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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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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노예의 길에서 주인의 길로

 

 

주체는 기본적으로 주인과 자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주체와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은 아마도 노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여기서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의 사례를 통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가장 지속적이었던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남녀 차별, 특히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지배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남성 우월주의를 흔히 가부장제라고 부릅니다. 다행히도 가부장제가 하나의 낡은 관습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성이 노예에서 주인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지요. 이 점에서 여성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가 가진 함의를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통 사회에서 여성이 억압받았던 흔적들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흔적 중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 특유의 명명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이름, 강신주(姜信珠)를 예로 들어보도록 하지요. 이것은 우리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사용하고 있는 전형적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이름 속에 가부장제의 관습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자세히 한번 살펴봅시다. 강이란 성은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나아가 우리 시조까지 모든 남자가 공유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란 글자는 저와 동일한 서열에 있는 모든 종친이 공유하는 등급을 표시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이라는 성을 쓰고 신이라는 항렬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예를 들어 강신우라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저와 같은 항렬로서 형제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주()라는 글자는 단지 같은 항렬의 사람들로부터 저를 식별해주는 단순한 구별 기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전히 널리 사용되는 우리의 명명법에는 가부장제의 논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이름은 그 자체가 바로 움직이는 족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전통적인 명명법에서 흥미로운 것은, 제가 족보를 펼쳐 보지 않는 한 증조할머니부터는 이름은 고사하고 그녀들의 성씨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이름에는 여자의 성씨와 이름, 다시 말해 여성의 고유한 존재 자체가 철저히 망각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우리 여성이 결혼 후에도 자신의 고유한 성씨를 유지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고유한 성씨가 아니라 남성인 그녀 아버지의 성씨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의 이름에는 이처럼 여성의 흔적이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우연의 장난일까요? 그러나 꼼꼼히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사유 방식을 찾아보면, 이것은 그들의 뿌리 깊은 인간 이해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유명했던 정철(鄭澈, 1536~1593)훈민가(訓民歌)첫 번째 구절입니다.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가

하늘 ᄀᆞᄐᆞᆫ ᄀᆞ 없ᄉᆞᆫ 은덕(恩德) 어듸다혀 갑ᄉᆞ오리. 훈민가

 

 

이 시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니, 부모님의 낳아주신 은혜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취지로 쓰인 것입니다.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정철은 백성들에게 효도의 당연함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님과 어머님의 은혜를 모두 칭송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유학 지식인들의 특이한 생물학적 관념입니다. ‘아버님이 나를 낳으셨다면, 어머님은 나를 기르셨다[父生我身 母鞠吾身]!’ 여러분은 아마 제가 지금 정철의 시를 잘못 인용하고 있다고 순간적으로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아버님이 나를 낳으실 수 있겠습니까?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실 여성인 어머님이 나를 낳으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결코 잘못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조선 시대 사람들은 자식을 낳는 것은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단지 자식을 자궁 안이나 자궁 바깥에서 기르는 역할을 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의 논리적 귀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개체를 낳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버지, 즉 남성에게 귀속되어 있다고 보는 관념입니다.

 

생식에 있어서 남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런 관념은 기본적으로 식물의 성장과 발육에 대한 관찰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보리라는 식물의 생장을 결정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결국 보리의 씨앗일 것입니다. 물론 동일한 보리 씨앗이더라도 어떤 땅에서는 잘 자랄 수 있지만, 다른 땅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잘 자랐다면 그것은 항상 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씨앗이 보리 씨앗이니 결코 다른 식물로 자랄 수는 없겠지요. 보리라는 식물의 씨앗이 그 개체의 고유성을 결정하는 것처럼, 인간에게 있어서는 남성의 씨앗이 한 개체의 중요한 특성을 결정한다는 논리이지요. 그런데 역설적인 점은 이런 식물학적 상상력이 함축하는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가령 보리 씨앗을 심었는데도 보리로서 제대로 자라나지 않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제 전적으로 땅 때문입니다. 땅이 척박하거나 양육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보리 씨앗이 보리로 자라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왜 조선 시대 양반들이 후손이 생기지 않는 책임을 전적으로 부인에게만 돌렸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땅, 즉 여성 잘못이라는 인식 때문이지요. 이로부터 첩실 제도나 심하면 씨받이 같은 제도까지 생겨났던 것입니다. 정부인이라는 땅이 척박해서 남성의 씨앗이 자라지 않으므로, 땅을 바꾸어야 한다는 발상입니다.

 

 

 

 

 생식에 관한 이와 같은 유학자들의 식물학적 상상력은, 후손들의 성씨가 당연히 남성의 것을 따라야만 한다는 쪽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이런 식물학적 상상력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물이 어떻게 새로운 개체를 낳는 지 배우고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우리 인간의 염색체 수는 46개입니다.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는 각각 이 숫자의 절반인 23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서 하나의 완전한 수정체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수정체는 23+23, 46개의 염색체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 수정체가 자궁 속에서 자라서 마침내 새로운 개체로 이 세계에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생식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됩니다. 수정이 이루어질 때 수억 마리의 정자들은 하나의 난자에게 간택되기 위해 무한 경쟁에 돌입하고, 그중 한 마리만이 난자에 의해 선택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생식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할 뿐만 아니라, 어느 측면에서 보면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더 우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초적인 과학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유학자들이 지지하는 가부장제의 식물학적 상상력은 어떤 근거도 없는 허구적 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부장제를 생물학적 측면에서까지 주장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기초적인 과학 상식부터 부정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누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허구적 관념을 신봉했던 전통 유학 사회에서 가장 암울했던 사람들은 역시 여성 자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에게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따라야 했던 철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2장에서도 살펴본 삼종지도입니다. 이 삼종지도의 논리는 오늘날 호주제(戶主制)라는 제도 속에 살아 있습니다. 여성은 자신의 손자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손자가 아직 정도 떼지 못한 갓난아이라 하더라도 그 손자가 바로 남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를 집의 주인[戶主]’으로 관념상 떠받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 손자의 형 그리고 아버지, 나아가 심지어 할아버지까지도 모두 생존하지 않는 경우일 것입니다. 삼종지도란 말 그대로 조선 시대 여성이면 누구나 예외 없이 반드시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길을 따라간 여성에게 조선 시대는 열녀(烈女)’라는 호칭과 더불어 열녀문을 하사했고, 동시에 그 가문이나 마을에 세금 감면 등의 경제적 혜택까지 부여했다고 합니다. 반면 이 길을 벗어나면 어느 여성도 정숙한 여성에게 주어지는 그럴듯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삼종지도가 여성의 뜻과는 무관하게 모든 여성 일반에게 가해진 강압적인 윤리 원칙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삼종지도는 여성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학적 가부장제에 입각하여 남성에 의해 철저히 강제되었다는 것이지요. 어렸을 때부터 골수에 사무치도록 이 관념에 대해 교육받으며 자란 여성에게 삼종지도는 마치 제2의 천성,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자아(superego)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부당하다며 거부하려 했던 그 당시 여성에게는 마치 자아가 파괴되는 듯한 위험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자아의 비극적인 분열 현상이지요. 조선 시대를 포함한 전근대사회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인격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습니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개인 본인이 선택할 수 없었던 조건에 의해 그의 삶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근대사회에서 정말 중요했던 것은 운 좋게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불행히도 백정의 집안에 태어났는지, 혹은 운 좋게 남성으로 태어났는지, 아니면 불행히도 여성으로 태어났는지의 여부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전근대사회의 좋은 점을 칭송하는 사람이라도 그 자신이 백정의 집안에서, 그것도 비천한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살게 되었을 고통스런 삶에 대해서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합니다. 전근대사회는 얼핏 보면 마치 동방예의지국이었던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진정으로 윤리적인 사회였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개인의 자유로운 인격과 판단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오히려 윤리와 담을 쌓고 있는 사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 길들여진 애완견이 사람이 부과한 규칙을 제대로 준수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개를 윤리적인 개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문제입니다. 어떤 인격적 반성이나 자율적 선택을 수반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인간의 예절이나 윤리는, 결국 애완견의 타율적 윤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200532일 우리나라에서 호주제가 법률적으로 철폐된 것은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법적으로나마 여성이 타율적이지 않을 수 있는 기초적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고, 또한 조선 시대 500년을 내려오던 유학적 가부장제가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성이 하나의 인격으로서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영위해가지 못한다면, 호주제 폐지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 도처에는 그리고 여성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유학적 가부장제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여성은 제도에서 보장하는 법률적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도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철저하게 주체로서 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문열의 칸트적 선택

 

 

여성이 주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여성이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치명적인 문제 제기를 했던 적이 있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유아기 때의 역사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생존과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요령을 배웁니다. 만약 부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무척 불편해질 테니까요. 가령 어린아이가 김치 먹는 법을 배운다고 해봅시다. 밍밍한 모유나 분유만 먹던 아이에게 마늘과 고추로 버무려진 김치는 얼마나 불쾌하고 자극적인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이는 결국 김치를 먹게 됩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어린아이는 자신이 그것을 계속 먹지 않으면 어머니가 싫어할 것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는 부모의 가치 태도를 내면화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초자아라고 말한 것이지요. 나중에 이 아이가 자라나서 어느 식당에 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고민 끝에 김치찌개를 선택합니다. 분명 그는 자유롭게 김치 음식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는 그 사람의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제약적인 것인지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칭찬 때문에 먹기 시작했던 것을 이제는 자신이 좋아서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이의 부모조차도 사실 공동체의 규칙을 따르고 있기에, 어린아이가 내면화하여 구성한 초자아역시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작동된다는 점입니다. 초자아와 관련된 프로이트의 통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겉으로는 일체의 간섭 없이 행해진 것처럼 보이는 자유로운 행위의 이면에 사실은 더 심오하고 근본적인 간섭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결정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초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만 여성은 진정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이 맥락에서 우리는 이문열(1948~)이문열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소설 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한 우리 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우리의 근ㆍ현대사를 아우르는 문제들, 즉 종교, 분단, 이데올로기, 페미니즘 등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선택등이 있다선택이란 소설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소설을 통해 이문열은 페미니스트의 역사 이해가 왜곡된 것임을 은근히 비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 사회의 여성들이 페미니스트의 주장처럼 그렇게 노예로만 살아온 것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는 자신의 직계 조상, 즉 장()씨 부인이라는 한 여성의 사례를 통해 조선 시대 여성들도 나름대로의 주체적 삶을 영위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다음은 소설 속 주인공 장씨 부인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어차피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할 수 없다면, 결국 어느 한쪽을 우선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면, 내 선택은 바뀌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무엇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해 늦가을 마침내 어머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을 때 나는 또렷이 아뢸 수 있었다. “시 짓고 글 쓰는 일은 여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이제부터 안채와 부엌을 떠나지 않고 여자의 본업을 배우겠습니다.” 실로 그랬다. 나는 그날로 지난날의 선택을 감연히 버렸다. 선택

 

 

소설에 따르면 어렸을 때 장씨 부인은 다른 양반댁 규수들과는 달리 시 짓고 글 쓰는 일을 배우게 됩니다. 그녀는 사실 이것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녀 아버지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따라서 그녀가 시를 짓고 글을 쓰게 된 것은 그녀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해야 옳겠지요. 이제 그녀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남성들이야 문장을 공부해서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다른 남성들에 비해 훌륭하게 문장을 익혔다 하더라도, 조선 사회는 그녀의 학문적 역량을 포용할 수 없었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짐짓 비장한 어투로 이야기합니다. “시 짓고 글 쓰는 일은 여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이제부터 안채와 부엌을 떠나지 않고 여자의 본업을 배우겠습니다.”

 

 

 

 

 장씨 부인의 선택을 이문열은 마치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단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그 누구도 그녀에게 문장 배우기를 포기하고 가사를 배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장씨 부인의 두 번째 선택이 자율적 선택이라는 이문열의 착각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율의 윤리학을 표방했던 칸트칸트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도 철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상가이다. 그는 경험을 강조했던 경험론적 전통과 이성을 강조했던 합리론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종합한다. 또 삼대 비판서를 씀으로써 칸트는 과학(), 윤리(), 예술()이란 세 영역을 성공적으로 분리해낸다. 주요 저서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도덕형이상학원론등이 있다의 논의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의 자율의 윤리학은 장씨 부인의 선택 혹은 이문열의 착각과 유사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네 의지의 준칙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입법자로서 간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

도덕형이상학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어떤 사태를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자율적으로 결정해야만 합니다. 칸트는 우리 자신이 마치 보편적 입법자가 된 것처럼 행위를 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허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정언명령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그 누구도 모순을 지적할 수 없는 도덕법칙의 명령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정언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가언명령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 명령이다. 가령 만일 네가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면, 너는 하루에 8시간씩 공부해야만 한다는 것이 가언명령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무조건적인 도덕 명령입니다. 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활동을 입법 활동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입법 활동이란 사실 모종의 공동체를 전제해야만 의미를 갖는 활동입니다. 국회에서의 입법 활동이란 흔히 다수 국민의 여론으로 정당화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보편적 입법의 원리를 통해 구성된 칸트의 도덕법칙이란 것도 그의 순진한 생각처럼 완전히 자율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한 보편성이란 대개 공동체의 규칙과 암암리에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정언명령이 자유로운 주체의 고독한 내면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이제 우리는 장씨의 선택이 칸트의 정언명령을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도 자신이 보편적 입법자인 것처럼 공부를 포기하고 가사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제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자신의 도덕법칙을 만듭니다.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무엇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장씨 부인의 두 번째 선택을 자율적 선택이라고 이문열이 생각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문열은 직ㆍ간접적으로 칸트적인 소설가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는 장씨 부인의 선택을 너무 순진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씨 부인이 만든 도덕법칙은 어떤 공동체와도 무관한 순수한 것이었을까요? 혹은 모든 시대의 여성에게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것이었을까요?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장씨 부인의 선택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고, 이문열이란 소설가의 착각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장씨 부인의 두 번째 선택에서 여러분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선택에 앞서 그녀가 숙고해서 만든 도덕법칙이란 것은 결국 조선 시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부여된 역할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끝내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법칙이었다는 점에서,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진정한 선택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스스로 행위 법칙을 만든 것처럼 허영을 부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이전에 자신이 선택했던 것을 이제는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일종의 종교적 고별 의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점에서 그녀의 허영은 조선 시대 여성의 왜곡된 삶에 대한 하나의 초상화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녀가 애써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이미 조선 시대에 통용되던 가치 체계, 즉 자신에게 내재한 초자아의 명령을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녀의 선택이 비록 자율적 선택의 모습을 띠더라도 그것은 결국 강요된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첫 번째 선택, 즉 남성과 마찬가지로 공부를 하려고 했던 선택이야말로 더 비범했던 것이 아닐까요? 비록 그것이 그녀에게 극심한 갈등과 고뇌를 제공했을지라도 말입니다. 어쨌든 두 번째 선택으로 그녀는 비범한 삶을 마무리하고, 평범한 그러나 고상하다고 인정받을 만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그녀는 조선 시대 양반집 여성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니체가 칸트를 공격했던 이유

 

 

칸트에 따르면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도덕법칙을 구성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 즉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도덕 주체야말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을 스스로 따르는 것은, 분명 타인이 만든 도덕법칙을 타율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이 초자아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겁니다. ‘자율을 가장한 타율혹은 자발적 복종이란 기이한 논리가 출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씨 부인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자아의 명령은 나의 내면에서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작동합니다. 따라서 초자아의 명령을 듣는 것은 나의 자율적인 명령을 듣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장씨 부인은 자신의 두 번째 선택을 자율적인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장씨 부인의 선택이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의 명령에 대한 자발적 복종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두 번째 선택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은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자아란 부모를 매개로 해서 공동체의 규칙이 우리 내면에 내재화된 것이 아닙니까? 그녀는 이제 내면화된 어머니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바깥에 있는 실제 어머니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국 내면화된 어머니와 바깥의 실제 어머니가 화해를 한 셈이지요. 어떤 구체적인 외적 강요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간섭과 강요의 흔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주체가 되려고 할 때, 외적인 간섭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체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를 거부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주체에 대한 칸트의 논의를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공격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느 시대든지 무리를 이룬 인간 집단 역시 존재했으며 (씨족 연합, 공동체, 부족, 민족, 국가, 교회), 언제나 소수의 명령하는 자에 비해 복종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복종이란 지금까지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잘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훈련되고 훈육되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제 당연히 각 개인은 평균적으로 일종의 형식적인 양심으로서, "너는 어떤 것을 무조건 해야만 하고, 또 어떤 것을 무조건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는 것, 즉 간단히 말해 너는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고자 하는 욕구를 타고났다고 전제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욕구는 항상 만족하고자 하며 형식을 내용으로 채우고자 한다. 이때 그것은 자신의 강함, 성급함, 긴장에 따라 왕성한 식욕처럼 닥치는 대로 손을 뻗치며, 그 어떤 명령자 - 부모, 선생, 법률, 신분 상의 편견, 여론의 말이라도 귀에 들어오는 즉시 받아들인다.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이것은 니체만의 고유한 사유 방식, 계보학적인(genealogical)’ 사유의 구체적 내용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니체가 계보학적으로 사유했다는 평가는 그의 유명한 도덕의 계보학에 대하여(zur Genealogie der Moral)라는 책의 막대한 영향력 때문에 생겼습니다. 계보학적인 사유는 어떤 주어진 것을 정당화하기보다 그것의 기원이나 발생 과정을 추적하는 사유 방식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태어났을 때 그 사람의 부모나 선조들을 추적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따라서 도덕의 계보학이란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이 어떤 발생 과정을 거쳐서 생기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입니다. 이 때문에 니체는 프로이트의 진정한 선배라고 말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프로이트도 초자아를 정당화하기보다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초자아가 내재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장씨 부인 혹은 칸트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와는 달리 역사성사회성의 문제를 전혀 숙고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요. 어떻게 해서 자신이 선택을 하게 되었으며, 그 선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장씨 부인은 자신이 어떤 역사와 사회의 산물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칸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형식적인 양심의 발생 과정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식적인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의 표적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이라는 표현은 칸트가 자신의 정언명령에서 이야기했던 보편적 입법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양심, 즉 보편적 입법자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길에 떨어진 지갑을 주웠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의 내면에서는 두 가지 욕구가 꿈틀거립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주웠다고 해도 지갑을 돌려주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잃어버린 사람의 잘못이지 뭐라고 속삭이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누군가가 너의 지갑을 땅에서 주워서 너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너는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겠니?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너나 모두 지갑을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을까? 그러니 너는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라고 말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바로 이 후자가 보편적 입법자의 목소리입니다.

 

장씨 부인이 자신의 선택을 자율적인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칸트도 이런 양심의 명령을 실천이성의 자율적인 목소리라고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런 양심의 목소리는 훈육의 결과로 인간에게 내면화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칸트에 대한 니체의 계보학적 비판은 다음과 같은 예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어린아이가 하나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의 방을 항상 지저분하게 만들어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 아이에게 명령합니다. ‘방을 깨끗이 치워야 해, 절대 더럽혀서는 안 돼!’ 그러나 이런 명령은 여러분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 아이의 소망은 결코 아닐 겁니다. 아쉽게도 아이는 계속 자신의 방을 정돈할 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회초리를 써서 아이를 호되게 혼낼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한번 진지하게 타이를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여러분이 그 아이에 비해 강자이기 때문이란 점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훈육의 과정을 거듭하다보면 놀랍게도 그 아이의 내면에 방을 깨끗이 치워야 해, 절대 더럽혀서는 안 돼라는 명령이 각인됩니다. 마침내 이 아이는 어느 순간 여러분이 더는 강제로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방을 치우게 됩니다. 이제 아이는 외면의 명령을 듣기보다 자기 내면의 명령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는 이처럼 자신이 자율적으로 방을 치우게 된 기원 자체를 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이는 자신이 방을 청소하는 것은 부모님의 강압적인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제 아이가 방을 깨끗이 치워야 해라는 명령을 일종의 선천적 욕구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점입니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서 자기 방을 정돈하지 못하면, 마치 배가 고프지만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처럼 이 아이 역시 일종의 불만족과 불쾌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불행한 주체와 행복한 주체

 

 

칸트는 보편적 입법자의 소리를 자율적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의 명령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요. 만약 프로이트나 니체의 지적이 옳다면, 장씨 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주체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말하기엔 거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칸트의 도덕법칙, 즉 양심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드러나자마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그 목적에 종사해야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점입니다. 며칠 밤을 새우고 일을 하느라 몹시 피곤할 때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는 집에 들어와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이 더럽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피곤한 몸을 누이고 즉시 휴식을 취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내면의 보편적 입법자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불쾌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방을 깨끗이 치워야 해.’ 결국 우리는 거의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방을 치우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붙이게 됩니다. 이것은 양심의 소리라는 것이 나와 무관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요? 그것은 진정 나를 위해서 존재하기보다. 오히려 나를 수단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피곤한 자신을 위해서 방을 치운 것이 아니라, 내면의 초자아를 위해서 방을 치운 셈이 될 테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칸트의 주체에서 그리고 장씨 부인의 선택에서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배려, 즉 자신의 행복이나 즐거움이라는 측면입니다. 단지 내면에 보편적 입법자로 내재화된 공동체의 규칙, 그것에 대한 배려나 행복만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도덕이 본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이다. 우리는 자신이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이런 희망은 오직 도덕에 종교가 첨가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이 결국 행복의 윤리학이 아니라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윤리학을 흔히 의무의 윤리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은 마땅히 해야만 되는 행동에 관한 것이지, 나 자신의 행복에 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도덕이 본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행복해질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칸트는 종교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사는 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천국에 가서 신으로부터 그 대가를 받게 된다고 믿는 것을 그는 종교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에 가서야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과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칸트는 우리가 그런 믿음이라도 가지고 윤리적인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지상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겠지요.

 

칸트의 윤리학에서 행복이 불가능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단목적이란 개념을 빌려올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구체적 삶이 수단이라면, 내면에 있는 보편적 입법자가 곧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보편적 입법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그의 욕구야말로 나의 숭고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편적 입법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나의 삶 전체를 수단으로 삼아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행복은 내면의 도덕법칙이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의 삶 자체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해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칸트의 윤리학을 액면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면, 그는 순교자와 같이 죽음을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숭고한 도덕법칙이란 것도 결국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칸트는 우리의 삶을 수단과 목적으로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행복은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행복이란 것은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매우 짧은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어느 고등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이 학생에게 고등학교에서의 공부는 수단이 되고, 대학 입학은 목적이 되겠지요. 이 말은 결국 이 학생에게 있어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이 불행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학생의 행복은 너무 짧은 것이 아닐까요? 단지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는 그 순간에만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제 대학생이 되면 이 학생의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됩니다. 대학 생활도 취업이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간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학생이 설정했던 모든 목적, 즉 대학 진학 혹은 취업이란 것이 사실은 공동체에서 요구되는 규칙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장씨 부인이 생각했던 도덕법칙 그리고 칸트의 보편적 입법자가 정한 도덕법칙이 모두 공동체의 규칙의 흔적에 불과했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많은 학생들이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갈 거야라고 자신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자유로운 주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과 결정은 결코 그들에게 지속적인 행복감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단지 인생에 있어서 몇 차례의 순간적인 행복감 혹은 성취감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지요. 더 불행한 것은 이런 행복이 그들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보편적 입법자가 느끼는 것이란 점입니다. 칸트의 말대로 자신의 행위를 자유롭게 숙고해서 결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유로운 주체는 반드시 행복해지려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만으로 주체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체인지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지속적인 행복이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취업이란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학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한 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얻기 위해 물 위로 솟구치는 놀이 공원의 돌고래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불행, 우울, 슬픔으로 점철되기 마련입니다. 물로 목적이 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는 일말의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인 즐거움과 행복의 상태에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바로 수단과 목적의 일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 우리는 네덜란드의 위대한 문화사가인 호이징하(J. Huizinga, 1872~1945)호이징하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그로닝겐대학과 라이덴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를 주로 연구했다. 그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후에 인간의 심성 내용을 주로 연구했던 프랑스 아날학파의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놀이에 관한 연구는 현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주요 저서로 호모 루덴스, 중세의 가을등이 있다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는 놀이에서 수단과 목적의 일치라는 테마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하여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보통 수단목적이 분리된 행동을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수단목적이 일치되는 행동을 놀이라고 부릅니다. 노동의 경우 행복은 목적을 달성했을 때에만 찾아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라 바닷가로 피서를 갔다고 해봅시다. 해가 뜨자마자, 이 아이는 플라스틱 삽과 그릇들을 가지고 바닷가로 달려갑니다. 그러고는 모래성을 만들며 한껏 즐거워하지요. 왜 이 아이는 쉬지 않고 모래성을 만드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이 아이는 이 행위로 인해 절로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모래성을 만들려고 한 것이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 즉 진정한 자유로부터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강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래성을 만드는 것을 칭찬하지도 특별한 대가를 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아이에게 모래성을 만드는 행위는 즐거움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는 관계없는 그 아이 자신만의 즐거움이기도 하지요.

 

호이징하에 따르면 놀이는 수단과 목적의 일치 그리고 자유, 즐거움, 행복이라는 여러 규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놀이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른 사례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모래성을 만드는 놀이를 변질시켜 하나의 고된 노동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 어린아이와 함께 피서지에 도착한 어머니의 경우를 주목해봅시다. 그녀는 아침이 되자 텐트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흔들어 깨웁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바닷가에 가서 모래성을 열 개 만들어. 안 그럼 너 오늘 아침밥 굶는다.” 이제 아이에게 모래성을 만드는 것이 수단이 되고 밥을 먹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이 경우 모래성을 만드는 것이 이전처럼 아이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못할 겁니다. 이제 이 행위는 놀이가 아니라 강제된 노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즐거움과 행복은 밥을 먹는 그 짧은 순간에나 찾아오겠지요. 그래서 호이징하는 놀이가 결코 도덕적 의무임무여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호이징하 덕분에 이제 우리는 자유가 근본적으로 행복과 즐거움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목적의 일치만이 이런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점도 그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주체는 자유로운 주체여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즐거운 주체이기도 해야 합니다. 주체가 즐겁지 않다는 것은 모순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니체는 칸트의 윤리학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칸트에게는 절름발이 주체, 절름발이 자유만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 앙리 마티스의 춤(1910)

 

 

 여러분은 우울한 주체가 아닌 즐거운 주체, 그리고 자발적 복종이 아닌 행복한 자유를 얻고 싶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제안하는 참된 주체, 즉 즐거운 주체가 되는 방법을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권하는 방법은 칸트의 정언명령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겠지요. 충실한 니체주의자였던 들뢰즈의 설명을 통해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법칙에 대한 증오와 운명애(amor fati), 공격성과 동의는 차라투스트라의 두 얼굴이다. 성서에 호의적이고 다시 성서를 적대시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여전히 특정한 방식으로 칸트와 싸우고 있다. 도덕법칙 안에 있는 반복(répétition)의 시험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éternel retour)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는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이것은 칸트류의 형식주의이지만, 칸트를 그의 고유한 영토에서 전복해버리는 형식주의이다. 여기에 (칸트의 명령법이 함축하는 시험보다) 더 멀리에까지 이르는 시험이 있다. 이는 미리 가정된 어떤 도덕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는 대신, 도덕을 넘어서는 어떤 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칸트는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할 때 보편적 입법자인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던 입법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법칙에 대한 증오를 언급한 것입니다. 니체의 논의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장씨 부인이 세운 보편적 도덕법칙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보지요. 그녀는 자신의 학문 활동을 접고 봉건사회의 가치 규범을 수용하기로 결정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무엇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장씨 부인이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도덕법칙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의 학문 활동을 계속 영위하려고 계획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여성이 바로 이런 이유로 다양한 전문 직종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또 그럴 수 있길 기대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니체는 법칙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운명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자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이런 뜻이라면 이것은 도리어 법칙에 대한 수용이라고 불려야 하겠지요. 니체의 운명에는 영원회귀라는 그의 개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원회귀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와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과 세계는 주기적으로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1000년 뒤 다시 똑같은 나로 똑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가정해봅시다. 물론 오늘의 세계나 나도 이미 1000년 전에 있었던 똑같은 세계와 나 자신일 뿐입니다. 이렇게 1000년 주기로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된다고 생각해봅시다. 내가 오늘 어떤 책을 읽고 있다면, 1000년 전에도, 2000년 전에도 나는 똑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1000년 뒤에도, 2000년 뒤에도 나는 똑같은 책을 읽게 되겠지요.

 

만약 영원회귀가 옳다면 여러분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우울하고 불행한 일들,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는데도 말입니다. 타인의 강압에 비겁하게 굴종하겠습니까? 이런 굴종이 1000년 뒤에도, 2000년 뒤에도 똑같이 반복될 것인데도요? 아마 여러분은 가장 자유로운 행동, 가장 즐거운 행동, 가장 행복한 행동을 하려고 애쓸 겁니다. 그런 행동은 앞으로 영원히, 다른 삶에서도 반복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네가 무엇을 의지하는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했던 운명애의 내용입니다. 니체의 묘수풀이는 사실 우리가 1000년 전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운명애를 주어진 삶의 조건에 대한 체념이나 굴종으로 만들지 않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지금 나의 이 행동이 앞으로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것은 영원한 것이 될 겁니다. 이 점에서 그의 운명애는 미래로, 긍정으로, 행복으로 열려 있고, 우리를 즐거운 주체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정언명령으로 불릴 수 있겠지요.

 

 

 

 

더 읽을 책들

 

 

김상봉, 호모에티쿠스(서울: 한길사, 1999)

서양철학사를 윤리학적 시선에서 깔끔하고 분명하게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윤리학에 기초해서 서양의 윤리학적 전통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나 니체의 즐거움의 윤리학을 다루는 데서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랄프 루드비히, 정언명령(이충진 옮김, 서울: 이학사, 1999)

칸트의 의무의 윤리학을 잘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자유와 의무 사이의 기묘한 반전을 만끽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원전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마치 칸트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과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김주경 옮김, 서울: 동문선, 2000)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빠름을 생명으로 합니다. 여기서 빠름이란 어떤 주어진 목적을 단시간에 성취하려는 정신 그리고 남과의 치열한 경쟁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운동의 메커니즘에 의해 강제되는 것입니다. 이 책은 느림을 통해서 우리가 자본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고 행복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가라타니 고진, 윤리21(송태욱 옮김, 서울: 사회평론, 2001)

칸트의 윤리학을 새롭게 독해하려는 도전적인 책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의무의 윤리학이란 측면보다는 자유의 윤리학과 타자의 윤리학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칸트의 윤리학을 맑스의 정치경제학과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반드시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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