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2장 신화와 철학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2장 신화와 철학

건방진방랑자 2022. 2. 23. 14:29
728x90
반응형

2장 신화와 철학

 

 

희랍인들의 신화적 세계관

 

 

신화(神話, myth)라는 것이 있다. 신화란 문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다. 신들은 역사 밖에 있다. 신들에게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그러니까 시공의 지배를 받는 세계 속에서 체험하는 인과관계가 적용되지 않는다. 신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죽음과 부활은 다반사(茶飯事)이다. 희랍세계에서 아주 유행했던 바카스축제의 주인공인 디오니소스(Dionysus)만 해도 기구하게 태어났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Zeus)와 테베의 왕 카드무스의 딸인 세멜레(Semele)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는 질투를 느껴 세멜레에게 제우스가 침실에 올 때, 신의 본래 모습으로 나타나 달라고 애원하게 만든다. 제우스는 세멜레에게 어떠한 소원도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본래 모습으로, 섬광과 우뢰로 둘러싸인 전차를 타고 벽력을 치면서 나타난다. 제우스는 인도의 인드라신처럼 벽력 즉 벼락의 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지상의 딸인 세멜레는 벼락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제우스는 재빨리 세멜레의 뱃속에서 6개월이 된 태아 디오니소스를 끄집어내서 자기 허벅지 속에 감추어 봉합해버린다. 만삭이 되었을 때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나게 된다.

 

디오니소스의 또 다른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디오니소스의 다른 이름은 바카스(Bacchus)이다. 바카스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Persephone)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가 꼬마 소년이었을 때 헤라의 명령으로 타이탄들(Titans)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음을 당한다. 타이탄들은 디오니소스의 육신을 다 삼켜 먹어 버렸지만 그의 심장만은 남겨놓았다. 제우스는 그 심장을 세멜레에게 주어 삼키게 했다. 그래서 세멜레는 바카스를 임신케 된다. 그 뒤로 제우스와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그렇게 해서 바카스는 두 번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카스의 신화는 희랍인들이 매우 열광했던 오르페우스 종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오르페우스종교(Orphism)는 오르페우스(Orpheus)라는 역사적 인물에 의하여 창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르페우스는 호머 이전의 최대의 시인이며 탁월한 음악가로서 이름이 나있으나 사실 오르페우스라는 인물의 역사성에 관해서는 고증할 바가 없다.

 

전설에 의하면 오르페우스는 트라키아(Thracia)의 왕인 오이아그로스(Oiagros)와 뮤즈인 칼리오페(Kalliope)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음악에 천재성이 뛰어나 리라(lyre)를 발명했다고도 한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야수와 산천초목이 다 홀려 그 곁에 와서 춤을 추곤 했다. 그는 아름다운 요정인 아내 에우리디케(Eurydice)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런데 에우리디케가 호반을 산보하고 있을 때, 아리스타이오스(Aristaios)가 그녀를 흠모한 나머지 범하려 하자, 그녀는 호반의 풀늪으로 달아났는데 그만 늪에 숨어있던 뱀에 물려 생명을 잃고 만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를 구하려고 사람이 절대 내려갈 수 없는 명부(冥府)에까지도 내려가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의 노래는 저승의 모든 혼령들을 매혹시켰다. 이크시온의 수레바퀴도 회전을 멈추었고, 탄타로스도 갈증을 잊어버렸고, 다나우스의 딸들도 물붓기를 멈추었고, 시지푸스의 바위도 절로 정지하였다. 그의 노래에 매료된 사공 카론(Charon)은 그를 배에 태워주었고, 저승의 개 케르베로스(Cerberus)와 지옥의 괴물들도 얌전히 들여보내 주었다. 드디어 오르페우스는 저승의 지배자 페르세포네와 하데스 앞에 서기에 이르렀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면서,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가 사랑으로 결합된 것처럼, 자기도 도저히 떨어져 사는 이 불행을 견딜 수 없다고 애원한다.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탄원을 들어주며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데리고 나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러나 하나의 중대한 조건이 있었다. 둘 다 저승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긴 암흑의 터널을 헤쳐나와 저 산자들이 사는 땅으로 나아가는 구멍을 보았을 때, 찬란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오르페우스는 그 태양의 빛을 보는 순간, 너무도 환희에 차 무의식중에 태양에 비친 자기 부인의 얼굴을 보고 싶어 뒤돌아보고 만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의 모습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잔인한 운명이군요!” 이 외마디 한탄을 끝으로 사랑하는 에우리디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절망 속에 오르페우스는 일곱 달 동안이나 눈 덮인 산 속에서 울었다. 그리고 그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일체의 여자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전의 밀교단체를 만들었는데 여자의 입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모욕을 느낀 트라케의 여자들은 광란의 축제에서 그의 몸뚱아리를 여덟 갈래로 찢어 버렸다. 어떤 버젼에 의하면 이 여인들은 디오니소스의 광신도들이었고, 오르페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축제의 제물로서 자신을 기꺼이 던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하프와 대가리만을 헤브로스 강물에 던져버렸다. 강물에 빠진 머리는 ! 나의 에우리디케여!” 절규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떠내려갔다. 그 머리는 레스보스(Lesbos) 섬에까지 떠내려갔다. 레스보스 섬에는 오르페우스 신탁의 성전이 세워졌고 그의 하프는 하늘에 올라가 별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오르페우스의 영혼은 다시 명부로 내려가 에우리디케와 결합하였고 둘은 사자(死者)의 왕국내의 파라다이스인 엘리시안 필드(the Elysian Fields)에서 영원히 같이 살았다고 했다. 하여튼 트라케(Thrace) 지방에서의 오르페우스의 숭배는 디오니소스숭배와 연결되어 있으며 둘 다 죽음과 부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사상에 스민 윤회론

 

 

역사적으로 오르페우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이러한 전설로써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그는 그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갈기갈기 찢기는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종교의 교리는 잘 알려져 있다. 신도들은 인간의 영혼이 윤회한다는 것을 믿었다. 윤회(the transmigration of souls)란 인간의 영혼이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끊임없는 수육(受肉)과 죽음과 해방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전생의 업보는 후생에 도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사상을 우리는 불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윤회의 사상은 희랍을 포함한 지중해연안문명으로부터,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문명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세계관이다. 유명한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이 오르페우스종교에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1619~31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연락(宴樂)하는 부자와 그 집 대문간에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그 집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껄덕거리던 나사로라는 거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업보로 인해 죽은 후에 나사로는 천당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의 불꽃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이 두 사람, 부자와 나사로를 안고 있는 아브라함은 각각 지옥과 천당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그것이 과연 기독교복음서의 이야기인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반복하는 중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불교설화나 자따까(Jātaka, 本生譚)의 한 장면인지 도무지 구별이 가질 않는다. 예수도 물론 천당-지상-지옥이 3층으로 되어있는 거대한 아파트처럼 확실히 공간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우주론(cosmology)의 구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천당으로 올라간다’(ascended into heaven)든가 지옥으로 떨어진다’(descended into hell)는 표현은 예수와 그를 따르는 크리스챤들에게는 매우 상식적 우주모델의 언사들이다.

 

 

 

 

오르페우스와 바카스

 

 

하여튼 오르페우스교도들은 오염된 생활을 피함으로써 그들의 몸을 정화시키려고 힘썼다. 정통파들은 고기를 먹어야 하는 제식의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평상시는 불교도들처럼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하늘적 부분과 땅적인 부분으로 합성되어 있다. 정화된 생활을 계속하면 땅적인 부분이 감소하고 하늘적 부분이 증가한다. 하늘적 부분이 증가하는 종국에는 인간은 바카스와 합일되는 경지에 도달한다. 그때 우리는 그를 하나의 바카스’(a Bacchus)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형이상자(形而上者)와 형이하자(形而下者)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주역』 「계사적인 세계관이나, 하늘적인 기()와 땅적인 혈()의 합성으로 파악하는 내경기혈론적 세계관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천지자연론적 세계관보다는 당연히 후대의 영지주의(Gnosticism)적 세계관의 어떤 프로토타입을 이미 오르페우스종교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바카스축제는 좀 잔인하다. 니체는 기독교의 노예도덕에 반발하여 디오니소스적 힘의 발출을 매우 극찬해마지 않았지만, 바카스축제는 실제로 희랍사회에서는 매우 골치거리였다. 그것은 본래 트라케ㆍ마케도니아에서 발생하여 점차 헬라스로 전파되어 왔다. 바카스는 주신(酒神)이며, 엑스타시(ecstasy)의 신이며, 풍요의 신이며, 생산(fertility)의 신이다. 바카스축제의 주요한 테마가 주()ㆍ색()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바카스축제는 희랍의 상류사회의 부녀자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그것은 트라케ㆍ마케도니아로부터 주로 여자들 사이에서 성행하던 광란의 제식이었다.

 

이 부녀자들을 미친 자(mad ones)라는 뜻으로 매나드(the Maenads)라고 부른다. 이 매나드들은 가정을 버리고 횃불과, 끝에 솔방울들을 회향풀로 감은 막대 튀르소스(thyrsos)를 휘두르며 산야의 언덕에 모여 유오이!’(Euoi!)를 외치며, 프루트와 팀파논(tympanon, kettledrum)의 리듬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춘다. 이들은 독주를 마시면서 점점 황홀경에 빠져드는데 이때 살아있는 들짐승을 여덟 갈래로 찢어 피흘리는 고기를 그대로 먹는다(omophagia), 더욱 끔찍한 사실은 살아있는 인간 소년을 여덟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먹기도 한다는 것이다(allelophagia), 사실 아브라함이 말년에 얻은 자식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풍속도 결코 기이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튼 이것은 타이탄들이 디오니소스를 찢어 먹은 것을 다시 연출하는 것이다. 그 찢기는 생물은 신의 화신이다. 타이탄들은 지상에서 태어났지만 디오니소스를 찢어 먹고 나서 신성의 불꽃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카스축제의 무녀들도 이러한 의식을 통해 신성에 합일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광적 도취에 의하여 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일반적인 방법에 의하여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신비로운 지식(그노시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광란에 빠진 매나드와 꼴려있는 바카스의 종자 사티로스. 매나드 여인은 한 손에 찢은 동물, 한 손에 튀르소스를 들고 있다. BC 490년경의 아티카지역 사발 그림. 

 

 

피타고라스와 싯달타

 

 

오르페우스는 전통적인 바카스축제가 지나치게 광란의 오르지(orgy)로 흐른 것에 새로운 정신적 요소를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즉 엑스타시를 광란에 의하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초기승단의 선정(禪定)과도 같은 금욕의 방법을 강조했다. 육체적 도취를 정신적 도취로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오르페우스를 박카스신앙의 개혁자라고 한다면, 오르페우스종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매우 혁신적이고도 신비로운 사상가가 바로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였다.

 

그는 이태리 남부에 있던 그리스 도시 크로톤(Croton)에 매우 신비로운 종교집단, 그러니까 나중에 사해부근에서 사해문서의 발견과 함께 고고학적 발굴로 드러나게 된 쿰란 커뮤니티와도 비슷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그 속에서 교주 노릇을 하고 살았다. 우리는 그를 인류에게 수학을 선사한 위대한 과학자처럼 이해하고 있지만 고대세계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는 분리될 수 없었다. 종교적 통찰이 과학적 사색을 낳았고, 과학적 발견이 종교적 신념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아인슈타인과 최수운(崔水雲, 1824~64)과 김일부가 한몸이 된 그러한 류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종교단체에는 강력한 금기규칙이 있었는데 그 제1계명이 콩을 먹지말라는 것이었다. 좀 이해되기 어려운 규칙이다. 떨어뜨린 물건을 줍지말라, 흰 수탉을 만지지말라, 빵을 쪼개지말라, 쇠붙이로 불을 휘젓지말라, 됫박 위에는 앉지말라, 심장을 먹지말라, 문지방을 밟고 넘지말라, 제비와 함께 지붕을 쓰지말라, 냄비를 불에서 꺼내었을 때 냄비자리가 재 속에 남지 못하도록 그 흔적을 저어서 없애라, 이부자리에서 자고 있어났을 때 반드시 이부자리를 토닥거려 몸이 눌린 자국을 없애라 등등의 규칙은 그 나름대로 원시적인 타부로서 이해 가는 측면도 있지만, 콩을 먹지말라는 계명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여튼 된장 없이 못 사는 한국사람은 그곳에서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콩을 먹지 말라는 규율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 신앙촌을 이탈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 신앙촌을 지배한 사상의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윤회였다. 그것은 싯달타(Siddhartha)를 지배한 세계관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윤회란 우리의 영혼이, 육신의 다리(교각)들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끊임없는 여행은 결코 바람직한 사태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고통의 굴레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해야 한다. 이 이탈을 해방이라 불렀고, 불교도들은 해탈(解脫)이라 불렀던 것이다. 윤회로부터의 근원적인 벗어남이 곧 열반(涅槃, nirvāṇa)인 것이다.

 

싯달타나 피타고라스나 다 같이 이 열반을 획득하는 길을 사색을 통하여 발견하려고 했다. 싯달타나 피타고라스나 모두 최초의 출발점은 금욕이나 극기였다. 싯달타는 우파니샤드(Upanisad)의 범아일여론에서부터 고행의 수행을 출발시켰고, 피타고라스도 오르페우스종교의 금욕주의 수행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싯달타는 단순히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의 한계를 자각하고 중도를 체득하기에 이른다. 중도는 깨우침이요 앎이다. ‘붓다’(Buddha)라는 것은 바르게 안 자라는 뜻이다. 무엇을 알았는가? 그가 안 것은 선정(禪定)의 주체인 나(Atman)라는 존재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한 고리일 뿐이라는 우주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연기에 대한 깨달음은 무아(無我, anātman)의 증득(證得)으로 연결된다. 무아를 통하여 싯달타는 인간의 근본무명을 타파하기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피타고라스도 사색을 통하여 해탈의 증득을 얻으려 했다. 그가 도달한 근원적 깨달음은 바로 우주의 실상이 수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수적 질서에 대한 관조를 통해 인간은 근원적 해탈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적 질서에 관한 철학적 사색은 영혼의 정화를 가져올 수 있고, 이러한 영혼의 정화는 곧 인간이 신적 경지와 합일이 되게 하며 해탈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신비적 수리는 구극적 해탈의 문의 열쇠였던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이러한 수리적 신비주의는 사유가 감각보다 우월하며, 직관이 관찰보다 탁월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실상(Reality)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허망한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사유적 세계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존재론적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사유가 감각보다 더 고귀하며, 사유의 대상이 지각의 대상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하는 모든 희랍적 사고방식의 광맥의 원류에 피타고라스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르페우스의 요소는 피타고라스를 통하여 플라톤으로 흘러들어 갔고, 또 다시 플라톤을 거쳐 그 이후의 모든 철학에 배어들어 갔다.

 

사실 모든 철학이 매우 엄밀한 논리와 무전제적인 사고를 과시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궁극에는 항상 종교적 세계관이나 신비적 통찰을 깔고 있다. 철학은 종교를 부정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종교적 가치관으로부터 배어나오는 순수한 사유의 세계라 해야할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 감관계와 예지계를 나누고,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여지없이 둘로 나누어버리는 그의 에로스적 초월적 세계관은 본질상 모두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 철학의 변형태에 불과하며 그 배후에는 오르페우스종교와, 그와 유사한 희랍인들의 종교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 희랍인들에게 있어서는 신화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는다. 신화는 그들의 종교의 어휘였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기하학주의적인 이원론을 생물학주의적 일원론으로 환원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불철저한 이원론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플라톤의 이원론을 현상의 질서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시켰지만, 그의 4원인설이나 형상과 질료의 변증법에는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형태로 남아있다.

 

 

 알렉산더의 세계정복

 

 

 

알렉산더 세계정복의 의미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은 자기 스승의 구태의연한 형이상학적 세계질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관념이 아닌 이 시공, 이 땅 위에 개척하는 데 광분한 패기 넘친 젊은이였다. 젊은 알렉산더는 BC 334~32410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에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했다. 그는 원래 마케도니아 사람이라서 아테네중심의 희랍질서로부터는 변방적인 인물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희랍질서를 편견없이 동경했고, 그가 정복하는 모든 곳마다 희랍의 모든 것, 도시, 언어, 철학, 가치, 삶의 방식, 종교, 예술, 과학 등 그 모든 것을 전파했다. 그가 10년 동안 정복한 세계는 아시아와 시리아,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사마르칸트, 박트리아와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까지를 포괄하는 방대한 영역이었다.

 

그의 비망록을 보면 그는 정복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그가 정복한 지역을 영구히 다스리는 데 체계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바빌론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아직 만 33세도 채우지 못한 청년이었다. 그의 젊음은 어떠한 고착적인 발상도 허락하질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복하는 모든 지역마다 그 지역이 존숭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문화ㆍ종교ㆍ예술을 존경해주었다. 따라서 알렉산더의 세계정복은 희랍문화의 전파와 동시에 좁은 폴리스공동체에 갇혀있던 희랍 도시국가문명의 종식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거꾸로 동방으로부터의 모든 종교나 예술이나 가치, 새로운 문명의 요소들이 역류되어 왔다.

 

·서문명의 대거 융합으로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등장하고 다양한 가치관의 용인과 함께 보편주의적 사고가 생겨났다. 알렉산더 자신도 희랍인들의 우월의식에서 본다면 야만적이기만 했던 이방인의 두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의 마케도니아 장수들도 이방인의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융합으로 비로소 사색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류 보편’(mankind as a whole)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BC 323년 알렉산더대왕의 죽음으로부터 BC 30년 클레오파트라의 죽음(로마가 이집트를 병합)까지를 헬레니즘 시대(the Hellenistic Period)라고 부르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이 헬레니즘문명의 소산이라고 하는 매우 기초적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다각적인 고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디 흑룡강성의 북부여나 비류수(沸流水)변의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생겨난 종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알렉산더대왕의 대리석 석관. BC 325~311사이, 현 레바논의 시돈에서 제작.

  

 

기독교의 출발은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예수의 사후 초대교회는 이미 헬라화된 유대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그 주도권을 장악해갔으며, 이들은 기독교를 유대인이 아닌 헬레니즘 세계의 이방인들에게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이라는 사상가였다. 바울은 철저히 헬레니즘문명권에서 성장한 헬레니즘 사상가(a Hellenistic thinker)였다. 그리고 AD 100년경에는, 최소한 2세기 초반에는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헬레니즘세계의 이방인들만의 종교로서 성장하여갔던 것이다. 물론 초기 기독교의 모든 문헌들도 헬라어, 즉 헬레니즘시대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코이네 희랍어로 쓰여진 것이다. 바울의 서간도 모두 희랍어로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독자들에게 기독교를 헬레니즘의 틀 속에서, 헬레니즘적 사유체계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헬레니즘시대의 산물이면서도 헬레니즘적 사유를 철저히 거부한 측면이 강하다. 아니, 거부했다기보다는 헬레니즘적 상식의 세계에 도전하면서, 헬라화된 로마세계에 새로운 논리와 시각과 활력을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초기 기독교사의 전개는 어디까지나 졸본부여나 예맥의 장이 아닌, 에베소, 안티옥, 알렉산드리아 등 지중해연안의 헬레니즘의 장에서 끊임없이 헬라스사상과의 교섭을 통해서 성장하여갔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다양한 기독교운동이 존재하였다. 물론 그러한 다양한 기독교운동 속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도 일양적(一樣的)인 해석을 거부하는 다양한 모습이었다.

 

 

 애마 부세팔로스를 타고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20대 청년 알렉산더의 리얼한 모습. 투구의 사자는 희랍의 헤라클레스를 상징하고 귓밥의 양뿔은 이집트의 아문신을 상징한다. 오른 손은 창을 던지는 다이내믹한 포오즈. 윗 사진의 석관 왼쪽 최 외곽부분확대 

 

 

 

인용

목차

성경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