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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3장 인간을 넘어 주체를 넘어, 네 이름을 돌아보라!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3장 인간을 넘어 주체를 넘어, 네 이름을 돌아보라!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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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을 돌아보라!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먼지로 이루어졌을 뿐인데, 인간과 인간 아닌 것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이렇게 되는 순간, 인간 내부의 경계 또한 무의미해진다. 즉 개별인간들에게 부과된 고유한 정체성 역시 불변의 위치를 고수할 이유가 없다. 인연조건에 따라, 배치에 따라 일시적인 주체로 호명될 따름이지, 근원적으로는 모두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은 자아의 영원성을 지키기 위해 안달한다. 무엇보다 이름이 그러하다. 이름이란 대체 무엇인가? 한번 자신의 이름을 돌아보라!

 

 

卽此汝名 匪在汝身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在他人口 隨口呼謂 남의 입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卽有善惡 卽有榮辱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卽有貴賤 妄生悅惡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以悅惡故 從而誘之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從而悅之 從而懼之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又從恐動寄身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齒吻茹吐 在人不知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汝身何時可還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선귤당기(蟬橘堂記)

 

 

이 글은 연암의 직접화법이 아니다. 연암은 종종 제 삼자의 입으로, 즉 삼인칭으로 말하곤 한다. 여기서 언표주체는 매월당의 스승인 큰스님이다. 매월당 김시습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을 버리고 법호를 따를 것을 원하니[懺悔佛前 發大證誓 願棄俗名而從法號]”, 큰스님이 손바닥을 치며 웃고는 위와 같이 일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언표는 발화주체에게로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표의 배후에 있는 또 다른 주어, 곧 연암의 목소리와 겹쳐진다.

 

이름이란 기본적으로 타자의 호명이다. 타자의 호명에 따라 영욕, 귀천, 애증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침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譬彼風聲 聲本是虗 着樹爲聲 反搖動樹 汝起視樹 樹之靜時 風在何處]?” 이름 또한 마찬가지다.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아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不知汝身 本無有是 卽有是事 廼有是名 而纏縛身刦守把留 ].”

 

 

身之旣多 臃腫闒茸 몸이 이미 여럿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되어
重不可行 雖有名山 무거워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비록 명산이 있어
欲遊佳水 爲此艮兌 좋은 물에서 놀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움이 그치고
生悲憐憂 有好友朋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며, 사이좋은 친구들이
選酒相邀 樂彼名辰 술상을 차려 부르면서 이 좋은 날을 즐기자고 말을 해도
持扇出門 還復入室 부채를 들고 문을 나서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念此卦身 不能去赴 이 몸에 딸린 것을 생각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이 지닌바 그 무거움을 몸뚱아리가 어찌 견딘단 말인가.

 

타자의 호명, 가족, 정체성 등 이름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및 그것이 만들어내는 중력의 법칙을 이보다 더 첨예하게 제기한 텍스트가 있을까. 이런 이슈들은 1990년대 이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제기된 사안들이라는 점을 환기하면, 이 글이 던지는 물음은 더 한층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남는 문제는 이름의 중력을 어떻게 떨칠 것인가로 귀착된다. 연암 윤리학의 정점인 탈주체화의 여정은 여기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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