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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2분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2분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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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선현계청분(善現啓請分)

 

 

2-1.

이 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 長老須菩堤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著地, 合掌恭敬而白佛言:

, 장로수보제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이백불언:

 

 

소명태자의 분의 이름은 4자의 제약 때문에, 수보리(須菩提)라는 3글자 이름을 쓸 수 없으므로, 그것을 줄여 표현한 것이다. ‘선현(善現)’은 바로 수보리(須菩提, Subbūti)를 의역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후에 현장(玄奘)은 바로 이 의역을 채택하였다. ‘세존(世尊)’과 같은 것은 박가범(薄伽梵)’이라고 음역하고, 막상 수보리(須菩提)와 같은 사람의 고유한 이름은 의역해버리는 현장(玄奘)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역시 장불급집(奘不及什, 현장이 꾸마라지바에게 못 미친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장로(長老)는 또 구수(具壽)’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썼다. 그리고 의정(義淨)선현(善現)’묘생(妙生)’이라고 달리 의역하였다. 선현(善現)은 또 선현천(善現天, sudṛśa)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색계십팔천(色界十八天)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기청(起請)’이란 자리에서 일어나 청한다는 뜻이다.

 

장로(長老)’‘āyuṣmat’의 의역으로, 덕행(德行)이 높고 나이가 많은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를 통칭하는 말이다. 현장(玄奘)구수(具壽)’라는 표현을 썼고, ‘대덕(大德)’, ‘존자(尊者)’, ‘혜명(慧命)’, ‘정명(淨命)’, ‘명자(命者)’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장로(長老)는 젊은 비구가 늙은 비구를 높여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지만 때로는 나이 많은 비구가 젊은 비구를 가리켜 부를 때에도 쓰인다. 따라서 한역불전에서는 명확한 구분이 없이 쓰인다. 한역불전 이전에도 중국에서는 나이 먹은 사람이나 학덕을 구유한 사람을 부르는 일반칭호로 쓰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에서 이 불교칭호를 빌어 ‘Elder’에 해당되는 용어로 현재 쓰고 있다는 것이다.

 

수보리는 불타의 십대제자(十大弟子)의 일인으로 보통 만다라 그림 속에서는 부처의 좌방상열중(左方上列中), 대목건련(大目犍連)과 대가섭(大迦葉)의 사이에 자리잡는다.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의 자제라고도 하고, 또 일설에는 사위성(舍衛城)에 살던 상인(商人)이었다고도 한다. 사위성 부근에 건립되었던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준공을 기념하여 부처가 설법을 했는데, 그 때 그 설법을 듣고 감동받아 출가하였다고 한다. 물론 수보리와 석가모니와의 만남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다른 설화들이 전래되고 있다. 수보리는 기원정사를 기진(奇進)한 대부호(大富豪) 수달(須達), 즉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의 동생 스마나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수달(須達)의 조카인 셈이다. 그에게는 제일(第一)’의 칭호가 여러 개가 붙는데 제일 많이 붙는 것이 무쟁제일(無諍第一)’이다. 즉 교화활동을 벌이는데 있어 외도(外道)로부터 온갖 비난과 중상과 박해를 받아도 결코 그들과 다투지 않고 쟁론을 벌이지 않는다는 무쟁삼매주의자(無靜三昧主義者)로서 항상 유화하고 원만한 인격을 유지하였다(금강경99절 참조). 나를 비난하는 자들과 다투지 않는다는 것도 삶의 큰 지혜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따랐고 그를 대접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또 공양제일(供養第一)’의 칭호가 붙었다. 그리고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하며 변재가 뛰어나 색상제일(色像第一)’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에게 따라다니는 해공제일(解空第一)’이다. 법화경(法華經)에 의하면 그의 출생설화부터가 ()’과 관련이 있어 그의 이름을 공생(空生)’ 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항상 공()과 무상(無常)의 도리를 가장 잘 깨달았다. 그의 무쟁주의(無諍主義)의 이면에는 철저한 공()의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붓다와 수보리 사이에서 이 대화가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금강경의 기자가 수보리가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는 칭호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를 등장시켜 부처님께서 이 무상무주(無相無住)의 금강의 지혜를 설파(說破)하시도록 연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보통 싯달타라고 하면 카필라성()의 왕자요,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화려한 생활을 염기(厭棄)할 정도로 누린 그러한 지고(至高)의 신분의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그러한 이야기는 불타설화작가들이 그려낸 픽션에 불과하다. 카필라성을 오늘 실측해 보면 동서(東西) 400m에 남북(南北) 50미터의 아주 촌구석 산중턱에 있는 자그만 촌락(村落)에 불과하다. 샤캬는 아주 작은 소규모의 종족으로, 역사적 싯달타의 배경은 브라만의 이념을 거부하는 이러한 종족신앙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수보리의 배경은 싯달타에 비해 훨씬 화려하다. 카필라바쯔와 사위성(舍衛城)의 규모는 비교도 안된다. 사실 싯달타는 강원도 감자바위 촌놈쯤 되는 사람이요, 수보리는 서울의 부유한 문물을 다 향유한 사람이라 보면 된다.

 

수보리는 브라만계급의 자제일 뿐아니라 부유한 집안의 사람이다. 그리고 도시인에 걸맞는 미모와 수려한 자태를 지녔고 변재(辯才)도 뛰어났다. 그리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함부로 남과 다투지도 아니했고 철저한 비폭력주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에게 항상 대접을 잘 받는 존경스러운 사람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비우고 집착함이 없는 공()의 사람이었다. 무쟁(無諍)제일, 공양(供養)제일, 색상(色像)제일, 해공제일이라는 칭호를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금강경드라마의 두 주인공의 설정 이유를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맞상대가 되는 것이다. 조금도 한쪽이 기울지 않는 것이다. 최고의 진리는 고수(高手)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께임일 수밖에 없다.

 

대중(大衆)이 모두 조용히 앉아있는 장면에서 갑자기 수보리가 일어서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일어섬은 의문의 제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편단우견(偏袒右肩)’()’벗긴다는 본동사이고 우견(右肩, 오른쪽 어깨)이 그 목적어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우리나라의 번역들이 이를 애매하게 처리하고 있다. 옷을 걸치는 것은 왼쪽 어깨에 걸치는 것이다. ‘()’의 의미는 왼쪽 어깨 한쪽에 옷을 걸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우리가 석굴암의 십대(十大)제자의 석상들을 보면 이러한 정황을 명료히 알 수 있다. 3(第三像)의 모습이 명료하게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모습이다. 타상(他像)들에는 양쪽 어깨에 모두 옷이 걸쳐있는 것으로 보아 항상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한쪽으로 옷을 가다듬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행위의 과정이 이 자리에서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단우견(偏袒右肩)에 대해서는 역대 주석가들의 의미부여가 없다. 어떤 이는 더위 때문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사죄의 의미라 하기도 하나, 모두 합당치 않다.

 

내가 생각키에 존경하는 스승에게 내 몸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자기를 낮춤으로서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즉 자기를 비우는 표시인 것이다. 즉 알몸뚱이로 그대 앞에 배움을 청한다고하는 겸손의 뜻인 것이다. 그것은 비움이요, ‘여래(如來) 즉 자연(自然)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라집역(羅什譯)의 해인사판본에는 ()’이 모두 ()’로 되어 있다. ()도 물론 여기서는 으로 읽어야 한다. ‘우슬착지(右膝著地)’, 그 자세가 아름답다. 일어섰다고 해서 뻣뻣이 치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손을 공손히 모아 절하고 어른께 여쭙는 모습은 지금 남방에 가면 그냥 그대로 목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예법이다.

 

 

 

 

2-2.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주십니다.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희유세존! 여래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산스크리트 원문을 무시하고 집본(什本)을 그대로 볼 때에 희유(希有)’는 세존(世尊)을 수식하는 형용구로 볼 수밖에 없다. ‘참으로 드물게 있는 세상의 존귀하신 분이시여!’의 뜻이 될 것이다. 세존(世尊)은 이미 상설(詳說)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호칭으로 부를 때는 세존(世尊)’이라는 말을 쓰고, 구체적인 문장의 주어로 쓰일 때는 여래(如來)’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집(羅什)이라는 탁월한 번역자의 숙달된 맛에서 생겨난 것으로 산스크리트 원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세존(世尊), 여래(如來) 동일한 대상을 여러 말로 달리 부름으로써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또 문의(文義)의 다양함을 꾀하고 있다.

 

여래(如來)’ 또한 십호(十號)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것은 불타시대에 자이나교 등 기타 타종교에서도 뛰어난 종교인들에게 붙이는 일반칭호로서 통용되고 있었다. 그것을 초기승단에서 싯달타에게 사용한 것일 뿐이다. 산스크리트 원어 ‘tathāgata’의 어원(語源)이나 원의(原義)는 사실 확정되어 있질 않다. ‘그와 같은(tathā) 경지(gati)에 간 사람이라 하여 보통 존경스러운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는 설이 가장 원의에 접근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 그냥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말이었기 때문에 초기불전에서 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교리적 해석은 부파불교(部派佛敎)시대에 와서 행하여진 것이다. ‘tathā’그와 같이’, ‘여실(如實)의 뜻이다. ‘gata’갔다의 뜻이고, ‘āgata’왔다의 뜻이다. 교리적 해석으로, 이를 tathā+āgata로 보아 과거의 불()처럼,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왔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tathā’를 여여(如如), 진리(眞理)의 세계로 보아 진실(眞實)로부터 왔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원을 ‘tathā-gata’로 볼 수도 있으며, 이렇게 되면, ‘과거의 제불(諸佛)과 같은 모습으로 갔다.’ ‘진리의 세계로 갔다의 뜻이 된다. 전자의 뜻으로 새기면 여래(如來)’가 되고, 후자의 뜻으로 새기면 여거(如去)’가 된다. 그러나 여거(如去)’라는 한역은 드물게 발견된다. ‘여래(如來)’라는 한역술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후한(後漢)의 안세고(安世高). 그 뒤로 여래라고 하면 여여(如如) 즉 진리의 자리로부터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구제자적 성격(Saviorism)을 명료히 띠면서 중국인들의 심상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여기 ()’(well)’이라는 뜻의 부사로서 동사를 수식한다. 한자(漢字)의 고의(古義)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 ()’이라는 글자만 보면 무조건 현대어의 선ㆍ악의 선(Goodness)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라는 글자는 본시 그러한 도덕적 이원성을 전제로 한 글자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니고 잘 돌아가면선이고, ‘잘 안돌아가면악일 뿐이다.

 

선ㆍ악의 구분이 본시 없는 것이요, 그 구분근거는 이라는 부사적 근거밖에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기 바란다.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쉽게 습합(習合)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중국인들의 언어에 내재하는 이런 생각의 틀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말은 대부분이 원래의 우리 말이 아니요, 서양말에 우리말의 발음적 외투만을 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깊게 깨달아주기 바란다.

 

호념제보살(護念諸菩薩)’, ‘부촉제보살(付囑諸菩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이 문맥에 등장하고 있다. 우선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두(冒頭)에 이미 언급했듯이, 내가 번역하고 그 뜻을 밝히려는 것은 정확하게 라집(羅什)의 한역 금강경이라는 것이다. 즉 산스크리트 원본에 의한 의미규정이 선행되는 것이 아니라, 라집의 한문 자체 내에서 형성되어 1,600년 동안 한자문화권의 사람들에 의하여 수용된 의미체계를 우선적으로 밝힌다는 것이다. 여기의 라집의 번역은 산스크리트 원문의 번쇄함을 아주 축약하여 간결하게 변형시킨 것이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여기 비로소 최초로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긴장감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다.

 

여기 한문의 뜻은 산스크리트 원문과 정확히 일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문을 살펴보면 호념(護念)최상의 은혜로 되어있고, 부촉(付囑)최상의 위촉으로 되어 있다. ‘최상의 은혜로 은혜를 입어왔다.’ ‘최상의 위촉으로 위촉되어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는 라집역(羅什譯)의 내재적 맥락에서 진행될 것이다.

 

호념(護念)’이란 잘 보호하고 잘 생각해주신다는 뜻이다. ‘부촉(付囑))’이란, 요새 우리말로 위촉(委囑)’이란 말과 동일하다. 간단히 말하면 잘 부탁한다는 뜻이다. ‘()’부탁한다.’ ‘맡긴다의 뜻이다. ‘()’ 역시 비슷한 뜻이다. 여기서 잘 부탁한다. 당부한다라는 뜻은 실제로 격려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전체의 뜻을 풀면 지금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해주시고(to protect), 잘 격려해주시고(to encourage) 계십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 해석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보살의 의미이다. 왜 여기 보살이라는 말이 등장했는가? 바로 이 금강경의 기자는 방금 탄생한 대승보살의 혁명운동의 대변자로서 수보리를 내걸었다. 여기 수보리는 부처님께로부터 직접 확약을 보장받고 싶은 것이다. 수보리가 최초로 불타에게 던진 말은 대승보살운동에 대한 불타의 보호ㆍ지지ㆍ격려의 확약에 대한 인증이다.

 

부처님! 부처님은 분명 지금 우리 보살대중혁명운동을 찬성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계시죠?”

 

그럼 부처님께서 뭐라 말씀하시겠는가?

 

그래! 나는 너희들의 운동을 지지하고 보호하고 격려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아무리 지지하고 보호하고 격려한다 하더래도, 바로 그 보호와 격려를 받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보살운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는가? 보살이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들이다. 바로 보통사람들이다. 아라한이 아닌 유정(有情, 의식 있는)의 모든 사람들이다.

 

데모는 왜 하는가? 춘투는 왜 하는가? 정치는 왜 하는가? 그래! 나는 데모를 지지한다! 그러나 데모자들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은 데모를 지지한다는 후원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덧없는 소리인 것이다. ‘운거영웅불자모(運去英雄不自謀, 운이 가니 영웅이라 한들 어찌해 볼 도리 없다)!’ 이것은 녹두 전봉준이 형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남긴 최후의 일언(一言)이다. 데모 지지? 그게 다 헛소리인 것이다. 나는 데모를 왜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보살운동을 하고 있는가? 과연 보살, 그것이 무엇인가? 보살! 보살! 보살은 무엇인가? 이 보살의 의미규정, 보살이 과연 어떠한 모습을 지닐 때 보살이 될 수 있는가? 보살이 과연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 보살의 의미규정의 핵심을 불타로부터 직접 듣고 싶은 것이다.

 

부처님! 우리는 보살운동을 막 시작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우리 운동을 지지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막상 보살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 뭐가 보살입니까?”

 

이에 도올은 말한다: “우리는 지혜 없이 자비를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2-3.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세존! 선남자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지혜는 마음의 문제다! 2-2에서의 질문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의 라집역도 산스크리트 원문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문의 맛보다 라집본의 맛이 더 명료하고 그 의취가 깊다.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란 불전에서 매우 관용구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특별히 선택된 승가의 멤버가 아니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보통사람들의 뜻이고, 여기서는 보살’(구도자求道者)의 다른 표현으로 등장한 것이다.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의 원어는 ‘kula-putra, kula-duhitṛ’이다. ‘kula’가족(家族)ㆍ종족(種族)’ 특히 양가(良家)’의 의미며, ‘()’과 정확히 대응되지는 않는다. ‘kula-putra’좋은 집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kula-duhitṛ’좋은 집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러니까 선남자(善男子)ㆍ선여인(善女人)’양가집 청년ㆍ양가집 규수정도의 의미가 정확히 대응된다.

 

그런데 여기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의 의미 속에는 암암리 대승보살이 다 죽어가는 늙은이들의 운동이 아니라, 생기팔팔한 젊은 이들의 운동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대승운동은 젊은 운동이요, 찌들리고 병든 사람들이 주창(主唱)하는 운동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집안에서 태어난 유족하고 너그럽고 건강한 젊은이들의 아주 상식적 운동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내 말을 듣는 늙은이들이 서러워할 것은 없다. 어차피 모든 늙은이들이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아니었든가? 대승운동은 영원히 젊은이들의 운동이다. 이들 젊은이들의 생각이 바르게 되어야만 비로소 늙은이들의 바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육조(六祖)가 선남자(善男子)를 평탄심(平坦心)ㆍ정정심(正定心)이라 하고, 선여인(善女人)를 정혜심(正慧心)이라 운운(云云)한 것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반야심경덕분에 우리 입에 많이 익은 단어다. ‘아뇩다라‘anuttarā’의 음역이다. 그것은 an(부정)uttara(보다 높은)의 합성어인데, ‘보다 높은 것이 없는의 뜻이다. ‘무상(無上)’으로 번역된다.

 

삼먁‘samyak’의 음역인데, 이것은 보통 형용사로서 완벽하다(complete)’는 의미인데, ‘samyañc’에서 왔다. 이것을 더 나누면 ‘sam+i+añc’로도 나누어 진다. 여기에는 같이 간다(going together)’라는 의미가 있다. 한역(漢譯)하여 정편(正徧)’, ‘정편(正遍), ‘정등(正等)’이라 하는데 ()’의 의미 속에는 두루두루 간다.’ ‘두루 미친다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삼보리‘saṃbodhi’인데 ()’, ‘정각(正覺)’의 뜻이다. ‘bodhi’가 원래 ()’의 뜻이다. ‘sam’함께(together)’, ‘완전한(complete)’, ‘같은(same)’ 등의 뜻이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접두사로서 어간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작용이 있다. 매우(very), 아주(very much), 철저하게(thoroughly), 완전하게(perfectly), 아름답게(beautifully)의 뜻이 있다.

 

우리가 한문번역에서 ()’자 때문에 이라는 양수개념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sam’의 음역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는 것이 좋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요 무상정편지(無上正遍知)’이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빼면 발심(發心)이 되는데, 이것은 즉 더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마음을 낸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한 발원을 하는 모든 선남선녀들이 곧 보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보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

 

응운하주(應云何住)’는 명본(明本)대장경에는 운하응주(云何應住)’로 되어 있고 세조(世祖本)은 명본(明本)을 따랐다. 양자(兩者)가 상통(相通)하는 어법이라 하겠지만, 문법적으로 따지자면 응운하주(應云何住)’가 더 순조롭다. 항상 해인사본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 해인사본 자체 내에 있어서도 171절에는 운하응주(云何應住)’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라집(羅什)금강경기자(記者)들의 표현관습의 다양한 맥락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운하(云何)’어떻게이다. ‘()’살다’, ‘머문다인데 사실 그 실 내용은 다음의 항복기심(降伏其心)’인 것이다. ‘()’는 내가 여기 살다로 번역했지만, 사는 방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마음을 둔다라는 뜻이다. 내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두어야 하는 것인가? ‘항복기심(降伏其心)’은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너무 밋밋해서 중국인의 가슴에 퍼뜩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과의 갈등구조로 그 문의(文義)를 정확히 노출시킨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욕망의 항복! ‘마음을 항복받는다.’ 그 얼마나 쉽게 전달될 수 있는 표현인가? 라집(羅什)한역의 파워는 바로 이러한 직설적 스밈에 있다. 외국인인 그는 중국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한 천재였다. 오히려 후대의 중국인들이 중국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2-4.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佛言: “善哉! 善哉! 須菩堤!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聽! 當爲如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얼마나 강력하고 단호한 붓다의 말씀인가? 좋다! 좋다! 나는 네 말대로 못 보살들을 잘 호념하고 잘 부촉한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여금체청(汝今諦聽)’에서 ()’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중국고어에서 매우 친근감을 나타내는 이다. 여기서 본동사는 ()’이다. 중국어에는 재미있게도 능동태와 수동태가 아예 글자가 다르게 표현된다. ‘()’은 능동적으로 내가 들을 때만 쓰는 말이다. 그에 비하여 ()’듣는다가 아니라 들린다이다. 유명한 노자의 말에 도()를 가리켜 청지불문(聽之不聞,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도덕경14)’이라 한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정확히 번역하면, ‘내 귀에 이와 같이 들리었다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들린 대로 들은 것이다. 거기에는 객관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청()은 다르다. 이것은 내가 들어야 한다. 내가 애써 힘써 주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내가 능동적으로 발심하여 들어야 한다. 진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다. 들어야 하는 것이다. 들으려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붓다는 바로 듣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확인하고 있다.

 

() 능동태 듣는다
() 수동태 들린다

 

너 이제 들으라!’ 어떻게 듣는가? 어떻게를 나타내주는 부사가 곧 ()’인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명료하게의 뜻이다. 그리고 진실하게의 뜻도 들어 있다.

 

여금체청(汝今諦聽)!’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중당(中唐)의 대중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거이는 명()이고, 낙천(樂天)은 자()이다. 당나라의 시인으로서 평이하고 아름다운 시를 썼다예상우의가(霓裳羽衣歌)응시체청수미족(凝視諦聽殊未足)’이란 말이 있듯이 이 체청(諦聽)’이란 표현은 일반 문헌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다. 중국소설 홍루몽(紅樓夢)에서도 이런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스님들이 이것을 眞諦진제라 발음하는 관례에 따라 획일적으로 제청이라 발음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체청으로 읽어야 한다. 체념(諦念), 체관(諦觀), 요체(要諦) 등의 경우처럼, 이 때는 일반 어법에 따라 체청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라집(羅什)이 여기 ()’ 글자를 선택한 이유는 불교적인 진체(眞諦)의 의미가 분명 숨어있다. 다시 말해서 듣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들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또 다시 반복하여 선포한다. 이것은 분명 붓다의 케리그마(κρυγμα, 설교)이다. “반ᄃᆞ기 너 위ᄒᆞ야 닐오리라!”(세조).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이러한 강렬한 어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 역시 라집(羅什)의 탁월한 연출이다. 이 문자 속에는 인간 붓다의 실존적 결단(Entscheidung)’이 숨어있다. 반드시 내 너 위하여 이르리라! 반야와 비반야의 갈림길, 고비길, 그 결정적인 순간의 선포인 것이다.

 

여기서 는 누구인가? 물론 외면적으로는 수보리 존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다. 수보리는 수없는 뭇 보살들, 진리를 갈구하는 선남선녀의 피끓는 젊은 생령들을 대변하는 지시체일 뿐이다. 내 너 위하여 이르리라, 반드시! 반드시 너 위하여 이르노니 반드시 너 자세히’(깨달을 때까지) 들어야 한다. 들음의 과정이 바로 금강경이라는 노래인 것이다.

 

그리고 또 붓다는 수보리의 질문을 반복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여기에는 붓다의 신중함, 즉 주저가 들어가 있다. 이것은 엄중한 사태에 대한 붓다의 경고다. 이 경고는 상대방에게 마음의 준비의 시간을 허락한다. 붓다는 상대방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순히 질문을 반복해서 대답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이루어진 것이다. 붓다는 운하(云何, 어떻게)를 여시(如是, 이와 같이)로 바꾼 것이다: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이미 해답은 주어진 것이다. 이미 선포는 끝나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이 한마디로!

 

그러나 우리는 이 이와 같이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 붓다는 그러한 갈구하는 심령을 확인한다. 이와 같이 살 것이다. 부처님! 제발, 이와 같이, 이와 같이, 그 이와 같이를 더 말씀해주십시요

 

 

 

 

2-5.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

唯然世尊! 願樂欲聞.”

유연세존! 원락욕문.”

 

 

이 짧은 한마디 속에는 무수한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 ‘유연(唯然)’은 단순한 ()’라는 대답의 음사(音寫)()’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는 붓다의 선포(케리그마)에 대한 보살들의 긍정이다. ‘그러하옵니다!’ 이와 같이란 내용이 설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열음이다.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의 마음이 편해진다. 긴장이 사라진다. 갈등구조들이 해소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진리를 즐겁게 들을 수 있게 된다. 진리는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향유(Enjoyment)의 대상이다. 존재는 곧 향유, 즐김인 것이다.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리는 들리는 것이다.

 

여기 원락욕문(願樂欲聞)’의 본동사가 ()’에서 ()’으로 바뀐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제 진리는 들리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라집역(羅什譯)의 오묘처인 것이다: “듣ᄌᆞᆸ고져 원요ᄒᆞᄉᆞᆸ노이다’ (세조).

 

욕문(欲聞)’()’욕한다라는 동사라기보다는 영어의 ‘be going to’에 해당되는 조동사적 어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 하고자이다. 세조의 언해는 정확하다. ‘()’욕문(欲聞)’을 수식한다.

 

()’은 전체구문에 걸린다. 그렇다고 원컨대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일본한문투이다.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가 아름답고 바른 우리말 번역이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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