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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건방진방랑자 2022. 2. 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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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헬레니즘의 사유

 

 

아타락시아

 

 

헬레니즘시대에는, 희랍고전시대의 철학이 우주의 본체를 추구하는 존재론적 탐구(ontological quest)에 집착하였다고 한다면, 다시 동방사상의 유입으로 인생론적 문제, 개인의 구원과도 같은 아주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들은 덕(, aretē)을 말하였고, 행복(eudaimonia)을 말하였고,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를 말하였다. 희랍의 초기 자연철학이 페르시아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년경~429) 황금시대를 맞이하면서 소피스트철학의 난무로 장이 바뀌었듯이, 알렉산더대제의 제국문명이 도래하면서 또다시 인간의 삶의 문제에 관하여 근원적이고도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인 해결을 꾀하려는 운동들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적이고도 우상파괴주의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마음의 상태를 확보하려고 했으며, 이들의 추구는 대체적으로 반문명론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제국주의적 전화(戰禍)나 풍요로움 속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소외를 자각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시대의 사조로서 우리는 견유학파(Cynicism), 회의주의(Skepticism),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 스토아학파(Stoicism), 그리고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BC 3세기경의 헬레니즘 시대의 원작으로 사료되는 이 무명의 노파 조각(the statue of an old woman)은 헬레니즘 시대의 정신을 너무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전시대의 작품처럼 완벽한 비율을 지닌 이상적 나체의 신상을 형상화하고 있질 않다. 못생기고 지친 한 노파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꾸부정하게 걸어가는 평범한 삶의 한 장면을 축 쳐진 의상의 주름과 함께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인간세의 윤리적 고뇌를 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고뇌 속에서 바로 기독교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견유학파의 가치관

 

 

견유학파(Cynicism)의 견유(犬儒, cynic)란 문자 그대로 개 같이(canine) 사는 지식인이란 뜻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이미 이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반문명적이었나를 알 수가 있다. 이들은 종교, 풍습, 옷차림, , 음식, 예절 등 일체의 인간세(人間世)의 전통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일년 내내 한번도 빨지 않은 남루한 옷을 걸치고 구걸하며 살았다.

 

그들은 전 인류에 대한 동포애뿐만 아니라 동물 전체에 대한 동포애를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 시노페의 디오게네스(Diogenes of Sinope, BC 412~323)는 평생을 절구통 속에서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알렉산더대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절구통 속을 들여다 보면서 알렉산더대왕이 물었다.

존경스러운 철학자님!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때 디오게네스는 무어라 말했을까?

 

 

내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

Please stand out of my light!

 

 

이 극적인 해후의 장면은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 상징적 언사에 가려져있는 심오한 사유를 그냥 가벼운 해프닝으로 스쳐지나가 버린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가 건설하려고 하는 제국문명 전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실존적 삶에 필요한 것은 알렉산더대왕의 부귀와 권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비치고 있는 햇빛이면 족하다. 여기에는 유위적 문명에 항거하는 무위적 자연에로의 회귀사상이 있다. 그리고 최소한의 질박한 삶(simplicity)과 자기절제(self-control)로서 얻을 수 있는 도덕적 자유, 모든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구가한다. 디오게네스는 나는 현존하는 모든 가치를 재주조한다”(I recoin current values.)고 말했는데 그의 재주조는 니체의 가치전도보다도 훨씬 더 래디칼한 것이다. 견유학파(Cynicism)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초기불교 승단의 아라한들, 컴컴한 비하라(vihara) 굴 속에 앉아있는 수행자들과 매우 자유로운 노장(老莊)철학의 무위(無爲)사상이 결합된 그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면 정확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견유학파의 사상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시기에 매우 유행한 사상이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들은 물질적 소유 없이 사는 법, 소박한 음식으로 행복할 수 있고, 비싼 옷이 없이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의 하찮음, 자녀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의 어리석음 등등을 설파하는 작은 설교집을 유포시켰다. 이렇게 하여 견유학파의 사상은 매우 대중화되었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세속적 가치의 부정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부나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에 대하여 아주 래디칼한 전도를 요구하고, 바리새인들이 신봉하는 율법적 사유의 철저한 부정을 가르치는 예수라는 사상가의 시대적 분위기를 읽어내기 힘들다. 최근에 발굴된 초기 기독교 자료로서 Q자료보다도 더 오리지날한 예수어록 파편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도마복음서(The Gospel of Thomas)속에 비쳐지고 있는 예수는 견유학파의 한 지혜로운 사상가 같은 느낌이 든다. 인자(Son of Man)를 주어로 하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종말론적 언급이 없다. 종말론적 사유는 오히려 시간적으로 역전되어 있다. 천국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분화되기 이전의 합일된 원융한 원초적 사태이다. 노자(老子)혼돈(混沌)’을 연상케 한다.

 

 

 

 

스토아학파의 사상

 

 

견유학파(Cynicism)의 사상은 스토아학파(Stoicism)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스토익들(Stoics)은 견유학파의 자기절제와 세속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을 계승하였지만 문명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최소한의 즐거움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다운 인간의 행복이란 어떠한 외재적인 것에 의하여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의 경지, 아파테이아(apatheia)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연에 따르는 생활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로고스(Logos)이며 이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덕(Virtue)이란 바로 이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욕정(passions)은 영혼의 질병이다. 자연에 따르는 생활이란 이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이성의 힘에 의하여 욕정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성으로써 욕정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유덕한 사람이며, 이들이야말로 자율적 이성에 의한 자족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이성은 후대 자연법사상(Natural Law)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바울의 율법관도 이러한 스토아철학의 자연법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2:14. 우주를 하나의 단일한 생명체로 보고, 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하나의 로고스라고 보는 이러한 스토아철학의 어휘는 요한복음의 로고스사상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다.

 

이러한 관련을 운운한다면, 다시 말해서 예수를 말씀(로고스)과 일치시키는 사유체계를 운운한다면, 일찍이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에게까지 소급되어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감각(sensation)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사유(intellect)에 나타나는 영원한 세계에 관한 모든 관념은 피타고라스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오르페우스종교, 피타고라스의 수리적 신비주의, 견유학파(Cynicism), 스토아학파(Stoicism), 그리고 영지주의,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논리로써 꿸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 모두 관련되어 헬레니즘문명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관계 속에서 기독교의 다양한 제문제들이 파생하였던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계항으로써 기독교를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독교를 이해하는 우리의 틀은 이러한 모든 함수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을 대변하는 로마시대의 사상가로서 우리는 세네카(Seneca, BC 3~AD 65)를 들 수 있지만 그는 불행한 제자를 두었다. 기독교도들을 별 이유없이 박해한 네로 황제가 바로 세네카의 제자였다. 사실 네로 황제야말로 초기 기독교 교회를 결속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도 네로가 죽였다. 네로가 사도 바울을 죽였을 그 즈음, 자기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할 수 있는 자비를 베풀었다(AD 65), 혈관을 끊은 후 비서가 받아쓰는 가운데 최후의 순간까지 장엄한 웅변을 쏟아내면서 침착하게 저승으로 사라졌다. 명상록 (Meditations)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21~180) 황제가 후기 스토아학파(Stoicism)의 대가라는 사실은 조선의 독자들에게도 너무 잘 알려져있다. 스토아철학은 황제로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는 로마사회의 가장 보편적 교양이었다.

 

 

 

 

에피큐로스 학파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는 쾌락(pleasure)이 유일한 선이라고 주장한다. 쾌락은 축복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학문이건, 도덕이건,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쾌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영어로 에피큐어’(epicure)라 하면 식도락가라는 의미가 된다. 이들은 모든 선의 근원은 위()의 쾌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탐식(貪食)을 하면 위에 고통이 올 것이다. 따라서 위의 쾌락을 위해선 절식(節食)이 요구될 것이다. 참다운 미식가들은 먹는 것을 잘 조절해야 한다. 사람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내적 본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쾌락의 강도와 지속에 있다. 과도한 쾌락의 추구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결국 쾌락의 추구는 결국 고통의 회피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동적인 쾌락(dynamic pleasures)보다는 정적인 쾌락(static pleasures)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얼핏보면 에피큐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Stoicism)는 각각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라는 상반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에피큐리안들의 쾌락주의도 결국 금욕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쾌락의 지속을 위해서는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신중함에 의하여 조절되는 이성적 삶을 통하여 몸과 마음의 평정(equilibrium)을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다.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기쁨은 격렬한 쾌락이다. 그러나 그러한 쾌락은 위장의 고통을 수반한다. 항상 먹는둥 마는둥 소식과 절제로 신체적 평정을 유지해야만 정적 쾌락이 유지된다. 이러한 경지를 그들은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에피큐로스(Epicurus, BC 341~270)는 공포를 피하는 문제로부터 그의 사변철학을 출발시켰다. 인간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가장 큰 두 근원이 있으니, 그 하나가 종교이고 또 하나가 죽음이다. 그런데 이 두 원인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죽음의 공포를 고취하는 것으로써 그 존재이유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은 인간사에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영혼은 육신과 함께 멸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을 수립했다. 많은 사람이 종교를 위안으로 생각하지만 에피큐로스는 종교야말로 공포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물론자였다. 따라서 영혼도 물질이다. 죽음은 걱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죽음은 영원히 감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든 감각의 종료를 의미할 뿐이다. 영혼불멸에 관한 모든 교설은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에 대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야비한 이론일 뿐이다.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의 이론은 인도의 차르바카(cãrvãka)철학과 매우 유사하다. 하여튼 헬레니즘시대의 동서교류는 구체적으로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자유로운 사상들의 융합을 가져왔다. 이것은 매우 개명한 생각들이며 달관한 인본주의의 사유체계들이다.

 

 

 

 

회의학파

 

 

회의학파(Skeptics)는 실천론이 아닌 지식론에 있어서 아타락시아(ataraxia)를 추구했다. 일체의 이론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킴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의 지각은 결코 외물(外物)의 진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승인하지 않을 수 없는 보편적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 궁극적 실재에 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명제에 대하여 확실한 진위 판단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판단 중지를 이들은 에포케(epochē)라고 불렀다.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말고, 어떤 것에도 동의하지 말라!

 

신플라톤주의자로서는 플라톤철학에 의하여 유대교를 해석하고 신학의 체계화를 꾀한 유대인 사상가, 예수와 완벽하게 동시대의 사람인 필로(Philo, BC 15-10~AD 45-50)가 있다. 필로의 로고스사상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인격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그것은 요한복음 로고스사상의 선구적 사상으로서 많은 학자들의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도행전 17에 보면 아테네를 방문한 사도 바울이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스토아학파(Stoicism)의 여러 철학자들과 쟁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신약성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장면을 아주 가볍게 간과해버릴 수 있지만(17:16~34) 헬레니즘세계에 관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헬레니즘의 심장부인 아테네에서 헬레니즘의 주류철학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는 좀 무모하고도 용감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동정적으로 연상하는 것은 참으로 스산한 느낌을 자아낸다. 물론 사도행전의 이러한 기사는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기 때문에 바울의 쟁론에 대한 에피큐리안들이나 스토익들의 구체적인 반론이나 비판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사도 바울은 마치 아고라에서 소피스트들과 변론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렸다.

 

 

 

 

사도 바울의 도전

 

 

사도 바울은 우선 다신론적인 아테네의 분위기를 지적한다. 신상으로 가득 차 있는 아테네의 거리를 보고 우선 헬라스 사람들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해준다. 그러나 신들이 하도 잡다하게 많아, ‘미처 알 수도 없는 신들에게까지 제사지내고 있는 그들 신앙의 그릇된 현황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배하는 신들,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그들의 신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인간의 협애한 상상력 속에서 제조된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모든 우상들을 초월하는 이 전 우주의 창조자로서,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 살지 않는 구체화시키기 어려운 단 하나의 하나님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돌이나 은이나 금으로 만든 형상은 아니지만 모든 개개인의 삶 속에서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구체적 존재라는 역설을 말한다. 우리는 그 하나님, 그 분 안에서 쉬며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특유한 종말론적 교설을 선포한다. 그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한 사람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종말론적 구원의 증거를 보이셨다. 바울의 테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며, 재림과 마지막 심판이다. 이 임박한 심판을 앞두고 있는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령한다.

 

사실 이러한 메시지는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스토아학파(Stoicism)의 사람들에게 하등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언사가 아니다. 당대 헬레니즘시대는 이미 우주에 대한 법칙적 사고가 성숙했으며, 인생의 궁극적 진리에 관하여서도 종말론적 선포가 하등의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인간 심성(心性)에 관한 인본주의적 해석이 난숙해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부활을 근거로 회개를 명령하는 바울의 논리가 아테네에서 먹혔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상황에 관해 사도행전의 저자(누가?)는 매우 담담한 필치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바울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훗날 다시 그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17:32. 공동번역),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역사적으로 실존한 하나의 인간이, 아무리 성부·성자·성신의 삼위일체를 이론적으로 수용한다 하더라도, 육신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종말론적 회개의 근거로서 선포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케리그마로써 인본주의적 정신이 성숙한 헬레니즘세계를 공략해 들어갔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특이한 자기 자신의 비젼에 미쳐버린 광적인 지식인의 독백에 그친 사태가 아니라, 실제로 바울의 생애 당대에 이미 그러한 교설과 믿음이 헬레니즘세계에 광범하게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한 인간의 죽음과 부활의 미스터리를 푸는 것보다 더 난해한 사태일지도 모르겠다. 사도 바울은 동학의 케리그마를 유포시킨 해월(海月)의 이야기보다는 더 성공적인 족적을 인류사에 남겼던 것이다.

 

 

 

 

헬레니즘의 로고스를 격파한 기독교

 

 

사도 바울이 헬라문명권에서 성장한 헬라화된 유대인이며 헬레니즘이 유창한 희랍어를 통하여 체화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가 펼친 논리를 헬레니즘적 사유체계 속에서만 규정해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헬레니즘의 인본주의적 합리성의 암벽을 뚫고 들어가는 유대전통의 독특한 사유체계와 믿음체계, 그리고 그러한 초합리적 사태를 해석하는 바울 자신의 독특한 논리체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자신의 독창적 창안이 아니라 예수라는 실존체의 말씀과 뚜렷한 내면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예수는 신화다의 저자는 초대교회의 성립사에 관하여 보다 면밀한 고찰을 했어야 했다. 도대체 예수의 실존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최초의 팔레스타인의 신앙공동체들의 성립과정을 설명하기 어렵다. 단지 그의 논리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의 기독교공인 이후의 기독교 발전 상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영지주의자들(Gnostics)과 문자주의자ㆍ사실주의자(Literalists)의 대결의 틀은 현경 교수의 말대로 참고할 가치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전반적 인식이 없으면, 인본주의사상으로 깊게 단련된 조선조의 문명체계가 어떻게 그렇게 대규모적으로 전혀 황당한 듯이 보이는 신화적 논리 앞에 무릎을 꿇었는지, 그것은 단순히 당쟁으로 얼룩진 권력의 장 속에서 소외되고 핍박받은 남인(南人)들의 정치적 상황이라는 구실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춘추(春秋)시대에 이미 공자괴력난신(怪力亂神)을 거부하는 경원(敬遠)의 인문주의를 표방했고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의 성론(性論)으로 발전하여 그러한 인문주의는 이론적 깊이를 더해갔다. 한초(漢初)에는 금고문경학(今古文經學) 논쟁을 거치면서 방대한 경전 해석학을 성립시켰고 동시에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누르고 독존(獨尊)의 국교로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에서 만개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도전을 거치면서도 송()대에는 다시 이기론(理氣論)의 무기를 들고 나와 불교를 파출(罷黜)하고 다시 정통(正統)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심성론(心性論)의 다양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이러한 합리적이고도 인본주의적인 심성론으로 오백년의 사직의 기초를 다져온 조선조문명이 예수의 복음으로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진다는 것은 19세기말기까지만 해도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종로통에서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무작위적으로 물어보라! 퇴계성학십도(聖學十圖)율곡성학집요(聖學輯要)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더 많겠는가,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의 구절을 줄줄 암송해대는 사람이 더 많겠는가? 정약용의 방대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위용을 생각할 때, 그 안의 중용자잠(中庸自箴)의 몇 구절 속에 도사려 있는 기독교적 하느님(上帝)의 빈곤한 논리가 오히려 그 전서의 위용을 무색하게 만든 새시대의 논리로 전개되어나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결코 단순한 논리적 반박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유교문명권 내에서 성장한 오늘 한국기독교의 문제를 상고하는 것이나, 헬레니즘문명권 내에서 성장한 초기 크리스챤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에는 모종의 공통된 논리의 핵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뮈토스(Mythos)를 탈출한 헬레니즘의 로고스를 기독교라는 새로운 뮈토스가 다시 격파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인간의 실존과 관련된 영원한 문제상황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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