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1장 예수의 이적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1장 예수의 이적

건방진방랑자 2022. 2. 23. 14:13
728x90
반응형

1장 예수의 이적

 

 

아니 땐 굴뚝에 나는 연기

 

 

예수라는 사건은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오늘 여기를 살고 있는 나는 인과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미 과학이라는 인과론적 틀 속에서 이성적으로 해석되는, 법칙적으로 연관된 제일적(齊一的) 환경에 나는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내가 파악하는 세계는 나의 몸과 정신을 포함해서 어쩔 수 없이 해석된 체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해석이 과학적 해석이며, 가장 사실적 적용성이나 지구력이 높은 사태라 해서 그것이 사실 그 자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과학적 해석을 나의 세계관으로서 수용하고 있는 상식적 전제하에서는 예수라는 사건은 끊임없이 불화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화평을 주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려 왔다’(12:51)고 한 말의 본질적 의미일까? 예수라는 사건은 단지 성서기자들이나 초대교회 크리스찬들의 세계관과 나의 과학적 세계관이 마찰이나 분쟁,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동시에 나의 존재의 내면 속에 끊임없는 실존적 갈등이 야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내 주변의 수많은 동포들,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웃들이 예수라는 사건을 그들의 신앙과 신념의 체계로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체계가 결코 나의 실존으로부터 객화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 항상 나의 삶의 긴장감으로 남아 있다. ‘예수는 이미 나로부터 소외될 수 없는 나의 실존인 것이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말이 있다. 굴뚝의 연기와 아궁이의 장작 땜에는 인과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우리 선조들의 날카로운 통찰이다. 다시 말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핌이 원인이 되어서만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아궁이에 장작 지핌 없이 굴뚝에 연기 나는 사태가 초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단순한 인과관계는 우리의 상식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태이다. 이러한 사태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76)인과성부정이나,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에 의하여서도 부인이 될 수 없는 사실의 체계이다. 거시적 세계 속에서는 뉴튼적 인과법칙이 항상 잘 들어맞는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건은 이러한 우리의 상식(常識), 즉 항상스러운 의식의 체계를 여지없이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펄펄 나는 것이다.

 

 

 

 

그대로의 성서 수용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화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들, 그리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등등, 예수라는 담론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이 한마디로 아니 땐 굴뚝의 연기들이다. 인간의 탄생은 반드시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 의하여, 그러니까 감수분열을 거쳐 46개가 아닌 23개의 크로모좀(chromosome, 염색체)을 가진 두 남녀 생식세포의 결합과 난할과 기관분화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시절에는,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복음서의 저자들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이러한 생식세포들의 크로모좀과 발생과정에 관한 상세한 과학적 인식은 없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상식적인 거시적 인과관계, 즉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성적 결합에 의하여 인체 내에 생식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는 인과적 사실에 대한 인식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정녀 마리아 잉태사건은 그러한 통상적 인과를 거부한다. 그리고 보통 이러한 사건은 크리스챤들에게 신화적 환상으로서가 아니라 사실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혈우병환자의 피를 멈추게 하고, 신들린 자에게서 마귀를 쫓아내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불과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빵으로 오천여 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 호수 수면 위를 육지와 같이 태연히 걸어 다니며, 심지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나 썩은 내음새가 펄펄 나는 송장을 멀쩡한 산 사람으로 불러일으킨다(11:1~44). 뿐만인가? 자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고 예언대로 그는 무덤에서 일어났고 부활의 사실을 가까운 제자들에게 알렸고, 산 인간의 모습으로 재림을 약속하면서 승천하였다.

 

이 너무도 드라마틱한 예수의 일생은 시작부터 끝까지,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아니 땐 굴뚝의 연기이다. 우리의 상식적 인과를 거부하는 지상의 사건인 것이다. 총면적이 불과 남한의 1/5밖에 되지 않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서 복음서 저자들에 의하여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성서의 기술을 과학적·합리적 세계관을 지니지 못한, 아니, 그러한 세계관이 발생하기 이전의, 비이성적 세계관의 사람들의 특수한 인식체계로서, 그리고 그러한 인식체계의 특수한 문학장르의 표현기법으로서 합리적인 해석을 얼마든지 멋있게 해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적이고(humanistic), 합리적이고(rationalistic), 온건하고, 상식적인 해석, 얼핏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라고 쉽게 말해버릴 수 있는 그러한 해석을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로서 받아들이는 순간, 기독교는 기독교됨을 상실해버린다. 그것은 멋있고 재미있는 인간의 문학이 되어버릴지언정 기독교는 아닌 것이다. 기독교는 오로지 상기의 이적적 사태를 나의 신앙과 신념체계로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출발하는 종교인 것이다. 예수라는 사건에서 십자가죽음과 부활을 신화학적인 해석을 통해 제거해버리는 순간,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바로 여기에 내가 이 글의 모두(冒頭)에 말한 바, 기독교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고통스러운 실존적 갈등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반드시 성서의 말씀의 진실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어떠한 자연주의적 해석도 차단되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거룩하고도 진지한 성서주의의 출발이다. 나 조선의 사상가 도올 김용옥은 이러한 성서주의의 입장을 한치도 이탈하지 않는다.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성서로부터 온다는 철저한 성서주의의 입장은 교회가 구원의 주체라고 하는 통속적 곁가지사상을 배제시킨다. 인간의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올 수가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세속적 사교집단인 교회조직을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나의 발언은 불편한 심기를 일으킬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나의 입장이 아니라 20세기 성서신학의 모든 정통주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비롯하여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예수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외치는 성서 정통주의자들의 확고한 입장인 것이다.

 

 

 

 

과학적 세계관의 고뇌

 

 

교회는 사교집단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세속적 역사(secular history)의 현상이 아니다. 교회 즉 엑클레시아(Ecclesia)는 그 자체가 종말론적 사건의 일부이며,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1:18, 24, 1:22).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 안의 사건일 뿐이다. 인간의 말과 생각만이 난무하는 세속집단이 아닌 것이다. 교회라는 세속적 조직을 구원의 주체로서 운운하는 것은 모두 교부철학이나 스콜라철학 이후의 정치권력의 조작적 사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을 행한 예수는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예수는 자기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의 모든 사건을 아니 땐 굴뚝의 연기로서만 이해했을까? 공관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예수의 유명한 훈계 속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 (10:25)마가복음의 기사를 받아 실은 것이 19:24, 18:25. ‘낙타가 아람어 밧줄의 오사(誤寫)로 생겨난 말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 말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쉽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사태가 일상적 우리 체험에서 불가능하다는 상식적 인과를 전제로 할 때만이 의미있는 비유이다. 부자라고 해서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예수가 말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만 해도 어부이긴 하지만, 갈릴리호수 북단의 가버나움지역에서는 꽤 풍요롭게 살던 인물이었다. 공자(孔子)3대 애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는 자공(子貢)이라는 거부(巨富)를 꼽는다. 그는 국제적 물류를 잘 파악하여 비즈니스를 한 일대 호상(豪商)이었다. 싯달타의 초기승단의 최초의 거점이었으며, 인류사상 최초의 불교가람이라 할 수 있는 기원정사(祇園精舍)도 그 터에 금을 다 깔 수 있는 거부, 급고독(給孤獨)의 장자(長者) 수달(須達, 須達多, Sudatta)의 보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초대기독교회의 성립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자들의 참여 없이는 교회라는 커뮤니티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예수가 말하는 부자는 단순히 돈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부자는 세속적 영예나 권력이나 풍요로움에 집착하는 사람, 그러한 집착 때문에 가장 본질적 진리,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세속적 부를 가치의 제1의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부자는 아무리 계명을 잘 지키고 거룩하게 산다 해도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의 희박성을 표현하는 말이 낙타의 바늘귀 통과의 어려움이다. 사실 우리가 예수의 세계인 식체계를 이적으로만 설명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비유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썩은 송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라고 한다면 낙타의 바늘귀 통과도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수 이적 행함의 특징

 

 

뿐만 아니다. 예수가 자기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또 자기 앞에서 그러한 기적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신나해 하지 않았다. 나의 말이나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으로 썩은 송장도 벌떡 일어서는 기적이 막 일어나는 것을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기적행함을 신나게 연습했을 것이다. 마치 마술사들이 골방에서 마술을 연습하듯이.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행태를 전혀 비치지 않는다. 예수가 갈릴리지역의 군중 속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찾아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만약 예수가 기적을 신나게 행하는 사람이라면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징표를 보여주어 가증스러운 바리새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호기라 생각하고 멋있게 기적을 행했을 것이다. 산이라도 움직여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음 속으로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는가!’하면서 깊게 탄식한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외친다.

 

 

나는 분명히 말하노라. 이 세대에 보여줄 표적은 하나도 없다!!(8:12, 16:4)

 

 

그리고는 매정하게 뒤돌아보지도 않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버린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군중 앞에서 서슴지 않고 기적을 행하는 복음서의 다른 기사들과 매우 배치되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예수의 기적행함이라는 사태를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상기해야 할 또 하나의 극적인 장면이 있다. 예수가 데카폴리스 지역성서 이름은 데가볼리: 현재는 요르단 국가영역에 속해있으며 알렉산더대왕이 개척한 10개의 폴리스(polis) 지역에서 선교를 하다가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 갈릴리지방으로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예수가 호수가에 서있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음의 경각에 놓여있는 열두 살 난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한다. 그래서 예수는 야이로의 집을 가기 위해 그를 따라 나섰는데, 이때 엄청나게 많은 군중이 예수를 에워싸며 밀치고 하면서 따라갔다. 갈릴리의 군중 속에 휩싸여 물밀 듯이 걸어가는 예수의 모습은 이미 매우 극적이다. 이때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끊임없는 하혈(下血)로 고통받고 있었던 여자가 있었다. 이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어 따라가다가 예수에게 접근하려고 애를 썼다. 이 여자는 감히 앞에 나서서 예수에게 병을 고쳐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숫기도 없는 여자였다. 단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의 옷만이라도 만지기만 한다면, 그저 옷깃 한오라기라도 스치기만 한다면 내 병이 꼭 나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과 믿음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예수의 옷깃에 손이 닿는 순간, 이 여자는 몸에 다가오는 전율같은 것으로써 하혈이 싹 멈추고 몸이 가뿐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이때였다. 군중에 밀쳐 정신없을 듯한 예수는 날카롭게 되돌아서며 외친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예수는 한 여자가 자기 옷깃에 손을 대는 순간, 이미 기가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예리하게 감지하였던 것이다. 이에 제자들은 답한다.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았다. 그 여자는 이 놀라운 예수의 감지능력에 당연히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자기 몸에 일어난 기적을 감지하는 이상, 속이고 도망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여자는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고백한다. 이때 예수는 그 여인에게 무어라 말했을까? 그 여자를 일으켜 만인에게 선포라도 했을까? “보라! 이 여자의 모습을 보라! 내가 이 여인의 12년 고질을 단숨에 고쳤도다!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과연 이렇게라도 말했을까? 한국의 어떤 부흥목사가 이런 이적을 행했다면 반드시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도올도 의사다. 나 역시 12년 동안 혈루(血漏)로 고생하고 있는 여인의 병을 단 한 번의 시침으로 고치는 이적을 수없이 체험했던 사람이다. 이러한 기적은 사실 우리의 주변에서도 적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한 의사라고 칭송을 받고 점점 성업의 길로 들어서는 한의사나, 성령의 충만함으로 질병을 퇴치하여 점점 교인이 몰려드는 부흥목사와 같은 모습으로 갈릴리의 예수를 이해해도 좋단 말인가?

 

공관복음서의 가장 고층대를 형성한다고 하는 마가복음의 저자는 엎드려 고백하는 여인을 보는 순간 예수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평안히 가라!

Daughter,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go in peace. (5:34, 9:22, 8:48)

 

 

이 복음서의 기사로부터 우리는 예수의 기적행함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몇 항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적의 여섯 가지 의미맥락

 

 

첫째,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이러한 나의 말에 놀랄 많은 기독교인들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개인 예수다. 역사적 실존인물인 예수라는 개체가 주어가 되어, 그 행위의 주체가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이비종교들을 주창하는 사람이나, 예수와 같은 권능을 나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목사나 전도사들이나 부흥사들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성서를 왜곡하고 크게 자신의 존재를 곡해하고 참칭하는 것이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메시지는 바로 나 예수가 주체가 되어 너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구원의 주체는 너의 믿음이라는 확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행위의 주체로서의 개인 예수는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가 행한 기적은 예수라는 개인을 주부로 하는 술부적 사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드러남이다. 그것은 예수라는 역사적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행하심이며, 예수의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일 뿐이다. 예수의 기적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역사적 예수라는 개인을 보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서적 관점에서 이탈되는 것이다. 성서의 저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우리에게 상세한 인간적인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그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없다. 사람 예수에 관한 관심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예수의 기적을 나도 행하여 보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크리스챤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둘째, 예수가 행하는 기적은 반드시 신앙이라는 사태와 결부되어 있다. 예수는 오로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사태로서만 기적을 행한다.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마음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비어있는 자들, 마음이 열려있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사태이다. 따라서 마음이 완악하게 닫혀있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기적을 요구했을 때 예수는 너희들에게 보여줄 기적이란 하나도 없다고 호통쳤던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리 기적을 행하여본들 그것이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기적으로 인지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난 후에 사람들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로 기적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기적은 구경이나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용한 마술을 본들, 마술은 마술일 뿐이다. 그것이 마술이 아니라 진짜 기적이라 해도, 그러한 마술 같은 기적들은 그냥 기적으로서 아무 의미없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나간다. 그것은 단지 희한한 구경거리였을 뿐이다.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없다면 기적은 그냥 놀라운 사건’(astonishing events)일 뿐이다. 기적의 광경은 반드시 믿음과 함께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감지한 사태로부터 기적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지 그 자체가 기적에 참여하고 기적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주관론적 해석의 오류가 아니다.

 

셋째,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the existence of God)의 사실을 입증하는 보편적 사태가 아니다. 자연적 인과를 거부하는 사태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한다면 자연적 인과 그 자체는 하나님의 존재와 무관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기적은 인식론적으로 자연적 인과를 거부하는 사태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나의 실존적 믿음이라는 데에 더 강조점이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객관적 탐구의 대상은 아니다. 기적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활동이다. 예수는 기적을 신의 의지에 귀속시킬 뿐이다.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꼬나보는 자들은 결코 기적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나의 한계를 절망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을 때만이 기적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결국 나의 주체적 삶의 신앙의 표현이다. 자연적 인과는 하나님을 나의 일상성으로부터 멀리 숨겨버린다. 그러나 기적은 하나님을 나의 실존에 가깝게 다가오게 만든다. 그것은 나의 일상성을 지배하는 자연적 인과에 대한 신념의 포기마저도 야기할 수 있는 가까움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나의 모든 아집의 포기를 의미하며, 그것은 자연의 법칙성으로부터의 해방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다.

 

넷째, 예수가 행한 기적은 단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키기 위한 깨우침이나 협박의 수단일 뿐 아니라, 그러한 기적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도래하고 있다는 사태를 선포하기 위한 징표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 사태이지만 예수는 기적을 통하여 그것을 현재적 사태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예수가 행한 기적은 인간의 실존과 관계없는 초자연적 사태의 과시가 아니라 대부분 질병의 고침이나 같이 나누어 먹음과 같은 비근한 삶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싯달타가 득도의 체험을 출발시킨 문제의식도 생로병사(生老病死)였고 그의 탐구의 종착역도 결국 생로병사였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인간의 실존이야말로 모든 종교가 투쟁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제상황이다. 예수의 공생애, 그의 선교활동을 지배한 기적의 행함도 결국 이러한 생로병사의 한계상황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싯달타는 이러한 생로병사로부터 근원적인 해탈을 요구하였다면 예수도 기적을 통하여 인간에게 생로병사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의지를 과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적 사유에 대한 전면적 재고를 요구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율법적 사유에 있어서는 지나가는 사람이 벼락을 맞는 것도 하나님의 천벌일 수가 있다. 우연적 사태를 윤리적 사태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통적 가치관에도 무의식적으로 깔려있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숙명적인 질병까지도 하나님의 징벌이나 진노로 해석하기 십상인 것이다(cf. 9:2).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나면서부터 손이 꼬부라지거나 기형인 사람들을 우리는 그의 불행한 운명으로 규정하고 암암리 그것을 우리보다 열등한 삶의 소유자로서 비하해 버리거나 어쩔 수 없는 신의 징벌로서 저주해버리거나 윤회의 한 고리로서 불운한 업의 결과로서 체념해버리거나 한다. 예수의 기적은 바로 이러한 모든 율법이나 윤회나 도덕적 사유를 단절시킨다. 그는 선천적 기형이거나 인간의 고질적 질병을 믿음 하나에 의거하여 치유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즉각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골고루 강림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한다. ‘고침나눔이라는 기적적 행위의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지금, 여기에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요 복음인 것이다.

 

여섯째, 예수의 이적 행함은 제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적을 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적을 행하기 전에 꼭 제식을 치른다. 마술을 할 때도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 씌워놓고 수리 수리 마수리같은 주문을 외우든지, 무당도 소머리를 세우기 전에 꼭 굿을 하거나 공수를 주고받거나 한다. 예수에게는 일체 그러한 쇼적인 과정이 없다. 오천 명에게 떡을 나누어 줄뿐이며, 앉은뱅이 보고 그냥 걸어가라!”고 말할 뿐이다. 예수의 이적이 비록 특수한 전설이나 설화적 장식의 문맥 속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소기하는 의미는 우리의 상식적인 기적에 대한 기대를 깨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초자연적 인과의 과시가 아닌 어떤 실존적 의미를 우리에게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결코 이적을 우리에게 초자연적 사실로서 과시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신의 하나님과의 소통의 역사(役事)였을 뿐이다. 예수의 관심이 만약 그러한 이적과시에 머물렀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벌써 초장에 저등종교로서 윤락해버렸을 것이다.

 

 

 

 

인용

목차

성경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고전 >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0) 2022.02.23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2장 신화와 철학  (0) 2022.02.23
성경 - 목차  (0) 2022.02.11
성경, 말라기 - 4장  (0) 2022.02.11
성경, 말라기 - 3장  (0) 2022.02.1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