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西學), 또 하나의 진앙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서학이 그것이다. 정조 집권시에는 노론계열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패사소품 외에도 남인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던 서학 역시 정치적 소용돌이를 야기하는 또 하나의 진원지였다. 그럼에도 정조는 유독 전자를 문제삼음으로써 후자를 적극 보호해주었다.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지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청초의 문집들부터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서학과 패관잡기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언뜻 비약과 모순투성이로 보이는 이런 논법의 속내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서학은 교리가 너무 이질적이어서 솎아내기가 쉽지만, 패사소품은 은밀하게 침투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부를 교란한다는 것.
이것은 노론과 남인 사이의 균형, 곧 탕평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전략의 투영일 터이지만, 각도를 조금 달리 해서 보면 아주 흥미로운 논점을 내포하고 있다. 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서학은 확연히 구별되는 ‘외부의 적’이라면, 패사소품은 은밀하게 삼투하는 ‘내부의 적’이다. 명료하게 대척되는 외부의 적은 포획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에 통제불가능한 변이체들을 만들어내는 내부의 적에 비해 덜 불온하다. 개별인간이든 왕조든 혹은 지하조직이든 언제나 내부가 흔들릴 때 가장 위험한 법, 그렇다면 정조는 정치적 전략의 차원을 넘어 무의식적으로 서학보다는 패사소품의 파괴적 잠재력을 감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럼 여기에 대한 다산의 입지는 어떠했는가? 논란이 많긴 하지만, 다산은 천주교 신자는 아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젊은 시절 친지와 가족들의 영향으로 서학에 깊이 경도되었으나 이후 “지식이 차츰 자라자 문득 적수로 여기고, 분명히 알게 되어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의 수락 여부가 아니다. 신앙적 차원에서는 그 자신이 “얼굴과 심장을 헤치고 보아도 진실로 나머지 가린 것이 없고, 구곡간장(九曲肝腸)을 더듬어 보아도 진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서학과 결별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식론적 기저에 각인된 흔적까지 지우기란 쉽지 않다. 그가 구축한 담론의 체계는 분명 심층의 차원에서 서학의 그것과 직간접으로 공명하고 있다. 특히 ‘상제(上帝), 신독(愼獨)’ 등의 개념이 지닌바 구조적 동형성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건 아니건 이미 그의 사유는 중세적 지배질서와 동거하기 어려운 ‘외부의 하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정조시대에는 정조의 적극적 비호로 그 적대성이 첨예하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연암은 서학을 대체 어떻게 평가했을까? 『열하일기』에서 보았듯이, 다른 북학파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서양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그저 불교의 윤회설보다 좀 낮은 수준의 ‘버전’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면천군수 시절엔, 천주교에 빠진 지방민들을 각개격파식으로 설득해서 모두 전향(?)하게 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즉, 그에게 있어 서학은 ‘신종 이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다산과 연암은 중세적 담론 외부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둘이 그린 궤적들은 결코 마주치기 어려운 포물선을 그린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포물선의 배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분명 하나의 ‘특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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