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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연암과 다산: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 오만과 편견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연암과 다산: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 오만과 편견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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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연암 박지원(1737~1805)과 다산 정약용(1762~1836). 이 두 사람은 조선 후기사에 있어 그 누구와도 견주기 어려운 빛과 에너지를 발산한다. 두 사람이 펼쳐놓은 장은 17세기 말 이래 명멸한 수많은 천재들이 각축한 경연장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이성의 지대이다. 그래서인가? 그들이 내뿜는 빛에 눈이 부신 탓인가?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서로 유사한 계열로 간주하고, 그렇게 기억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뜻 엿보았듯, 그들은 한 시대를 주름잡은 천재요 거장이라는 공통점 말고는 유사성을 거의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둘은 마치 인접항처럼 간주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둘을 비춘 렌즈의 균질성이 차이들을 평면화했기 때문이다. ‘중세적 체제의 모순에 대해 비판했고, 조선적 주체성을 자각했으며, 근대 리얼리즘의 맹아를 선취했다는 식으로, 실학담론으로 불리는 이런 평가의 저변에 근대, 민족, 문학이라는 트라이앵글이 작동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비단 연암과 다산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온갖 징후들을 근대성으로 재영토화하는 동일성의 기제이기도 하다. 이 장에 들어오는 한, 차이와 이질성이 예각화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텍스트가 근대적인 것에 근접한가 아닌가 하는 척도로 계량화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근대적 사유가 지닌 원초적 오만이 작동하고 있다. 오만이 낳은 무지와 편견!

 

연암과 다산은 18세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중세의 외부를 사유했고, 실천했으며, 또 전혀 상이한 방식으로 근대와 접속했다. 근대적 척도의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봉쇄되었던 차이와 이질성들을 자유롭게 뛰어놀게 할 수 있을 터, , 이제 그 장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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