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의미와 한계
어떻습니까? 삼단논법에도 나름대로 어떤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철학적 사유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어떤 것에 대해 의미 있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만약 이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주장을 지지해줄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찾는 것이니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삼단논법을 최초로 체계화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바로 이런 문제점에 주목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봅시다.
이제 주어진 문제에 응답하기 위한 삼단논법이 적합하게 제공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찾을 것인지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적합한 출발점(전제)을 파악할 것인지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는 삼단논법의 구조에 대해 고찰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구축하는 능력까지 반드시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석론 전서(Analytica Priora)』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을 체계화한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합한 전제를 파악할 수 있느냐’가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이 ‘적합한 전제를 파악해서 삼단논법을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요구하는 ‘이성’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적합한 전제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성’이란 말은 영어 ‘reason’을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영한사전을 넘겨보면 이 단어는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방금 살펴본 것처럼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유’나 ‘근거’라는 뜻입니다. 이점에서 ‘이성’이란 말은 ‘이유나 근거를 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주장에 대해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와 같은 근거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성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 즉 근거를 찾고 제시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 여러분 자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화 상대방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나의 주장을 듣자마자 그것을 즉각 수용한다면, 나는 근거를 찾아서 제시할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요. 결국 나로부터 이성의 능력을 강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 대화 상대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장을 듣는 상대방이 최종적으로 내가 제시한 주장이나 전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나의 이성 능력이 제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과 관련해 우리는 레셔(N. Rescher, 1928~)【레셔는 독일에서 태어나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철학자이다. 철학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있어서나 현대 과학철학의 쟁점들에 대한 식견에 있어서 그를 따라갈 수는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이다. 특히 철학사와 인식론에 대한 그의 연구는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다. 주요 저서로 『변증법』, 『이성을 만족시키기』 등이 있다】의 논의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성 능력이란 것이 결국 특정한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승복시키기에 충분한 논증이라든가 충분한 이유라는 개념은, 논쟁 과정에서 타인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든 합리적인 탐구에서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든, 어느 경우에나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유나 근거라는 개념은 비개인적이며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적 언어는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에게 특유한 교리로서의 추리 기준, 즉 사적 논리는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구 자체는 형용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근본적 물음은 "X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자신에게 어떻게 납득시킬까”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납득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주장을 수용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를 부여하는 혹은 그런 이유를 탐색하는 작업은, 공적인 논쟁 과정이나 개인적인 탐구 과정에서 모두 똑같아야만 한다.
『변증법(Dialectics)』
레셔는 우선 타인을 설득하는 메커니즘이나 자신을 설득하는 메커니즘이 동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이유’나 ‘근거’를 찾는 이성의 동일한 작업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내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나는 이것을 상대방에게 주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나 자신에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이 주장을 내세웠는데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는 다른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만 합니다. 한편 나 자신에게 그것을 주장했는데 스스로도 전혀 납득할 수 없다면,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합리적 근거를 찾아야만 합니다. 이 점에서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 타인을 설득하는 과정과 마찬가지라는 레셔의 생각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사실 어찌 보면 이것은 당연한 지적일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내가 찾고 있는 합리적인 근거는, 우선적으로는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전제를 상대방에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근거를 우리가 어떻게 상대방에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레셔의 지적은 일단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는 사실 심각한 문제점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 이유는 레셔가 타인과의 논쟁이나 자신만의 합리적 탐구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납득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바로 ‘우리’라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능력은 이제 ‘우리’라는 공동체의 동의를 구하는 능력을 뜻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논쟁에서는 나의 주장을 듣는 사람도,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분명 타인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 우리가 그를 설득할 수 있는 전제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논쟁 상대방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레셔의 지적처럼,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납득할 수 있을까’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논쟁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합리적 탐구는 예외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 이것마저도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면, 이제 논리적 이성 능력은 개인의 자유로운 사유를 억압하고 검열하는 논리가 되지 않을까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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