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내가 원하는 것과 타자가 원하는 것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항상 어떤 고독을 동반한다는 것도 경험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분명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로 하여금 내가 하듯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사랑의 고독을 안겨다줍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 흔히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이렇게 멀리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아니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미 사랑하고 있
다면?’ 노창선(1953~)【노창선은 1975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시 「잠의 사원」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을 주로 노래했다. 그는 고독과 단절의 이유를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부재한 데서 찾고 있다. 최근에는 자연과의 관계와 생명에 대한 시작에 몰두하고 있다. 주요 시집으로는 『섬』, 『난꽃 진 자리』, 『오월의 숲에 와서』 등이 있다】이란 시인은 아마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마치 섬처럼 고독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다음은 시인이 지은 「섬」이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내가 이룬 섬의 그 어느 언저리에서
비둘기 한 마리 밤바다로 떠나가지만
그대 어느 곳에 또한 섬을 이루고 있는지
어린 새의 그 날개 짓으로
이 내 가슴속 까만 가뭄을
그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섬」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 즉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사람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그건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지, 나의 서툰 고백을 받아줄지, 나는 전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하나의 섬으로 다가옵니다. 그 속에 누가 사는지, 또한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내가 한번도 발을 디디지 못한 섬 말이지요. 나는 밤에 몸을 뒤척이며, 아무도 모르는 사이 나의 마음을 비둘기에게 전해 띄워 보내봅니다. 어두운 밤이기에 그 새가 사랑하는 나의 연인에게 도달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점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나를 완전히 떠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사랑에 빠진 나는 나 자신을 점차 하나의 섬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섬을 떠나 그 사람의 섬으로 갈 수 있을까요? 방법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아쉽게도 지금 어떤 분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아름답긴 하지만 너무 낭만적이고 소심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 분들은 자신이 한때 빠져들었던 고독과 불면의 밤을 기억할 겁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건넸던 자신의 손을 상대방이 따뜻하게 잡아주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참으로 사랑은 하나의 비약이자 축복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자, 남모르던 타인이 나의 손을 잡아주는 경험이니까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 타인은 나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검푸른 바다에 가로 막힌 섬과 섬이 만나는 기적처럼 하나의 놀라운 사건, 어떤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사건입니다. 고독, 설렘, 비약, 기적 등이 없다면 사랑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섬으로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절망했습니까?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혹여 사랑하는 상대방을 자신처럼 환희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전에 여러분은 바다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는 섬처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그 사람과 여러분 자신이 하나가 되었다고 확신하지는 않습니까? 장자는 사랑에 있어 이런 착오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까요?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 「지락(至樂)」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于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장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나라 임금이 누구나 인정할 만큼 새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랑이 끝내는 자신이 사랑하던 새를 죽음으로 이끌고 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어떤 비극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오히려 사랑하는 타자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유로 인해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노나라 임금이 사랑하는 새에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 새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나라 임금이 새에게 베풀었던 애정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맛있는 술을 권하기, 궁정 음악을 연주해주기, 맛있는 고기를 먹이기 등등.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호의를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새에게는 이런 것들이 모두 괴로운 시달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흘 만에 노나라 임금의 애정 표현에 놀란 바닷새는 슬픈 최후를 맞게 됩니다.
여러분, 노나라 임금의 슬픔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사랑을 극진히 표현했건만, 그 결과는 도리어 참혹했습니다. ‘왜 너는 죽고 만 거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아마 바닷새의 시신을 가슴에 품고서 임금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왜 바닷새가 자신의 곁을 영원히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때 장자는 불쌍한 노나라 임금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그의 비극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요. 다시 말해 노나라 임금은 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새에게 해주기를 원했던 것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극이 발생했던 것이지요. 차라리 노나라 임금과 바닷새는 만나지 않았던 것이 더 좋을 뻔했습니다. 혹은 만났더라도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겠지요. 결국 우리가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타자란 무엇인가?
노나라 임금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를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이끌어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게 될 수도 혹은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의 규칙이 나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란 바로 ‘차이’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노나라 임금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규칙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맛있는 술을 권하기, 궁정 음악을 연주해주기, 맛있는 고기를 먹이기 등 그가 행했던 애정 표현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바닷새가 인간 사회의 규칙에 적응했었다면, 따라서 인간에게 타자가 아니었다면, 이 새는 노나라 임금의 애정에 무척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나라 임금과 마주친 바닷새는 자신만의 삶의 규칙에 따라 살고 있던 존재입니다. 바닷가에서 벌레 잡아먹기, 다른 새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등이 바로 바닷새 자신의 규칙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를 보고 그 새만의 삶의 규칙을 곧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 불가능했을 겁니다. 타자가 가진 고유성, 즉 타자성은 감각적으로 직접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타자의 외모를 보고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와 만나서 부딪히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람이 나와 다르구나’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명확히 타자의 삶의 규칙, 타자성을 다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 이 점에서 그 사람은 나와 같지 않구나’라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상대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만약 부정적인 방식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식으로 타자의 타자성을 규정할 수 있다면, 이미 나와 만난 그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타자가 아닐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긍정적인 규정은 내가 타자와 삶의 규칙을 공유하게 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타자의 삶의 규칙을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타자가 나의 삶의 규칙을 받아들인 경우에만, 우리에게는 낯선 타자란 것이 소멸하게 됩니다.
장자는 2000여 년 전 타자를 발견했고, 그 타자와의 소통을 모색했던 사상가입니다. 이와 달리 서양에서는 타자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다 진지한 논의는 레비나스(E. Levinas, 1906~1995)【레비나스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하여 활동했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적 시도는 형이상학을 윤리학의 기초 위에 세우려는 데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윤리학은 타자와 차이를 긍정할 수 있지만, 형이상학은 윤리학과는 달리 동일성만을 긍정하려는 폭력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조교였던 데리다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요 저서로 『전체와 무한』, 『시간과 타자』 등이 있다】라는 철학자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집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심화시키기 위해 여기서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지요.
플라톤은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매우 특이한 점을 전혀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는 이데아【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기본 개념으로 보통 형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의자가 하나 있다고 해보자. 플라톤은 이 의자가 ‘의자’라는 형상과 ‘의자’를 구성하는 질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것은 의자가 망가지더라도 ‘의자’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는 점이다. 변한 것은 단지 질료일 뿐이기 때문이다】의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 공화국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빛의 세계, 시간이 없는 세계의 철학을 만들었던 것이다. 플라톤 이후부터 사람들은 사회적인 것의 이상을 융합(하나됨)의 이상에서 찾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고, 마침내 집단적 표상이나 공동의 이상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라고 말하는 집단성, 다시 말해 인식 가능한 진리의 태양을 바라보면서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자로 인식하는 집단성이다. 이것은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행하는 제3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성이다. (하이데거의) ‘서로-함께-있음(Miteinanadersein)’도 ‘함께(mit)’의 집단성에 머물러 있고, 진리를 매개로 그것의 본래적 형식 안에서의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성이다.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
레비나스는 플라톤【플라톤은 서양철학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현대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은 변화하는 질료와 불변하는 이데아라는 두 가지 계기를 도입했다. 육제와 정신, 현세와 피안을 구분하는 서양철학사의 주류 전통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주요 저서로 『국가』, 『테아이테토스』, 『티마이오스』 등이 있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이 타자의 문제를 제대로 사유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불리는 공통된 태양을 생각했습니다. 이데아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기 때문에, 플라톤이 꿈꾸었던 세계는 ‘시간이 없는 세계’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태양 아래서 동일한 빛을 받고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이데아에 의해 동일하게 규정됩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타자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삶의 규칙을 우리와 공유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타자인데,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이데아라는 절대적인 삶의 규칙을 공유하기 때문이지요. 레비나스는 플라톤에서 하이데거까지의 서양철학사가 타자를 나와 동일한 규칙을 가진 존재로 사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공통된 규칙을 가진 존재는 이미 우리에게 낯선 타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존재는 단지 ‘우리’ 라는 동일한 집단에 속해 있는, 나와 같은 구성원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요. 이런 서양철학의 경향은,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자신과 동일한 삶의 규칙을 공유하는 존재로 간주했던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레비나스는 이 점과 관련해 서양철학이 항상 타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합니다.
사실 그가 평생 타자 문제를 사유했던 이유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는 잔혹한 학살의 이면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양철학의 주체 중심주의를 찾아냈던 것이지요. 만약 레비나스가 말했던 것이 옳다면 서양철학은 거대한 유아론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아론은 단순히 ‘나만이 존재한다’는 식의 협소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확장된 의미의 유아론을 의미하지요. 서양철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규칙이 보편적인 동시에 유일한 삶의 규칙’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협소한 의미의 ‘유아론’보다 확장된 의미의 ‘유아론’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협소한 유아론은 우리를 고독한 주체로 만들어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도록 만들지만, 타자에게 극심한 폭력을 가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확장된 유아론은 자신이 믿고 있는 삶의 규칙을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결국 폭력과 억압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서양 사람들 중 일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사실을 두고 매우 야만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나아가 그것을 금지하려고 자신의 정부에 압력을 넣거나, 아니면 직접 우리 정부에 서한을 보내기도 하지요. 문제는 이런 서양 사람들의 행동에는, 자신들은 계몽되어 있지만 우리는 아직 계몽되지 못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과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삶의 규칙에서는 ‘개’라는 동물이 ‘친구’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 한국 사회의 삶의 규칙에 따르면 ‘개’는 힘든 농사철의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미 맥락이 다르다고 해서, 자신의 문명이 지닌 의미 체계를 일방적으로 다른 문명에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내가 가진 의미 체계를 다른 사람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식의 유아론은 표면적으로는 유아론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런 착각 때문에 확장된 유아론이 타자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타자는 나의 미래!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입니다. 타자가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의 삶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타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요. 집에서 학교나 회사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이 그 한 사람에게 몰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강렬한 첫 만남을 경험해본 적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느낌을 기억할 겁니다. ‘나는 나 자신이 어디에서 있는지, 그리고 왜 거기에 서 있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그 사람만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강렬한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있어 바로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의 멋진 표현을 한 구절 더 읽어보지요.
나의 존재에 대한 타자의 영향력은 신비스럽기만 하다. 그것은 미지의 것이라기보다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빛에 대해서도 저항적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암시되고 있는 바는, 타자가 나와 더불어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자아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외재성이며 혹은 그의 타자성이다. 『시간과 타자』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졌기에, 나는 타자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가 모든 것, 심지어 빛마저도 흡수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블랙홀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타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서도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타자와의 강렬한 첫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이 우리에게 ‘순수한 현재(pure present)’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타자와의 만남만이 우리에게 시간이란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제도 그제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시간에 불과합니다. 어제는 그제와 같고, 오늘 역시 어제와 같을 뿐이니까요.. 이런 생활 속에서 사실 시간이란 전혀 의미가 없는 것, 우리로부터 도망친 아름다운 새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란 시계 속을 똑같은 패턴으로 회전하는 시침이나 분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란 기본적으로 단절과 변화의 계기를 가리킵니다. 타자와 마주친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도망친 새가 다시 내 품으로 날아와 안기는 듯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나에게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 즉 순수한 현재가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갈망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 어제의 내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런 순수한 현재를 통해 나에게는 과거란 것이 생기게 되는 셈이지요. 그러나 순수한 현재는 나에게 이처럼 과거를 안겨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타자와 마주친 이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미래를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나는 내일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일을 설렘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 미래라는 시간도 찾아오게 됩니다. 결국 타자와의 강렬한 첫 만남은 나에게 충만한 시간 전체를 다시 선물로 제공해주는 셈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와의 관계를 시간의 계기로 사유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초월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의 투사는,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론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
어느 순간 우리는 타자와 마주치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언젠가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내가 수영을 배우기 시작해서 엄청나게 노력한 끝에 수영을 능숙하게 하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이제 나는 ‘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가 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유는 내가 물의 흐름에 나 자신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물에 들어가 허우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물에 자신을 맞출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물에 뜰 수 있게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타자의 삶에 자신을 맞출 수만 있다면 우리는 타자를 알 수 있게 되겠지요.
처음엔 누구나 ‘당신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얼굴만 보아도 어느 정도 상대방의 기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불편함과 낯섦의 경험이 이처럼 편안함과 친숙함의 경험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타자와 만나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나로 변화하게 됩니다. 타자와 조우하기 이전의 나는 타자와 만나 그에게 자신을 맞춤으로써 질적으로 전혀 다른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타자와 마주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거나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대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현재 자신의 생각을 미래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나 레비나스의 말에 따른다면, 그것은 단지 ‘미래의 현재’일 뿐 ‘진정한 미래’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즉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생성될지 미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마주친 타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까요. 이 때문에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야말로 ‘미래와의 관계’라고 이야기했던 겁니다.
뇌물의 논리와 선물의 논리
「섬」이란 시를 지은 노창선 시인은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발견했습니다. 이 심연은 검은 바다와 같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의 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도 섬으로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섬이 된 것 역시 타자에 대한 그리움, 그리로 건너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지요. 타자를 만나서 섬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에게로 비약하려는 우리의 욕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검은 밤바다를 건너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 한 마리’라도 보내어 ‘가슴속 까만 가뭄’을 전하려고 하니까요.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타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어떨 때 행복한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편안해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비둘기와 같은 것을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지요.
비둘기는 장미꽃일 수도 있고, 책 한 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애써 적어본 사랑의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타자가 그것을 받아준다면, 우리는 무척 행복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섬과 섬 사이에 다리가 생겼다는, 그래서 고독으로부터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만약 상대가 나의 정성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뭐,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내가 준 것을 받을지, 혹은 받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자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상대방이 나의 정성을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를 전혀 모른 채, 무엇인가를 주었던 셈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일컬어 우리는 선물(gift)이라고 부르지요. 우리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선물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라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선물의 논리를 가장 깊게, 그리고 그 한계에 이르기까지 사유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이 존재하려면,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만약 타인이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내게 다시 돌려주거나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또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나와 타인 사이에는 어떤 선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반환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상당히 긴 유예 조건들을 계산하여 이루어지든 간에 관계없이 말이다. 특히 타인이 내게 동일한 것을 직접 되돌려주는 경우에 이 점은 훨씬 더 분명해진다.
『주어진 시간 1(Donner le temps 1)』
데리다【데리다는 전통 서양철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그는 서양 형이상학이 ‘아버지’, ‘국가’, ‘진리’, ‘아름다움’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울타리를 쳐놓고 세계를 위계적으로 배열해왔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보통 해체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전통 형이상학을 해체한 후, 말년의 데리다는 새로운 윤리의 구성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했다. 주요 저서로 『글쓰기와 차이』, 『주어진 시간 1』 등이 있다】는 선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선물이 결코 교환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맞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보통 어떤 대가를 바라고 주는 물건이라면 그것을 선물이라고 부르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것은 뇌물이라고 말해야 되겠지요.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그것 역시 선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군요. 과연 여러분은 데리다가 말한 의미의 선물을 건넨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사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선물을 건네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생일날이 되었을 때, 서로 만난 기념일이 찾아왔을 때, 입학할 때, 졸업할 때, 취업할 때, 승진할 때 등 너무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선물을 주곤 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가 발생한다면 어떨까요?
친한 친구의 생일날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 30만 원을 전부 들여서, 아주 근사하고 고급스러운 정장을 한 벌 샀습니다. 친구가 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선물을 할 수 있는 친구가 나에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생일날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선물을 건넵니다. “절대로 부담 갖지 마.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이제 시간이 흘러서 어느덧 내 생일날이 가까워졌습니다. 물론 그 친구도 내 생일날이 언제인지를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생일날 나를 찾아온 그 반가운 친구는 달랑 장미꽃 한 송이를 나에게 건넵니다. 그러고는 이 장미꽃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 순간 여러분이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던 30만 원 상당의 정장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만약 이전에 여러분이 주었던 선물을 전혀 떠올리지 않은 채 아주 행복하게 친구가 준 장미꽃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선물을 건네준 경험을 한 겁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전에 친구에게 주었던 선물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그때의 정장과 지금 받은 장미꽃을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된다면, 슬프게도 여러분은 결코 선물이란 것을 건넨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0만 원을 들인 정장으로 여러분은 어떤 대가를 무의식적으로 바랐던 셈이고, 지금에 와서 비로소 그것이 의식화된 것이니까요. 선물에 대한 데리다의 논의가 결정적인 이유는, 선물과 관련된 우리의 허위의식을 그가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가 선물로 주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 뇌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비꼬고 있으니까요. 친구가 영화를 보여주면, 나중에 우리도 그에게 영화를 보여줍니다. 친구가 밥을 사면, 나중에 우리도 그에게 밥을 삽니다. “지난번에는 네가 돈을 냈으니, 오늘은 내가 낼게.” 그런데 만약 친구가 여러분에게 생일 선물로 10억 원쯤 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경우 반지를 받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엄청난 부담감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무엇인가를 주고받던 여러분이 지금은 왜 이런 부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그 친구의 생일날 그 정도로 비싼 선물을 건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의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의식적인 삶은 뇌물, 즉 교환관계에 빠져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고독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타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사랑해야만 비로소 참된 고독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해서 우리가 교환관계에 빠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타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그는 나와 삶의 규칙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와 더불어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자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와 타자와의 관계란 마치 피조물과 절대적 신과의 관계와도 유사한 것입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고독 속에서 나는 두려움과 기대로 점철된 마음으로 나의 정성이 담긴 선물을 보냅니다. 물론 그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상대의 선택이니까요. 만약 그가 나의 선물을 받아준다면, 그것은 내게 하나의 기적이자 축복으로 다가오는 사건이 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가 나의 선물을 받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기 때문이지요.
타자ㆍ사랑, 그리고 선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들, 즉 타자, 사랑, 고독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뇌물은 우리를 채권과 채무의 관계로 몰아넣습니다. 따라서 뇌물에는 받은 것 이상으로는 돌려주지 않고, 또한 준 것 이상으로는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뇌물의 논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어야 상대가 좋아하고 또 얼마만큼 주어야 그 뇌물의 효력이 발생하는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뇌물의 관계에서는 블랙홀과 같은 타자의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타자란 나의 기대나 예측을 벗어나는 존재가 아닙니까? 나와 삶의 규칙을 달리하는 존재가 바로 타자이니까요. 따라서 오직 타자와 마주치고 그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만, 나는 선물을 줄 수도 또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선물을 준다는 것에는 타자와 사랑, 그리고 선물을 주려는 나의 고독이 동시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데리다의 이야기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선물을 주고 있다는 우리의 허위의식을 공격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선물을 주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선물을 줄 수 있는 삶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주어진 시간 1』
데리다의 논의가 좀 어렵게 들리지요? 하긴 선물을 주기는 주지만,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망각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테니까요. “선물을 준 다음에 내가 선물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선물을 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이것은 매우 날카롭고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반박이 옳다면, 데리다는 결국 어떤 선물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데리다는 우리가 타자에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선물을 주어야 하지만, 그것이 진정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넬 때 그것의 대가를 결코 생각하지 말라는 단순한 충고입니다. 그러나 주었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여기에는 엄청난 의지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떠한 대가도 없이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데리다의 윤리학적인 정언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와 동일한 것입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정성스런 식사를 남편은 하나의 선물로 받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식사를 차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남편이 갖는 행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제 월급날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봉투를 아내는 선물로 받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해준 식사의 대가로 남편이 월급을 건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월급봉투를 받고서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이 부부는 여전히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아내의 식단이 좀 더 나아집니다. 또한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남편의 반찬 투정도 심해집니다. 월급을 받고 아내는 남편의 수고를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돈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에 바쁩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편으로서 당연히 돈을 벌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 저녁식사라도 차려주지 않으면, 남편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집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고 구박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식사를 차리는 것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물의 관계가 뇌물의 관계로 변질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했던 두 남녀는 이미 하나의 교환관계,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적인 것 일반’에 매몰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가족이라는 상징이 부여하는 분업 체계로 은폐되고 마는 것이지요. 남편은 밥을 먹었으니 돈을 벌어와야만 합니다. 이제 그는 가장으로서의 노동이 가정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이제 돈을 받았으니 제때에 식사를 차려야만 합니다. 그녀는 아내로서 가사 노동이 가정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혼부부의 사랑을 유지시켰던 선물의 논리가, 마치 음식과 돈이 교환되는 식당에서처럼 이제 뇌물의 논리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사랑도 기대할 수 없고, 선물 또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채권과 채무의 관계, 즉 뇌물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데리다는 기존의 선입견들을 예리한 논리로 비판했던 해체주의(Deconstructism)【해체주의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풍미했던, 전통에 대한 강력한 비판 정신이다. 서양철학은 합리적인 체계를 구성, 혹은 건설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건축에의 의지’로 규정될 수 있다. 반면 해체주의는 기존의 서양 전통을 기초에서부터 흔들면서 와해시키려고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양철학사에서 해체주의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방법론적 파괴라는 점이다】 철학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년의 그는 우리의 삶에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물이 가진 역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선물이 역설적인 것은, 그것이 교환 아닌 교환, 즉 불가능한 교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데리다가 유언으로 남긴 충고가 지금까지 모든 현명한 사람이 남긴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체의 대가 없이 네가 가진 것을 주어야만 한다.’ ‘수확의 기대 없이 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데리다에게도 고마움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는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망각하고, 망각해야만 하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물의 논리 이면에 타자와의 사랑이란 심오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을 건넬 수 있습니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망각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물을 주는 지혜와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그마한 가능성이나마 찾아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읽을 책들
윤수종 엮음, 『다르게 사는 사람들』(서울: 이학사, 2002)
우리 사회의 타자들은 소외받는 소수자들입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타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그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란 일방적인 구분이 지니는 의미와 문제점,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엠마뉘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 2000)
윤리를 생각하려면 타자를 사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철저하게 타자를 숙고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종영, 『가학증·타자성·자유』(서울: 백의, 1996)
철학과 사회학의 최신 담론들을 이용해서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 지를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특히 타자와 자유에 관한 담론을 역사의 층위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시도는 주목해볼 만합니다.
강신주,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제의 변형』 (서울: 태학사, 2003)
장자 철학의 핵심 취지는 관념적 자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 책입니다. 타자와 소통하면서 우리는 변형되고, 동시에 우리 지신이 변형되지 않는다면 타자와의 소통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용
'책 > 철학(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신주 - 철학, 삶을 만나다 목차 (0) | 2021.06.29 |
---|---|
철학, 삶을 만나다 - 에필로그 (0) | 2021.06.29 |
철학, 삶을 만나다 -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0) | 2021.06.29 |
철학, 삶을 만나다 -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0) | 2021.06.28 |
철학, 삶을 만나다 -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3장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0) | 2021.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