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 물성은 같다!
18세기 철학사의 주요한 이슈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 될 것이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같은가? 다른가? 이것을 둘러싸고 연임이 속한 노론 경화사족들 내부에서 한바탕 논란이 벌어진다. 기본적으로 동양의 사유는 인성과 물성을 연속성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인간과 외부 사이에 확연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 인식의 근본전제이기 때문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혹은 천인합일(天人合一) 이 도의 궁극적 지향점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전제를 공유하면서도 그 내부에서는 인성/물성의 차이 및 상대적인 위계를 강조하는 쪽과 그 둘의 연속성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입장이 갈라졌던 것이다. 후자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담헌 홍대용(洪大容)이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理)가 있고, 물(物)에는 물의 이가 있다. (중략) 초목의 이는 곧 금수의 이이고, 금수의 이는 곧 사람의 이이며, 사람의 이는 곧 하늘의 이이다. 이라는 것은 인과 의(義)일 따름이다. 『담헌서』, 「심성문(心性問)」
오륜과 오사(五事)가 인간의 예의라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함께 먹이를 먹는 것은 금수의 예의고, 군락을 지어 가지를 뻗는 건 초목의 예의다. 인간의 입장에서 물을 보면 인간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면 물이 귀하고 인간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은 균등하다. 「의산문답(醫山問答)」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羣行呴哺 禽獸之禮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義也 以人視物 人貴而物賤 以物視人 物貴而人賤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
이를테면 홍대용(洪大容)은 인성과 물성이 균등하다는 ‘인물균(人物均)’을 펼친 것이다. 이를 이어받아 연암은 ‘인물막변(人物莫辯)’, 곧 인성과 물성은 구별할 수 없다는 입장을 펼친다.
「호질(虎叱)」이 그 대표적인 텍스트다. 흔히 「호질(虎叱)」은 타락하고 위선적인 사대부에 대한 풍자가 핵심이라고 간주되지만, 더 중요한 포커스는 범의 시점으로 인간 일반을 바라보는 데에 있다. 범은 말한다. “대체 천하의 이치야말로 하나인 만큼 범이 진정 몹쓸진대 사람의 성품도 역시 몹쓸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할진대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지니[夫天下之理一也. 虎誠惡也, 人性亦惡也, 人性善則虎之性亦善也]”, 그런즉 인간의 도(道)보다 범의 도가 더 광명정대하다고.
말과 소가 수고를 다하여 짐을 싣고 또 복종하며 성심껏 네놈들의 뜻을 받드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푸줏간이 쉴 새도 없이 이들을 도살해서는 그 뿔과 털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것도 모자라 노루와 사슴까지도 잡아먹어버려, 산과 들에는 우리가 먹을 게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늘이 이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한다면 네놈을 잡아먹는 것이 마땅하겠느냐, 놓아주는 것이 마땅하겠느냐.
然而不有其乘服之勞, 戀效之誠, 日充庖廚, 角鬣不遺. 而乃復侵我之麕鹿, 使我乏食於山, 缺餉於野. 使天而平其政, 汝在所食乎所捨乎?
대개 남의 것을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 생명을 해치고 남에게 못된 짓 하는 것을 적(敵)이라 한다. 너희들은 불철주야 팔을 걷어 붙이고 눈을 부라리며,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심지어는 돈을 형(옛날 돈은 구멍이 났으므로 공방형孔方兄이라 불렀음)이라 부르질 않나, 장수가 되려고 제 아내를 죽이질 않나,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 (중략)
夫非其有而取之, 謂之‘盜’ 殘生而害物者, 謂之‘賊’ 汝之所以日夜遑遑, 揚臂努目, 挐攫而不恥. 甚者, 呼錢爲兄, 求將殺妻, 則不可復論於倫常之道矣. (中略)
춘추시대에는 덕치를 행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일으킨 전쟁이 열일곱 번이었고, 보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싸움이 서른 번이었다. 흘린 피는 천리에 이어지고 쓰러진 시체는 백만 구나 되었다. 그렇지만 범의 세상에서는 홍수나 가뭄을 알지 못하기에 하늘을 원망하는 법도 없으며, 원수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므로 다른 존재들에게 미움을 살 일도 없다. 천명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므로 무당이나 의원의 간사한 속임수에 넘어가지도 않고, 타고난 바탕 그대로 천성을 온전히 실현하므로 세상 잇속에 병들지 않는다. 범을 착하고도 성스럽다[睿聖]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春秋之世, 樹德之兵十七; 報仇之兵三十, 流血千里; 伏屍百萬. 而虎之家水旱不識, 故無怨乎天; 讐德兩忘, 故無忤於物, 知命而處順, 故不惑於巫醫之姦; 踐形而盡性, 故不疚乎世俗之利, 此虎之所以睿聖也.
사실 자연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만큼 포악하고 잔인하며 비굴한 종(種)도 없다. 남의 것을 무단으로 착취하고 돈을 숭배하며 어설픈 명분으로 전쟁을 일삼는다. 그에 비해 포악한 것처럼 보이는 범은 오히려 천명에 따라 사는 성스러운 존재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온갖 허위의식으로 치장해 자신을 으뜸으로 삼으면서 다른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차별한다. ‘인간 외부’의 시선으로 인간 보기 —— 「호질(虎叱)」의 진짜 문제설정은 이것이다. 북곽선생(北郭先生, 「호질」에 등장하는 고매한 척하는 선비)과 동리자(東里子, 「호질」에 등장하는 수절을 잘한다고 알려진 젊은 과부)의 위선을 과격하게 풍자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인간과 사회를 넘어서는 ‘에콜로지컬(ecological)한 비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의 입을 빌려, 연암은 단호하게 말한다.
네놈들은 이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때, 걸핏하면 하늘을 끌어들이지만, 하늘이 명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든 사람이든 다 같은 존재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인의 견지에서 논하자면, 범과 메뚜기ㆍ누에ㆍ벌ㆍ개미와 사람이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스르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汝談理論性, 動輒稱天, 自天所命而視之, 則虎與人, 乃物之一也. 自天地生物之仁而論之, 則虎與蝗蚕蜂蟻與人並畜, 而不可相悖也.
▲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동물은 표(豹)이다. 호랑이와 표범 사이쯤에 있는 종류인 듯했다. 예리한 눈빛, 순식간에 180도 회전을 할 수 있는 날렵함에서 야생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창살 너머로 보는 그 모습에 어딘가 우울함이 묻어 있다. 인성과 물성은 구별할 수 없다 했던 연암이 순전히 인간의 오락거리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동물원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