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예수의 이적
아니 땐 굴뚝에 나는 연기
‘예수’라는 사건은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오늘 여기를 살고 있는 나는 인과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미 ‘과학’이라는 인과론적 틀 속에서 이성적으로 해석되는, 법칙적으로 연관된 제일적(齊一的) 환경에 나는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내가 파악하는 세계는 나의 몸과 정신을 포함해서 어쩔 수 없이 ‘해석된 체계’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해석이 과학적 해석이며, 가장 사실적 적용성이나 지구력이 높은 사태라 해서 그것이 사실 그 자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과학적 해석을 나의 세계관으로서 수용하고 있는 상식적 전제하에서는 ‘예수’라는 사건은 끊임없이 불화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화평을 주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려 왔다’(눅 12:51)고 한 말의 본질적 의미일까? 예수라는 사건은 단지 성서기자들이나 초대교회 크리스찬들의 세계관과 나의 과학적 세계관이 마찰이나 분쟁,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동시에 나의 존재의 내면 속에 끊임없는 실존적 갈등이 야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내 주변의 수많은 동포들,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웃들이 예수라는 사건을 그들의 신앙과 신념의 체계로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체계가 결코 나의 실존으로부터 객화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 항상 나의 삶의 긴장감으로 남아 있다. ‘예수’는 이미 나로부터 소외될 수 없는 나의 실존인 것이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말이 있다. 굴뚝의 연기와 아궁이의 장작 땜에는 인과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우리 선조들의 날카로운 통찰이다. 다시 말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핌이 원인이 되어서만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아궁이에 장작 지핌 없이 굴뚝에 연기 나는 사태가 초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단순한 인과관계는 우리의 상식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태이다. 이러한 사태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76)의 인과성부정이나,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에 의하여서도 부인이 될 수 없는 사실의 체계이다. 거시적 세계 속에서는 뉴튼적 인과법칙이 항상 잘 들어맞는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건은 이러한 우리의 상식(常識), 즉 항상스러운 의식의 체계를 여지없이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펄펄 나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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