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화폐와 우리
여기 왼쪽에 200만 원의 현금이 있고, 오른쪽에 200만 원 상당의 노트북이 있다고 해봅시다. 자! 여러분은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런 경우라면 아마 우리 대부분은 별로 주저하지 않고 현금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현금을 선택할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왜 우리는 상품이 아닌 화폐를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상품이 가지는 가능성은 유한한 것인 데 반해, 화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금 상품이 유한한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특정 상품이 그것이 충족시켜주는 목적에만 국한된 사용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노트북은 문서 작업이나 인터넷 검색, 게임 등의 제한된 가능성만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배가 고프더라도 노트북을 뜯어먹거나 혹은 노트북을 들고 음식점에 가서 밥을 달라고 우길 수는 없는 법이죠. 그렇다면 화폐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화폐를 갖는 순간 우리가 그 액수만큼 어떤 것이라도 구매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200만 원의 현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노트북도 살 수 있고, 여행도 할 수 있고, 맛있는 레스토랑에도 갈 수 있겠지요.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비밀이 놓여 있습니다. 다른 어떤 상품보다 화폐가 가장 우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상품이 아닌 화폐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상품만을 가지고 있다면, 반대로 여러분은 열등한 지위를 점유하게 되겠지요. 백화점에서 값비싼 옷을 산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는 당당한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사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반면 매장 직원은 비굴한 자리를 점하게 되죠. 옷을 팔아야 돈이 들어오니까요. 그래야 월급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옷을 팔려는 매장 직원의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마음도 없는 소리도 늘어놓아야 합니다. 또 손님에게 커피를 타다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메커니즘은 여러분은 돈을 가지고 있는 반면, 매장 직원은 옷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반면 구입한 옷을 환불하려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옷이라는 상품을 가지고 있고, 매장 직원은 화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쪽은 오히려 매장 직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사정을 늘어놓으면서 이제 부탁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어렵사리 환불을 할 수는 있겠지만, 예전처럼 커피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워낙 순식간에 교환 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흔하게 이런 교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명한 진리를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화폐가 단순한 교환의 수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분명 화폐는 우리에게 교환의 수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교환의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사려는 사람에게 화폐는 교환의 수단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품을 가지고 돈을 벌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화폐가 교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화폐는 단순한 교환 수단 그 이상의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화폐가 나의 손을 떠나는 순간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상실하고 이제 상품이라는 유한한 가능성만을 소유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제 화폐를 가진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상품을 가지게 된 사람은 상대적으로 노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주인 노릇을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 모습입니다.
『자본론』이란 유명한 책에서 맑스가 깊이 숙고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발견했던 것은 화폐가 가진 이런 무자비하기까지 한 힘이었던 것입니다.
화폐는 무엇이 자신으로 바뀌었는지를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이든 상품이 아니든 간에 모든 것이 다 화폐로 전환 가능하게 된다. 이제 모든 것이 매매의 대상이 된다. 유통은 모든 것이 그곳에 뛰어 들어갔다가 화폐라는 결정으로 변화되어 다시 나오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용광로가 된다. 이 연금술에는 성자의 뼈조차도 대항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보다 연약한, 인간의 상거래에서 제외되고 있는 성스러운 물건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화폐에서는 상품의 온갖 질적 차이가 없어져버리듯이 화폐 자체도 철저한 평등주의자로서 일체의 차이를 제거해버린다. 그런데 화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상품이며, 누구나 사적으로 가질 수 있는 외적인 물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사회적 힘이 개인적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본론』
화폐는 어떤 상품이든지 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화폐를 가진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화폐보다 오히려 상품을 가지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상품을 자신이 구매한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을 경우뿐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결국 자신이 원래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화폐를 수중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요. 보통 우리는 상품을 구매하느라 가진 돈을 다 소비하기보다는 은행에 저축하는 것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화폐를 가지고 있음으로써 계속 우월한 자리를 점유하려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적금 통장을 보며 불어나는 화폐의 양에 흡족해하시는 어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까? 어머니는 저금된 돈의 액수만큼 지금 꿈을 꾸고 계시는 겁니다. “몇 년 후에 집을 늘릴까? 아니 자식들 결혼 자금으로 쓸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 부부 노후 자금으로 사용할까?” 이런 황홀한 꿈을 꾸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어머니가 바로 화폐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화폐가 신성한 왕좌에 오르게 되자, 역으로 화폐가 아닌 모든 것은 이제 상품의 자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맑스는 ‘인간의 상거래에서 제외되고 있는 성스러운 물건들’마저도 이제 화폐에 의해 상품으로 전락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성스러운 물건들에는 인간 자신도 예외 없이 포함됩니다.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를 고귀하다고 여긴다 하더라도 결국 화폐가 아닌 이상, 상품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학교를 다니고 있나요? 혹은 이미 학교를 졸업했나요? 그렇다면 왜 여러분은 취업을 하려고 애를 쓰나요? 혹은 직장에서 출세를 하려고 노력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인간의 사회성이나 자아 성취 등 장밋빛 환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스스로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사회생활이 얼마나 고단하고 괴로운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하에서 여러분 자신이 반드시 하나의 상품으로 팔려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경제학 책을 본분은 알겠지만, 여러분은 질적으로 차이 나는 독립적인 인격체, 즉 고유한 삶의 가치를 갖는 자유로운 주체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구매자가 요구하는 상품으로 팔려야만 하는 ‘노동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여러분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규격화되고 만들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월급을 줄 수 있는 돈을 가진 사람, 즉 자본가에게 팔리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맑스도 화폐에서는 상품의 온갖 질적 차이가 없어져버리듯이 ‘화폐 자체도 철저한 평등주의자로서 일체의 차이를 제거해버린다’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잘 팔릴 수 있도록 가꿔야만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에게 화폐가 들어올 테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을 잘 팔리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여러분을 소비하는 자본가의 구미에 맞도록 여러분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본가가 영어 능력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TOEIC이나 TOEFL 학원에 다녀야만 합니다. 자본가가 상위권 대학 출신자를 요구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그런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혹시 자본가가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을 요구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형수술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을 단순한 은유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사실에 대한 직시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충동과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
화폐를 가진 자는 그 화폐의 가치만큼 교환 가능한 모든 상품을 잠재적으로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나의 특수한 상품을 소유한 자는 이제 다른 상품을 소유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제한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보다 화폐를 가졌을 때 더 우월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앞서 200만 원의 현금과 노트북 중 전자를 선택했던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화폐를 편집증적으로 소유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굶어 죽어도 화폐를 쓰지 않고 오로지 화폐를 소유하려고만 하는 구두쇠, 즉 맑스가 이야기한 ‘화폐퇴장자(貨幣退藏者)’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화폐는 운동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운동의 시작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판매를 위한 구매가 이루어지는 각 순환의 종결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순환의 시작이 된다. 단순한 상품유통 즉 구매를 위한 판매 은 유통의 외부에 있는 최종 목적, 즉 사용가치의 획득 혹은 욕망의 충족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유통)의 내부에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이 운동의 의식적인 담당자로서의 화폐 소유자는 자본가가 된다. 그의 일신,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주머니는 화폐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귀착점이다. 이런 유통의 객관적인 내용 - 가치의 증식 – 이 그의 주관적인 목적이 되고, 추상적인 부를 점점 더 많이 취득하는 것이 그의 행동의 유일한 추진적 동기가 되는 한에 있어서만, 그는 자본가로서, 즉 의지와 의식이 부여된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진정한 목적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하나의 거래에서의 이윤 역시 그러한 목적이 될 수 없고, 다만 이윤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운동 자체만이 자본가의 진정한 목적이 될 수 있다. 이 절대적인 치부에의 충동, 이 정열적인 가치 추구는 자본가와 화폐퇴장자(구두쇠)에게 공통된 현상이지만, 화폐퇴장자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퇴장자이다. 화폐 퇴장자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내버림으로써 가치의 쉴 새 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보다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유통에 재투입함으로써 가치 증식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자본론』
예를 들어 여러분이 200만 원을 금고에 고스란히 넣어두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돈을 다시 꺼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지금 우리가 200만 원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을 30년 뒤에도 역시 구매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10년 전에는 라면 한 봉지를 100원에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최소 300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요. 그렇다면 결국 돈을 금고 속에 넣어두기만 하는 행위는 그다지 현명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는 구두쇠, 즉 화폐퇴장자를 얼빠진 자본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왜 구두쇠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두 번째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단지 유통 과정을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화폐를 가진 사람이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우월한 자리를 점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우월한 자리는 상품과 화폐가 지속적으로 교환되는 유통의 과정을 통해서만 안정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맑스는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유통은 유통 그 자체가 곧 목적’이라고 지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유통)의 내부에서만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200만 원을 가지고 있을 때, 여러분은 ‘얼빠진 자본가’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영리한 자본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얼빠진 자본가‘를 선택한다면, 200만 원이 준 우월한 자리가 이제 모래성처럼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반면 ‘영리한 자본가’를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한 번 이상의 유통을 통해서 다시 250만 원을 벌어들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영리한 자본가가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250만 원을 회수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200만 원의 자본을 가지고 더 큰 이득을 남기기 위해서 어떤 상품을 샀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은 이렇게 구입한 상품을 이제 250만 원에 되팔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여러분의 이 상품을 살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돈을 가진 제3자의 권한이 아닌가요? 만약 돈을 가진 어떤 사람도 여러분의 상품을 250만 원에는 사지 않으려 한다면,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좀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을 150만 원 정도에 팔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현재 여러분이 소유한 200만 원어치의 상품보다는 차라리 150만 원의 화폐를 소유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이것은 어떤 상품보다도 화폐가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경우입니다.
결국 자신이 가진 우월한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화폐를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암초를 오디세우스처럼 지혜롭게 잘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암초는 화폐를 유통 과정에서 빼내어 금고에 담아두려고 하는 ‘얼빠진’ 생각이겠지요. 반면 두 번째 암초는 유통 과정에서 볼 수도 있는 손해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암초를 현명하게 잘 피했다면, 여러분은 ‘영리한 자본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영리한 자본가’가 되는 공식, 즉 맑스가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이라고 부른 유명한 공식이 출현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100원에 구매된 면화가 100+10원, 즉 110원에 다시 판매된다고 해보자. 따라서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다. 여기서 M′=M+⊿M이다. 다시 말하면 M′는 최초에 투입된 화폐액에 어떤 증가분을 더한 것과 같다. 이 증가분, 즉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초에 투입된 가치는 유통 과정에서 단지 자신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량을 변화시켜 잉여 가치를 첨가해준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가치를 증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운동이야말로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켜주는 것이다.
『자본론』
여기서 ‘M’은 ‘화폐’를 뜻하는 ‘Money’의 약자이고, ‘C’는 ‘상품’을 뜻하는 ‘Commodity’의 약자입니다. 그리고 ‘⊿M’은 유통을 통해 얻은 이윤, 즉 ‘잉여가치(Surplus value)’의 약자입니다. 100원의 돈을 가진 자본가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는 이 돈으로 100원어치의 면화를 삽니다. 그리고 이 면화를 110원에 팝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유명한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 즉 ‘M-C-M′’가 함축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는 자본가가 반드시 이 일반 공식에 따라서 자신이 가진 화폐를 유통 과정에 투입시켜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자신이 가진 화폐량이 줄어들 위험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만약 손해가 무서워 유통 과정에 화폐를 투입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봅시다. 물론 자본가는 순간적으로는 전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물가가 계속 올라가기 때문에 이 자본가는 자산 가치에 있어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셈입니다.
두 번째는 이 일반 공식이 질적으로 차이 나는 두 가지 과정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M-C-M′는 M-C의 과정과 C-M′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자가 100원을 가지고 면화를 ‘사는 과정’이라면, 후자는 이렇게 산 면화를 110원에 ‘파는 과정’이겠지요. 그런데 왜 이 두 과정이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는 걸까요? 그것은 상품보다 화폐를 가진 사람이 우월하다는 자본주의의 첫 번째 비밀과도 깊이 관련된 것입니다. 사는 과정에서 자본가는 화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월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파는 과정에서 그는 더 이상 그런 우월한 자리에 있는 자본가가 아닙니다. 파는 과정에서 그는 면화라는 상품을 가진 상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열등한 자리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돈을 가진 다른 사람이 면화를 사주지 않는다면, 그는 자본가라는 자신의 우월한 원래 자리로 복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인자본의 논리와 산업자본의 논리
보통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새롭게 도래한 경제구조라고 이해됩니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를 전자본주의 시대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자본주의(pre-capitalism) 시대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 이전의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전자본주의 시대에도 이미 자본주의 자체는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것은 산업자본주의가 아니라 상인자본주의(merchant capitalism)의 형태였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의 뿌리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얕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컨대 전자본주의 시대가 상인자본주의 형식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시대는 상인자본주의 형식뿐만 아니라 산업자본주의라는 형식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 형식은 상인자본주의라기보다는 산업자본주의라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다니려고 하는 회사, 혹은 다니고 있는 회사들은 대부분 산업자본주의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상인자본과 산업자본이 작동하는 논리에 대해 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인자본이 ‘공간적’인 두 가지 가치 체계, 더구나 거기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차액에 의해 생기는 것인 데 비해, 산업자본은 노동의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에 기초한다.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기존 시스템 안에서 서로 다른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 자본은 세계를 문명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존속하기 위해서 기술혁신을 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거의 무익하다고 생각되는 기술혁신이나 차이화도 자본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
이 구절은 가라타니 고진이 지은 『트랜스크리틱』에 실린 내용입니다. 이 대목은 상인자본과 산업자본의 차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고진에 따르면 상인자본의 가치 증식은 ‘공간적’으로 차이 나는 두 가지 가치 체계 간의 차액에 의해 발생하는 반면, 산업자본은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 체계를 만들어내야만 가치를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요? 그렇다고 너무 당혹스럽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차근차근 함께 살펴볼 테니까요.
그럼, 먼저 상인자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고진은 상인자본이 “‘공간적’인 두 가지 가치 체계, 더구나 거기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차액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선 상품에 대한 가치 체계가 다른 두 공동체, 즉 공동체 A와 공동체 B가 있다고 가정해보죠. 공동체 A는 소금이 1000원에 팔리고, 반면 인삼은 5000원에 팔리는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공동체 B는 ‘인삼이 1000원에 팔리고, 소금은 5000원에 팔리는’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공동체의 가치 체계로 보아서, 우리는 공동체 A는 바다에 근접해 있고 공동체 B는 산간에 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겠지요. 만약 여러분이 자본금 1000원을 가진 상인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윤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먼저 바닷가에 인접한 공동체 A에 가서 소금을 1000원에 삽니다. 그리고 이 소금을 가지고 공동체 B로 갑니다. 공동체 B에서 여러분은 소금을 5000원에 팔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인자본도 맑스가 이야기한 자본주의 일반 공식, 즉 M-C-M′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얻어진 5000원에 만족할 수 있나요? 만약 여러분이 현명한 자본가라면, 여러분의 수중에 모인 5000원으로 다시 공동체 B에서 인삼을 구입할 것입니다. 물론 이 인삼을 공동체 A에 팔기 위해서지요. 결국 공동체 A에서 출발해서 공동체 B를 거쳐서 다시 공동체 A로 돌아올 때, 여러분의 자본은 1000원에서 자그마치 2만 5000원으로 증식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 A에서 1000원으로 소금을 산 것, 즉 M-C는 등가교환인 것처럼 보이고, 또한 공동체 B에서 소금을 5000원에 판 것, 즉 C-M′도 등가교환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는 이윤이 발생했습니다. 이 이윤은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공동체 A와 공동체 B의 가치 체계의 차이, 즉 M-C와 C-M′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제 ‘공간적’인 두 가지 가치 체계, 더구나 거기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차액에 의해 생기는 것이 바로 상인자본의 가치라는 고진의 말이 이해되지요. 만약 모든 곳에서 가치 체계가 동일하다면, 상인자본은 잉여가치를 남기지도 못할 것이고 따라서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업자본은 어떻게 이윤을 창출할까요? 고진은 산업자본이 “노동의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 체계를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여기 휴대전화를 만드는 회사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회사는 부단히 노동의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특히 기술혁신을 수행함으로써 새로운 휴대전화, 더 발전된 휴대전화를 만들어 판매할 것입니다. 새로운 휴대전화는 기존의 휴대전화를 낡은 것으로, 다시 말해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결국 소비자는 기존의 휴대전화가 망가지기도 전에 스스로 자신의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휴대전화를 사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환경문제나 생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인간의 삶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비하고 또 낭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히 소비자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생태 문제가 산업자본주의의 작동 메커니즘 그 자체로부터 유래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환경문제나 생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우리는 산업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산업자본은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 체계를 만들어냅니다. 간단히 말해 기술혁신을 통해서 새로운 유행,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진이 말한 ‘차이화(differentiation)’의 과정, 정확히 말해 ‘자기 차이화’의 과정입니다. 물론 각각의 제품을 만들어 이윤을 남기는 산업자본의 메커니즘도 M-C-M′라는 자본주의 일반 공식에 적용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자본가는 자신이 가진 자본으로 공장, 원료, 기술력, 노동력 등을 삽니다. 이것은 M-C의 과정이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운 제품은 기존의 낡은 제품을 제치고 불티나게 팔리게 됩니다. 이것은 C-M′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상인자본과 마찬가지로 산업자본에서도 M-C라는 ‘사는 과정’과 C-M′라는 ‘파는 과정’은 각각 독립적으로 살펴보면 등가교환인 것처럼 드러납니다. 따라서 사는 과정이나 파는 과정을 서로 떼어놓고 보면, 도대체 어디서 그 많은 이윤이 발생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보입니다. ‘사는 과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파는 과정’도 아니라면 어디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상인자본과 마찬가지로 산업자본의 경우에도, 이 두 과정 사이의 차이에서만 이윤이, 즉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우리가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산업자본주의 메커니즘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인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자본가가 자신의 자본으로 공동체 A의 상품을 구매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공동체 B로 가서 판매합니다. 따라서 이 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상품을 판 사람과 자신으로부터 상품을 구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산업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월급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산업자본가가 만들어낸 제품을 사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그 제품을 만든 노동자나 다른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동료 노동자가 이 제품의 소비자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흔히 착취라고 표현하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만든 제품을 노동자가 소비함으로써 잉여가치, 즉 ‘⊿M’이 발생하는 셈이니까요..
▲ 평화시장 여공들의 모습.
세계화의 논리는 새로운 것인가?
상인자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산업자본은 가치의 증식, 즉 잉여가치를 부단히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산업자본의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역으로 어떻게 하면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줄어들 수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잉여가치는 M-C와 C-M′의 두 가지 과정 사이의 차이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잉여가치를 떨어지게 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M-C의 과정에서 산업자본가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화폐를 더 많이 지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료의 가격이 상승하거나, 공장 유지비가 올라가거나, 혹은 인건비가 올라가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C-M′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품이 잘 팔리지 않거나, 아니면 낮은 가격으로밖에 팔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실업이 만연하여 소비 욕구가 침체되거나, 제품이 과잉 생산되어 제품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산업자본이 항상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찾아나서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더 이상 잉여가치가 생기지 않는다면 산업자본은 마치 게걸스런 괴물처럼 다른 곳으로 먹이감을 찾아 이동해야만 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굶어죽게 될 테니까요. 저렴한 원료가 있고 값싼 노동력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자신들의 제품에 대한 수요가 높은 곳이 있다면 산업자본은 그곳이 어디든 주저 없이 찾아갈 겁니다. 그래야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있고, 따라서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윌리엄탭은 이런 게걸스러운 산업자본의 운동을 ‘부도덕한 코끼리(The Amoral Elephant)’라고 비유했던 것입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이해했듯이, 자본주의는 언제나 생산수단을 끊임없이 혁명한다. 그것은 그들의 시대에도 사실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전 세계의 부르주아지들은 부단히 자기 제품의 시장을 확대해야 할 필요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모든 곳으로 진출하고 자리 잡으며 어떤 곳이든지 시장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모든 국가의 부르주아지들은 생산과 소비의 전 세계적인 특징을 기초로 세계시장을 개발한다.” 선진 경제의 자본가들이 “그들이 서 있는 국민적 기반을 탈피하여” “구산업을 파괴하고” “새로운 산업으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 시대만의 특징은 아니다. “국내 생산에 의해 충족되는 수요를 넘어서서, 자신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나라의 제품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수요를 찾아낸다. 지역적·국가적 분단과 자급자족 대신에, 이제 모든 나라와의 교류와 국가들 간의 전체적인 상호 의존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부도덕한 코끼리』
맑스는 ‘이윤율 하락의 경향성 법칙’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산업 자본주의하에서 이윤율은, 마치 자연계의 어떤 체계 안에서 엔트로피가 점차 증가하면서 그 체계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것처럼 점차 감소할 수밖에 없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잉여가치가 불가피하게 감소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산업자본주의는 스스로 파국으로 치닫는 경향성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맑스는 외국과의 무역이 이런 파국의 경향성을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폐쇄된 체계 내에서의 자본주의 운동은 스스로 파국으로 치닫게 되지만, 이 체계를 확장함으로써 이런 경향성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해외무역에 투자된 자본은 높은 이윤율을 낳게 해줍니다. 우수한 생산 설비를 갖춘 국가의 산업자본이 그런 설비를 갖추지 못한 외국에서 더 많은 이윤을 얻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후진국에서는 값싼 노동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잉여가치를 부단히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산업자본은 폐쇄된 민족국가라는 모델 안에서 안주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산업자본의 세계적 팽창 현상이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선 세계사적으로 살펴보면 두 차례에 걸쳐 발발한 세계대전도 바로 이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산업 자본주의 국가들이 기존의 다른 산업자본주의 국가들이 지닌 ‘식민지-시장’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인 것이니까요. 이것은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코끼리들 사이에서 벌어진 목숨을 건 투쟁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최종 승자가 바로 미국과 미국에 속하는 산업자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미국에 거점을 둔 다국적 산업자본들이 더 이상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로 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이네요. 그들은 미국을 떠나 세계로 자신들의 시장을 넓혀가야만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 유명한 세계화 현상과 이것을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의 비밀이 놓여 있습니다. 윌리엄 탭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계 상류층의 20%가 세계 GDP의 86%를 얻고 있고, 하위 20%는 고작 1%를 얻으며, 중간의 60%는 겨우 13%만을 얻는다. 전 세계 200대 부자들의 수입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수조 달러나 늘어 두 배가 되었다. 세계 3대 부자의 자산은 가난한 48개국의 모든 소득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아졌다. 『부도덕한 코끼리』
윌리엄 탭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는 여전히 맑스의 관점이 적용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그는 일반 이윤율 하락의 경향, 산업자본의 해외 진출, 그리고 세계시장의 확보, 나아가 이에 수반되는 정보나 부의 독점 현상에 대해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세계화라는 것이 전 세계가 갈등과 분열을 벗어나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장밋빛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세계화는 미국 산업자본들만의 잔치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란 제3세계 약소국가들의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국가가 경제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은 결국 제3세계의 노동자들을 지속적인 실업의 위기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고질적인 저임금의 고통에 시달리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선 이래로 모든 세계사적 움직임은, 세계적 규모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과정이었다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경기 침체 혹은 일반 이윤율의 하락은 더 이상 민족경제의 활성화를 주장하는 케인즈주의적 정책이나 혁신적인 기술 진보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산업자본주의가 스스로 지속될 수 있는 해법이란 무엇일까요? 그 해법이 바로 세계화입니다. 세계화는 바로 이윤율 하락의 지속적 경향을 막고, 그 심층에서 잉여가치를 확보하려는 산업자본이란 탐욕스러운 코끼리의 의지입니다. 결국 제3세계는 모두 산업자본이 요구하는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의 주기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세계화가 극적으로 달성되기에 앞서, 산업자본은 폐쇄된 국민 경제 체계를 갖춘 국가들을 자유라는 하나의 이념을 통해 무장해제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팍스아메리카나(Pax-American)’,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산업 자본주의란 것이 만들어놓은 신성한 삼위일체(Trinity)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만약 세계화가 달성되어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경우 맑스의 ’이윤율 하락의 경향성 법칙’이 옳다면, 모든 것을 다 먹어치운 이 부도덕한 코끼리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우주로 나가게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굶어죽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와 세계화
우리의 현실은 단순한 산업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업자본이 국가를 탈출해서 세계로 탈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그저 현실로서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 엄마들도 이제는 아이가 우리나라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세계어인 영어를 아이의 머릿속에 각인시켜주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조기 영어 교육, 조기 영어 캠프, 영어 마을 등이 극성을 부리는 것이지요. 심한 경우 어떤 지식인은 당당하게 아예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몇몇 대학에서도 이제는 수업의 반 이상을 영어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세계화에 발맞추어 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결국 이 모든 현상은 미국 산업자본이 우리나라 출신의 미래 노동자를 재교육하는 비용을 줄이는 것에 불과한 일이 아닐까요?
세계는 하나라는 세계화의 화려한 구호를 의심하면서 우리는 일본이 말했던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념을 함께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가 모두 ‘함께 번영하자[共榮]’는 약속은 얼마나 솔깃한 것입니까? 그러나 결국 이런 이념을 외친 일본은 어떤 일을 벌였나요?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모두 일본의 식민지, 일본 산업자본의 시장으로 전락하지 않았던가요? 일본은 그 당시 한국어를 금지하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쓰도록 강제했습니다. 물론 명분은 일본과 우리나라는 하나니까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언어를 통일하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사실 이런 언어정책은 식민지 지배를 저비용으로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피지배자가 자신의 명령을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지배자는 먼저 피지배자를 교육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일제강점기에 이런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그대로 동참했던 몇몇 우리의 못난 조상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들 소수만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대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모조리 일본에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는커녕 스스로의 문화나 역사, 심지어 언어마저도 해체하려고 했던 일부 지식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일제강점기의 그들과 너무도 유사하게 몇몇 사람들은 세계화, 미국화가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짐짓 정색을 하며 이야기합니다. 마치 자신들도 슬프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윌리엄 탭이 제출한 이런 제3세계 지식인들의 기원에 대한 슬픈 보고서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제3세계에서의 정치적 지배 전략을 바꿀 수 있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제3세계의 독재자를 지지했다. 미국의 지지를 받은 독재 정권들은 ‘혁명적인’ 토지개혁, 노조의 조직화, 그리고 자유롭고 공평한 선거를 가로막으며 국가의 획일적인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고, 한편 미국 투자자들의 접근을 보장해주었다. (……) 1980년대와 1990년대경에도 가혹한 장군들과 그 측근의 가족 엘리트들에 의해 장악된 이들 권위주의 정부는 외국 및 국내기업들로부터 지대를 착취했고, 비생산적인 억압 기구들을 계속 유지했다. (……) 이 지배계급의 자손들 역시 결국에는 이들 나라의 정치 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주요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주변국의 엘리트들은 언제나 그들의 자손을 미국이나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레이건 대처시대에 그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자유 시장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그들 나라로 다시 되돌아가 자국 경제를 세계화의 조류에 맞게 스스로 변화시켜나갔다. 그들은 경영자 계급이 직접적인 군사 지배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규제 완화와 민영화라는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즉 그들은 귀국하여 자국 경제를 신자유주의에 따라 구조 조정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특정한 계급으로서, 국가주의 형태에서 시장 지배적 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국가가 소유한 자산을 민영화하면서 그로부터 큰 이득을 얻은 것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부도덕한 코끼리』
물론 이런 냉소적인 지적은 주로 남미나 중동의 친미 독재 정권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인식은 우리나라의 사정에도 상당 부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친미 독재 세력의 피에는 친일파의 피도 함께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잠시 친일파로부터 친미파로 이어지는 반역의 역사에 대해 회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일파의 기원은 조선 말 집권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있어야 권력을 팔아먹든 말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친일파들은 친일의 대가로 식민지 조선에서 엄청난 기득권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기득권을 토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일본에 유학 보낼 수 있었고, 장래의 지식인으로 키워 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서 이승만 정권과 연대하고, 반민특위를 해체시켜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박정희 정권과도 결탁하게 됩니다. 그들은 탁월한 현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현실주의는,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을 위한 현실주의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위한 현실주의였지요. 이렇게 얻어진 기득권을 통해서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미국의 산업 자본주의가 앞으로 대세가 될 것임을 내다볼 수 있는 정도의 안목은 충분히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그들의 자식들이 하나둘 우리 사회로 되돌아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과 세계화의 전도사가 되어서 말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지금 학계에서, 언론계에서, 관계에서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화는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막을 수 없는 추세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으니까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상품으로 그리고 화폐를 신으로 만드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서 고단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 올지 모를 먼 훗날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이제 세계화라는 거역하지 못할 현실 속에서, 우리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힘든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행복은 우리로부터 더 멀어지겠지요.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속에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 소비의 자유만이 존재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니 그런 방법마저도 완전히 잊었다고 말해야 옳을 겁니다. 오직 잘 팔리는 상품으로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습니다.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학원에 나가지만, 역사 강의를 듣는다거나 혹은 판소리를 익히기 위해서 편안하고 여유 있게 학원에 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역사, 문학, 철학, 판소리 등을 배워서 무엇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여러분을 구매할 산업자본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념하에서 국가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복지를 제공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국가기구에 속한 정책 결정자들이나 재계나 학계에 있는 기득권자들은 오히려 반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를 보호하면 가난을 지속시킬 뿐이라는 궤변으로 그들은 자유주의 원칙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념에 따라 그들은 시장을 개방하고 관세를 줄임으로써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들어냈습니까? 이제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비정규직이 차지하고 있지요. 우리 정부는 이들도 취업자로 분류함으로써 실업률이 크게 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질적 실업률은 도리어 IMF【IMF는 세계은행(IBRD)과 함께 국제금융기구의 양대 축인 국제통화기금을 말한다. IMF는 가맹국의 출자로 공동의 기금을 만들어 각국의 외환자금조달을 원활히 하고자 1947년 3월에 설립되었다. IMF는 각 회원국이 그 경제 규모에 따라 투표권을 갖는다. 따라서 IMF는 애초에 미국 등 서방 선진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도록 고안된 것이다. 가령 미국은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지만 IMF에서의 투표권은 17%나 갖는다】 구제금융 사태 이전보다 더 크게 늘어난 셈입니다. 어떻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삶의 행복을 추구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대 절반 이상이 바로 이런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비정규직이 확대되는 조치를 정부가 오히려 묵인하고 있다는 것은, 정부가 이제 대다수 국민 편이 아니라 산업자본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계인권선언(Univer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세계인권선언은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에서 발표되었다. 전문(前文)과 본문 30개 조로 되어 있는데, 그중 제21조까지는 시민적ㆍ정치적 성질의 자유, 즉 자유권적 기본권에 관한 규정이다. 그리고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성질의 자유, 즉 생존권적 기본권에 관해서도 상당히 배려하고 있으며,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22조), 노동권과 공정한 보수를 받을 권리 및 노동자의 단결권(23조) 등에 관해서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은 모든 이가 노동하고 자유롭게 일자리를 선택할 권리, 그리고 정의롭고 공평한 노동조건을 보장받고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 세상의 주인인 자본가가 세계를 자기 뜻대로 만들기 위해 국제화된 국가와 국내 대리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새로운 봉건주의를 만들어내려는 자본의 뻔뻔함이 극도에 달한 이 시대에 세계적 금융기관, 초국적 기업 그리고 정부가 우리로부터 무엇을 약탈해가려고 하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명심해야만 한다. 자본의 권리보다 인권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인식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계급의식에 기초한 정치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도덕한 코끼리』
자본주의는 신처럼 이 세계에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대리인들은 마녀사냥을 주도했던 제사장들처럼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우리 자신을 부단히 상품으로 만들고, 우리의 행복을 잠식해 들어가는 체계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세계화에 맞서기에는 자본에 너무나도 깊숙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맞서는 것과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용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만이 자본의 노예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까지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자유롭고 공평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얻어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려야만 하는 최소한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뿐이거나, 아니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나라의 형제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겠지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더 읽을 책들
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김호균 옮김, 서울: 청사, 1998)
자본주의의 모든 비밀은 기본적으로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양자는 등가인 것처럼 교환되지만, 화폐가 상품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유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김경원 옮김, 서울: 이산, 1999)
화폐와 상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통찰을 인문학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맑스의 사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학, 언어학에 대한 이해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윤수종 옮김, 서울: 이학사, 2001)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제국을 분석하고, 이것에 대항할 수 있는 대중의 활동을 예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통찰하고,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새로운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반자본주의선언』 (정성진 정진상 옮김, 서울: 책갈피, 2003)
지금은 세계화와 신자본주의가 어떤 견제도 없이 폭주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책은 세계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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