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음인의 수구 성향
소음인은 기본 성향에서 수구적이다. 바꿔 말하자면, 수구적인 태도를 견지해도 문제없다 싶을 정도로 확신이 들어야 그 부분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한번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테레사 수녀의 빈민 사랑도 마찬가지고, 이른바 수구적 태도와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아주 근접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음인이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확신이 그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아주 급진적인 생각인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 소음인은 그 급진적인 사고를 변치 않고 지켜간다. 급진적 사상을 수구적 태도로 지켜낸다는 것이다. 종교적 맹신자의 경우, 급진인지 수구인지 애매한 경우가 있다. 바로 그런 경우다.
하지만 소음인의 그런 경향이 크게 문제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선 소음인의 수구성은 세상이 주장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다음부터 시작된다. 즉 세상이 지켜온 것에 대한 수구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것에 대한 수구성일 뿐이다. 게다가 그 받아들이는 과정이 절대 간단하지 않다. 자신이 완전히 납득하고 수긍해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이 무조건 옳다는 주장은 기존의 제도에 의해 혜택을 얻는 집단에 의해 주로 대두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제도교육이나 언론 등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런데 소음인은 아무리 언론이 주장을 펴고 학교에서 가르쳐도 자신이 납득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기득권자의 이득만을 비호한다는 뜻의 부정적 의미의 수구가 되는 경우는 오히려 많지 않다. 다만 자기의 과거 생각을 잘 안 바꾼다는 의미의 성향상 수구가 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그러나 소음인이 충분한 정보에 접하지 못하고, 충분한 사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소음인은 뚜렷한 기준 없이 사는 불안감을 가장 못 견디는 체질이라, 결국은 자기 주변의 주장 가운데 그나마 받아들이기 쉬운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철저한 통제국가에서는 소음인이 사회적 의미의 수구가 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수구의 주장은 그 사회의 기득권자를 위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사회의 모순에 의해 심한 피해를 입는 계층이면서도 수구적 주장에 적극 동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음인의 수구성이 문제가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수구성이 발동되는 영역이 좁다는 점이다. 즉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부분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유연하고 관대한 경우가 많다. 천성의 장점을 잘 살리면서 사는 소음인은 자신이 확실히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늘 겸손하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매사에 중도적인 사람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회에서 가장 흔한 소음인의 모습이다.
소음인이 매사에 지나치게 자신감이 없어지면 그때는 사회 문제에 전혀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른바 보수성/개혁성의 기준으로 가를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소음인일수록 사는 방식을 늘 일정하게 유지하며, 그 방식이 조금만 변해도 불안감을 느끼는 성향은 오히려 강해진다. 결국 사는 방식 면에서 보면 보수 혹은 수구적인 사람이고,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면 무당파, 무관심층으로 분류될 것이다.
소음인이 사회 문제에 있어 수구나 급진으로 분류되는 것은 대부분 긍심(矜心)이 강해진 경우다. 자신의 기준을 자신의 영역 밖에도 마구잡이로 적용하기 시작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장하는 방식으로 봐서는 소음인인 것 같은데 수구적 주장에서 급진적 주장까지 널뛰기를 하는 이상한 사람도 가끔 있다. 나름대로는 엉뚱한 기준을 들이대며 자신은 그 기준에 충실할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영 믿어지지 않는 경우다. 이것은 천심, 탈심(奪心)이 강해진 경우다.
경륜(經綸), 식견(識見)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때 소음인이 절대적으로 지키려 하는 내용은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깊이까지 내려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강하게 고집하는 모습이 없어진다. 각 사안별로 적절한 입장을 내세운다. 주로 보수에서 진보까지의 영역에 속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하지만 때로 아주 불합리하고 시급히 고쳐야 할 문제가 있을 경우 급진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꼭 지켜야 할 문제인데 세상이 잘 이해하지 못할 때는 수구로 오해받는 것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럼 탈심(奪心), 천심(擅心)의 경우와 어떻게 다르냐가 문제인데, 그래서 사람에 대해 이해하려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기준은 주장하는 논리의 일관성 여부이고, 그 기준이 자신의 이득 여부와 무관하게 지켜진다면 더욱 믿을 만한 것이 된다. 즉 소음인이 경륜(經綸), 식견(識見)의 경지에 가면 폭넓은 주장을 해도 그때그때 주장이 널뛴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주장하는 소음인은 일관성이 있는데, 사회의 평가 기준이 균형이 안 잡혀 있어서 남들에 의해 보수 쪽 혹은 진보 쪽의 입장으로 분류될 뿐이다.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짚어보면 ‘과연 일관성을 지켰구나’라고 이해된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