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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애노희락의 심리학, 제2부 체질에 따른 약점과 그 극복, 제11장 인의예지와 체질 - 2. 의와 지의 충돌 본문

책/철학(哲學)

애노희락의 심리학, 제2부 체질에 따른 약점과 그 극복, 제11장 인의예지와 체질 - 2. 의와 지의 충돌

건방진방랑자 2021. 12. 2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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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 지()의 충돌

 

 

인과 예가 부딪히듯이 의()와 지()도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란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다. 감성적인 면이 있다. 또 결과 지향적인 면이 강하다. ()란 타당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사고의 영역에 속하고 과정 중시의 측면이 강하다. 의만 따지면 방법을 무시하게 되고, 지만 따지면 남들의 느낌에 관심이 없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보충 설명이 좀 필요하다.

 

()를 주로 옳을 의로 새긴다. 이 글에서 옳다/그르다라는 표현은 주로 논리적 판단의 내용에 써왔다. 그러나 의를 말할 때 쓰는 옳다는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과 관련된 일에서는 여럿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옳다’”까지가 포함된 개념이다. 즉 의란 근본적으로는 좋다/싫다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다만 개인적인 좋고 싫음이 아니라 대중적인 좋고 싫음이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대중에게 이롭게 하는 방향이라는 뜻인 것이다.

 

논리적 옳다/그르다는 고정된 상황에서는 따지기가 쉽다. 그러나 대중이 같이 처한 문제에서는 각각의 처지나 느낌이 서로 다르다. 이때 논리적인 옳다/그르다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중의 이로움은 논리적으로 따질 수 있을까? 자본주의와 화폐 경제의 영향으로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심리적인 부분, 심리적 만족감, 불만이 같이 작용하니까. 그런 심리적 부분과 실리적 부분이 같이 고려되어 나타나는 반응이 좋다/싫다인 것이다. 그래서 대중의 문제는 좋다/싫다를 기준으로 따져야 한다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장이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역시 옳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축적되어서 의()옳을의라는 새김이 붙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의로운 행동이라고 말하는 경우와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비교해보기 바란다. ‘의로운 행동이라는 표현은 주로 감동을 주는 행위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또 남을 위하고, 대중을 위하는 행동이다. ‘지혜로운 행동이라는 것은 처한 특수성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의미한다.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같은 목적을 수행해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다. ‘의로운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 자신의 큰 위험도 감수하는 방식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 옳다/그르다를 굳이 논리적 판단의 경우로 국한해서 사용한 것은 이유가 있다. 개인적 판단 또는 기준이 확실한 좁은 영역에서만 적용되어야 할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다. 이 작은 영역에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적합한 소음인의 지방(地方)을 맛보는 사고 기능을 옳다/그르다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를 대중적 상황에서 무리하게 적용하면 문제가 된다. 대중적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소양인의 세회(世會)를 읽는 감성 능력이다. 그런데 이를 같이 옳다/그르다' 로 쓰면 헷갈리게 된다. 개인적 옳고 그름’ ‘대중적 옳고 그름이라고 표현해도 역시 좀 어색하다. 그래서 의()에 해당되는 판단은 그 바탕이 되는 좋다/싫다라는 표현을 끌어와 사용한 것이다.

 

보충 설명이 좀 길어졌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의를 버리고 구차한 안일을 바라는 사람을 나인(懦人)이라고 한다. 나약(懦弱) 한 사람이다. 소음인이 타락할 때 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런데 소음인이 구차하게 안일만을 탐할 때의 모습에 나약함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는 좀 의문이다. 필자의 한문 실력이 높지 않아 더 적절한 말을 제시하기는 곤란하지만, 나인이라는 표현은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생각이 있다. 나약함이라는 표현은 태양인인 동무(東武)의 눈에 비친 모습이 그렇다는 것인데, 물론 그 근본을 보자면 나약함이 맞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좀 다르다. 그걸 속에 숨어 있는 나약함으로 이야기하면 너무 수준 높은 표현이 아닌가 싶다.

 

소음인이 긍심(矜心)이 앞서서 의를 버리면 구차하게 안일만을 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나약한 마음은 소음인의 태행(怠行)탈심(奪心)이 강할 때 더 심해진다. 동무(東武)는 나약한 마음은 항상 뒤에만 있으려 할 때강해진다고 설명한다. 태양인의 항상 앞에 나서려 한다와 대조되는 표현이다. 탈심(奪心)이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주장하려는 것이다. 뒤에만 있으려 할 때' 강해진다는 것은, 자신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을 겁내는 마음이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긍심(矜心)탈심(奪心)이 동시에 강해진 사람이 남의 말을 잘 들으면서 ,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나약하다는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오히려 겉으로는 뻣뻣하고 고집 센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이 옳은 말을 하면 이상하게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긍심(矜心)탈심(奪心)이 같이 강해진 모습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나약한 것이라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소음인이 열심히 생각해서 한번 기준을 세웠는데, 이를 다 허물어버리기가 싫은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다시 기준을 세우는 일이 자신이 없는 것이다.

 

결국 나인(懦人)의 나약함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자기가 기준을 세운 부분이나 자기가 신경을 쓰는 부분 이외에는 다 무시하는 모습이 하나다. 즉 자신만의 기준이 없는 부분은 아예 그건 나 못해라며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나약함이다. 또 하나는, 겉으로는 고집 세고 확고한 신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다. 실제는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 나약함이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근본은 나약함이지만, 전자는 겉으로도 나약해 보이고, 후자는 겉으로는 오히려 강인해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

 

마지막으로 소양인이다. 지를 버리고 사사로이 꾸미는 사람을 박인(薄人)이라고 한다. 야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양인이 타락했을 때 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사람에게 야멸차게 대하고, 함부로 사람을 몰아세우고, 조그만 잘못에도 심하게 닦달하는 식으로 주로 나타난다.

 

다른 체질과 마찬가지로 지()를 버리는 것과 과심(誇心)이 심해지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과심(誇心)은 자신의 감정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으면 당연히 더 심해진다. 그런데 감정의 과도한 표현이라는 말이 착각하기 쉽다. 언뜻 생각하면 생생하고 화려한 표현 등이 생각난다. 시적인 표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표현을 하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과 야박하다라는 표현이 잘 안 어울린다. 그런데 그건 과심(誇心)에 대한 오해다. 과심(誇心)은 상대를 제압하고 상대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다. 감정의 과장은 과장인데, 오락형이나 예술형 과장이 아니라, 전투형 과장이라는 것이다.

 

이 야박함이 겉으로 이기려는 마음이 강해지면 더 심해진다. 태음인의 탐욕이 안으로 지키려는 마음 이 강해질 때 심해진다는 것과 반대가 된다. 그런데 소양인의 태행(怠行)나심(懶心)이라고 했다여기서 나()는 게으르다는 뜻이고, 소음인이 의를 버렸을 때 나타나는 나인(懦人)’은 나약하다는 뜻이다. 글자도 뜻도 다르니 혼동하지 말기를. 나심(懶心)은 게으르다는 뜻이고, 더 못하겠다고 뒤로 자빠진 상태이다. 겉으로 이기려는 마음과 반대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나심(懶心)은 포기한 것이 아니다. 최초의 계획을 고집하지 않으면 나심(懶心)은 발동하지 않는다. 이를 재간(才幹)과 비교해보자. 최초 계획의 목적을 다른 계획으로 만족시키는 능력이 재간(才幹)이다. 완벽한 마무리가 안 될 때 재치 있는 마무리를 하는 것이 재간(才幹)이라고 했다. 즉 최초의 계획을 고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나심(懶心)재간(才幹)의 갈림길이다. 체면에 얽매이느냐 얽매이지 않느냐의 차이다. 나심(懶心)이 발동하는 상황은 나는 못하겠다라고 뒤로 자빠진 상태이지만, ‘그래도 그 일은 원래 계획대로 이뤄져야 한다라고 고집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어떻게 될까? 남을 몰아붙이게 된다. 남의 탓을 하고, 남에게 야박해진다. 게다가 과심(誇心)까지 같이 강한 상태니까, 제일 심한 표현만 골라가면서 남을 부리려 든다. 노동자에게 가장 최악의 경영주가 바로 박인(薄人)이다. ‘우리 사장이 박인이다라고 느껴지면 최대한 빨리 다른 직장을 찾는 것이 좋다. 박인은 차라리 회사가 망하면 망했지 절대 남에게 너그럽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의예지에 관한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었는데, 약간의 사족을 달아야 할 듯하다. 인의예지의 사상인에 대한 배당은 사상의학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약간의 이견이 있다. 동의수세보원은 심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만 근본은 의학책으로 씌어진 것이다. 그런데 동무(東武)가 사상서로 쓴 격치고(格致藁)라는 책이 있다. 격치고를 중시하여 동무(東武)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동의수세보원의 내용을 우선하여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사상인에 대한 인의예지의 배당에 관해서 견해 차가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인과 예의 부딪힘, 의와 지의 부딪힘에 대해서는 명확히 했지만, 사상인에 대한 배당에 대해서는 동무(東武)가 확연하게 정리를 못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런 상황이라 필자도 이 부분을 이 책에 넣을까 말까에 대해서 좀 고심을 했는데, 사심(邪心), 태행(怠行)으로 치달았을 때의 결과에 대해 경고하려면 넣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이 격치고(格致藁)의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므로 동의수세보원에만 충실한 해석에 따라 인의예지의 사상인에 대한 배당을 위와 같이 한 것이다.

 

이 부분은 사상의학을 하는 사람과, 한학을 깊이 공부해서 인의예지에 대해 해박한 분들이 함께 연구해서 정리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혹시 그렇게 정리된 결과 필자의 해석이 틀렸더라도 사실 큰 문제는 없을 수도 있다. 독자 여러분들이 이 책을 잘 읽고 노력해서 사심(邪心), 태행(怠行)이 심해지는 분들이 아무도 없는 세상이 되어, 비인(鄙人), 박인(薄人), 탐인(貪人), 나인(懦人)이 다 없어지면 위의 내용에 틀린 부분이 있어도 문제될 게 없으니까.

 

 

 

 

인용

목차

사상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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