가 보려고 태웠습니다.”
그 스님은 단하 스님에게 역정을 내며 다시 말했다.
“아니, 나무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다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듣고 단하 스님은 환한 비소를 지었다. 그 순간 혜림사의 스님은 크게 깨닫게 되었다. 『경덕전등록』
자비의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혜림사의 스님이 도대체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요? 이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을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이 불상은 싯다르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매일 정성스럽게 이 불상을 닦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과이기까지 했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 불상을 단하 스님이란 사람이 불태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깜짝 놀라서 단하 스님에게 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단하 스님은 능청스럽게도 사리를 찾으려고 태웠다는 말을 건넵니다. 불교에서는 화장이라는 장례법을 시행합니다. 그런데 깨친 스님들을 화장하면, 타고 남은 재 속에서 작고 반짝이는 물체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통 ‘사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리를 찾으려고 불태웠다는 단하 스님의 말에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데가 있습니다. 사실 나무 불상을 진짜 싯다르타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혜림사의 스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상을 태워서 사리를 찾는 일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단하 스님이 아니라 이 혜림사의 스님이 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혜림사의 스님은 오히려 화를 냅니다. 나무에서 무슨 사리가 나올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말이죠. 이 말 역시 참으로 아이러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 말이야말로 그가 아니라 단하 스님이 했어야 할 말이기 때문입니다. 혜림사의 스님은 불상을 부처라고 집착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사실은 그것이 나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하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그는 ‘있는 그대로’ 보게 된 것이죠. 집착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앞서 꺼냈던 화두를 풀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직접 답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큰스님이 몽둥이를 들고 제자의 머리 위로 흔들며 말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고, 이 몽둥이가 없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다. 만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너는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느냐, 없느냐?”
이 화두의 묘미는 제자가 이 질문을 듣자마자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처럼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엄청나게 몽둥이세례를 당하게 되겠죠. 자, 제가 흔들고 있는 몽둥이가 보이죠. “이 몽둥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혹시 불교에 대해 귀동냥이라도 한 분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몽둥이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있다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등장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을 흉내낸 것이죠. 이 말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런 대답을 했다면, 저는 여러분을 여섯 대나 후려칠 것입니다. 몽둥이에 대해 여러분은 ‘있다’는 말을 3번, ‘없다’는 말을 이미 3번이나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두의 답은 무엇일까요? 답을 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몽둥이로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화두가 던져지자마자 정확한 답을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깨달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화두의 대답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중 몇 가지만 제시해볼까요? “바람이 시원합니다.” “새가 울고 있네요.” “하늘이 푸릅니다.” “개울 소리가 맑습니다.” 화두는 사실 아주 교묘하게 짜여 있었던 셈입니다. 몽둥이를 등장시킴으로써 여러분으로 하여금 몽둥이에 집착하도록 만들어버렸으니까요. 만일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몽둥이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있다’고 해도 맞고 ‘없다’고 해도 맞습니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침묵인데, 침묵하여도 우리는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셈이죠. 그래서 이 화두에서 중요한 것은 있음도, 없음도, 그리고 침묵도 아닙니다. 오히려 핵심은 우리가 몽둥이에 집착하느냐, 집착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겠죠. 만약 몽둥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깨달은 자라면, 우리는 “하늘이 푸릅니다”라는 생각지 못한 말로 이 딜레마로부터 가볍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몽둥이에 집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몽둥이가 아닌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하늘도, 구름도, 새소리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게 될 테니까요. 마음이 몽둥이만을 담아두려고 하는 것이 바로 몽둥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몽둥이를 떠나보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 구름, 새소리 등 온갖 존재하는 것을 담아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원효 스님의 말처럼 집착이란 결국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속에 갇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집착은 여러분의 삶을 유아론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아름답고 젊었던 자신의 외모에 집착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자신의 업적이나 성적에 집착하고 있지 않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떠나버린 사랑에 집착하고 있지 않나요? 혹은 돈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수많은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고통에 빠져들고 우리의 인생은 시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집착을 버리고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는 반드시 나와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고통에 빠진 우울한 주체가 아니라, 다른 것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즐거운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중한 행복은 유아론적이지 않은 곳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더 읽을 책들
니니안 스마트, 『종교와 세계관』 (김윤성 옮김, 서울: 이학사, 2000)
저자는 자신의 관심사가 ‘세상을 움직이는 믿음과 감정의 힘을 지닌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기독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를 흥미진진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를 포함한 여러 다양한 종교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함의는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서울: 민음사, 2002)
동양에서는 불교가 마음의 고통을 다루었다면, 서양에서는 정신분석학이 그 임무를 자임했습니다. 이 책은 풍부한 임상적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학문인지를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즈키 다이세츠, 『아홉 마당으로 풀어쓴 선(禪)』 (심재룡 옮김, 서울: 현음사, 1986)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한 방법으로 화두라는 방법을 채택했던 불교 종파가 바로 선불교입니다. 난해한 선불교의 세계가 이 책으로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특히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융(C. G. Jung)의 서문은 불교와 정신분석학 사이의 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루네 E. A. 요한슨, 『불교심리학』 (박태섭 옮김, 서울: 시공사, 1996)
마음의 구체적인 현상에 주목하면서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어떻게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드는지를 심리학적 시선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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