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향연
이처럼 이덕무(李德懋)나 이옥(李鈺)의 문장들은 짧은 건 두세 줄, 길어야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소품들이지만, 중세적 사유의 뇌관을 터뜨릴 만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투성의 더께가 내려앉은 고문의 틀에서 벗어나 눈부신 생의 경계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린아이, 여성, 예인(藝人) 등 ‘소수적인’ 존재들에 주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처럼 한편으론 기존의 중심적 가치를 전복해버리고, 다른 한편으론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즉 중세적 표상 외부에 있는 사물들을 문득 솟구치게 하는 것이 바로 소품의 위력이다. 그런 점에서 소품문은 ‘잃어버린 사건들’, ‘봉쇄되었던 목소리들’이 각축하는 향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품은 길이가 짧다는 것뿐 아니라, 자질구레한 사물들을 다룬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 것”과 “시장에서 사람들이 사고파는 것”, “사나운 개가 서로 싸우는 것”과 “교활한 고양이가 재롱을 떠는 것”, “봄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것”과 “가을 나비가 꽃 꿀을 채집하는 것” 등등. 그것들은 “지극히 가늘고 적은 것”이지만 무궁한 조화의 표현이다. 미세한 차이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즉 “홀로 봄숲에 우는 새는 소리마다 각각 다르고, 해시(海市)에서 보물을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새롭다[獨其聽禽春林, 聲聲各異, 閱寶海市, 件件皆新]”.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모든 것이 다 시”가 되는 것이다.
이옥(李鈺)의 작품 가운데 「시기(市記)」라는 글이 있다. 삼가현이라는 시골의 장터를 점사점포의 작은 창구멍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주내용이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을 안고 오는 자”로 시작하여,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리고 가져오는 자” “손을 잡아끌면서 희희덕거리는 남녀” “넓은 소매에 긴 옷자락 옷을 입은 자, 솜도포를 위에 입고 치마를 입은 자” 등등 별의별 인간군상을 한없이 늘어놓는다. 주제는? 없다. 그저 세모(歲暮)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상에 엇비슷이 기대어 시장의 모습을 엿보고 있을 따름이다. 이 경우 소품이란 미시적인 세계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러나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문장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문장이란 무릇 저 천상의 가치, 곧 천고의 역사와 우주의 이치를 논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소품문들은 지극히 섬세한 정감의 떨림을 드러내 사람들로 하여금 한없는 슬픔에 잠기게 하지 않으면, 작고 미세한 것들을 밑도 끝도 없이 주절대 시선을 흩어버리지 않는가. 이런 데 빠져들면 사대부들의 존재근거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고문으로 표상되는 거대담론이 사라진다면, 사(士) 계급은 대체 무얼 의지해 통치이념을 구축한단 말인가. 그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작은 것들의 향연 속에서 고문의 권위는 차츰 해체되어갔다.
배후 조종자답게 연암은 도도한 어조로 당시의 배치를 이렇게 묘파한다.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曰似已非眞]” “눈앞 일에 참된 흥취 들어 있는데 / 하필이면 먼 옛것을 취해야 하나[卽事有眞趣 何必遠古抯]” “반고나 사마천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 반고나 사마천(司馬遷)을 결단코 모방 아니 할 걸[班馬若再起 决不學班馬]” 어설프게 고문을 본뜨지 말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눈뜨라는 것이다.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이 위대한 건 바로 그런 경지를 확보했기 때문인데, 그걸 보지 못하고 그저 베끼기에만 골몰하다니. 그들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전혀 새로운 문장을 만들지, 예전 자신들이 썼던 문장을 본뜰 리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난 시대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때가 천근(淺近)하다 이르지 마소 / 천 년 뒤에 비한다면 당연히 고귀하리[莫謂今時近 應高千載下].”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