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성서고고학의 양대 사건: 쿰란과 나그 함마디
20세기는 동·서문명의 고전학(古典學)에 있어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진 세기였다. 황하(黃河)문명권의 최고의 지혜의 서라 할 수 있는 『노자(老子)』의 백서(帛書, 비단에 쓴 책) 고판본이 2종이나 완정한 형태로 호남성(湖南省) 마왕퇴(馬王堆, BC 168년 무덤)에서 발굴되었고, 『주역』의 백서고판본과 대량의 고귀한 고전판본들이 같이 출토되었다. 1973년 11월부터 74년초에 걸친 사건이었다.
그리고 1993년에는 호북성(湖北省) 곽점촌(郭店村)에서 BC 3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노자』 죽간본(竹簡本)이 나왔다. 그외로도 중국 최고의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이 새겨진 귀갑(龜甲)ㆍ우골(牛骨)의 발견, 명문이 있는 청동기나 고대 역사유물의 대량출토는 중국고문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진시황시대의 사람들이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 20세기를 거친 오늘 우리가 중국 고문명에 관하여 훨씬 더 정확하고 소상하게 알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신·구약성서와 관련하여서는 천지를 굉동(轟動)시키고도 남을, 방대한 문서의 발견을 포함한 양대사건이 있다. 하나는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사해 북단의 쿰란지역의 11개 동굴에서 800여 개의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기원전 2~3세기로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에스더」와 「느헤미야」를 제외한 202개의 구약성서 사본과 외경, 위경, 외부문서, 내부문서 그리고 성서 해석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해문서와 관련하여 이 동굴 라이브러리를 존립하게 만든 공동체 취락군들이 발굴되었는데, 우리는 이 공동체를 포괄적으로 쿰란공동체(Qumran community)라고 부른다.
이 공동체는 BC 150년경부터 AD 68년경까지 지속적으로 존립했는데 이곳의 건축물들은 개인들의 일반 주거가 아니라 공동체생활을 목적으로 지어진 것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개인들의 주거는 그 주변으로 광범하게 텐트나 토굴의 형태로 산재했을 것이다.
세례요한과 쿰란공동체
이 쿰란공동체는, 예수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인 프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년경)의 엣세네파에 관한 상세한 기술과 일치하는 많은 문서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연구결과는 쿰란을 대강 엣세네파 공동체로 간주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복음서에는 바리새인(the Pharisees)이나 사두개인(the Sadducees), 열심당원(the Zealots) 등은 언급되고 있지만 엣세네파(the Essenes)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엣세네파도 세례 요한이라는 역사적으로 그 실존성이 확실히 인정되는 인물과의 관련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신약성서의 한 시대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엣세네파의 한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세례 요한의 행태나 신념의 상당부분이 이 쿰란 엣세네파 공동체와 유사하다는 논지가 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살았고,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막 1:6, 마 3:4). 그리고 독자적인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매우 검약한 금욕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어떤 커뮤니티에 속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활동지역을 갈릴리지역의 요단강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아마도 갈릴리바다의 남단에서 요단강으로 흘러 내려가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요르단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두루 다녔다고 쓰고 있다(눅 3:3), 요한복음만이 세례 요한의 활동지역을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Bethany, 요 1:28)와 살렘(Salim)에서 가까운 애논(Aenon)으로 수량이 풍부한 지역이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는데( 요 3:23), 지금 이 지명으로는 확실한 지점을 비정키 어려우나 쿰란으로부터 멀지 않은 여리고 지역의 요단강가로 사료되고 있다. 하여튼 세례 요한은 쿰란공동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공동체를 리드하고 있었으며, 쿰란공동체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직·간접적인 접촉이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쿰란과 엣세네
‘세례를 통하여 죄사함(forgiveness of sins)이 이루어진다(사 5:31)’는 발상은 전혀 유대교적인 전통이 아니다. 불트만과 같은 석학도 그것을 동방종교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페르시아나 바빌론의 고대신화 제식의 영향으로 간주한다. 후대의 만대아교(Mandaeanism)의 세례제식도 요한의 운동이 발전해나간 것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 공동체와 쿰란공동체 사이에는 세례라는 제식의 공통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말론적 기대, 즉 메시아 대망사상이나, 우주의 종말, 마지막 심판, 그리고 회개 등등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세례 요한을 엣세네파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나 도올은 그렇게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례 요한의 사상과 쿰란공동체 사상 사이에는 ‘세례’를 둘러싼 제식적 의미에 관해서도 매우 래디칼한 차이가 있다【이 차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나의 요한복음강해 126~127을 보라】. 아마도 굳이 세례 요한을 엣세네파와 관련지어 설명하려고 한다면 세례 요한이야말로 엣세네파의 제식주의나 종말론적 사유의 편협성을 과감하게 탈피해버린 매우 혁명적인 사상가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혁명적 발상을 더 한 발자국 앞으로 밀고 간 인물이었다. 예수는 ‘물에 의한 세례’를 믿지 않았다. 그는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새로운 영적 차원을 도입했던 것이다.
예수(성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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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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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세네파 쿰란공동체(율법) |
세례 요한에 대한 기사도 모두 예수제자들이나 초대 크리스챤교회 조직의 입장에서 찬술된 것이기 때문에, 그 독자적 성격에 관한 정보가 매우 빈약한 상태에서 쿰란공동체의 내부사정을 알려주는 고고학적 발굴과 문헌들은, 세례 요한과 그 집단의 역사적 성격을 재구성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그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에 대한 풍요로운 이해는 당연히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의 청년시절에 관한 정보부재, 그리고 40일간의 광야의 고투로 상징되고 있는 그의 광야유혹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인도를 다녀왔다는 등 황당한 이야기를 지어내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예수가 젊은 시절에 쿰란공동체와 유사한 어떤 공동체에서도 생활해본 적이 있는, 광야에서의 어떤 고행(苦行)을 체험하고, 그 체험으로부터는 인간의 구원이 생겨날 수 없다는 절망감을 자각한 인물, 그리고 그 자각과 동시에 전혀 새로운 발상과 비젼을 획득하고 구세의 공생애로 자기 삶을 던진 어떤 인물이라는 매우 안전한 상상을 해볼 수 있다. 최소한 쿰란은 문학적 상상이나 신화적 픽션이나 문헌적 날조가 아닌, 고고학적 사실이며 물리적 근거가 있는 역사적 현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현실은 쿰란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 당대 팔레스타인 광야에 널려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신약시대 배경사에 관한 많은 구체적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쿰란 발굴의 역사적 의미
사해쪽에서 바라보면 달이 걸려있는 언덕이라고 해서 이름 지어진 이 쿰란(Qumran, moon hill)지역 공동체는 엄격하게 유대인공동체였고, 구약성서의 모든 것, 그 율법과 유대교전통을 신봉하는 규율집단이었다. 자기들이야말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비하기 위하여 악과 전쟁을 해야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선택된 새로운 계약공동체라고 믿었다. 이들이 본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발굴은 구약성서에 관하여 우리가 물리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사본을 엄청나게 대량으로 제공했다. 이로써 마소라텍스트 히브리어성경과 셉츄아진트(Septuagint, 칠십인 역), 사마리아오경(Samaritan Pentateuch) 등 현존하는 문헌의 가치를 형량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이 생기게 되었다【사마리아오경에 관해서는 『요한복음강해』 217~218을 참고할 것】. 구약판본학의 혁명적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최고본의 출현으로, AD 6~10세기에 걸쳐 히브리구약의 원본을 재구성한 마소레티스 유대인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한 마소라 텍스트(Masoretic Text)의 정밀성이 입증되었고 또 동시에 구약에 있어서도 고정적 원본(Urtext)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본문형태(text-type)의 다양한 필사본의 존재는 필사자들의 단순한 실수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즉 쿰란시대에도 고정된 형태의 본문은 없었고 성서본문이 전달,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됨으로써 성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는 역사비평가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었다(천사무엘, 『사해사본과 쿰란공동체』 163).
키히르벹 쿰란(Khirbet Qumran)의 발견의 총체적 성과를 평가한다면 우리에게 그동안 모호하게 남아있었던 신구약 중간시대 혹은 간약시대(間約時代, Intertestamental Period, 대강 BC 150~AD 70 사이를 말함)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사실(史實)적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서는 단지 유대이즘의 종교와 역사를 재구성할 뿐 아니라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약의 태동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역사적 개인의 사역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신약의 성립은 전적으로 초대교회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교회 없는 성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데 교회는 교인들의 공동체이다. 요새와 같이 일정한 시간에 통근하는 사람들(commuters)의 집합체로서의 추상적인 회중을 의미했다기보다는 작은 단위의 삶의 공동체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도시나 큰 마을에는 전통적으로 시나고그(Synagogue, 會堂)라는 열린 공간이 있어서 요즈음 교회 비슷한 유대교 로칼센터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의 초대교회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개방적 공간으로서 몇몇 집사나 장로의 무형적 조직으로 이루어진 그러한 공동체로써는 초기기독교운동을 밀고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대부분의 강력한 전위적 초기교회는 쿰란스타일의 생활공동체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쿰란공동체야말로 ‘예수 이전의 그리스도공동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을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즉 히브리말로 ‘메시아’ (messiah)에 해당되는 일반명사로 이해한다면 쿰란공동체는 얼마든지 그리스도공동체로서 규정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쿰란공동체의 연구를 통하여 초기 크리스챤공동체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쿰란 사해문서의 발견과 동시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거대한 발견은 요르단강변이 아닌 나일강변에서 이루어졌다. 초기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나일강은 매우 중요하다. 나일강 하구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때문이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하면 지금 이집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별볼일 없는 무슬림의 도시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알렉산드리아야말로 예수시대에는 지중해 연안문명에서 가장 번성한 최대·최고의 문화도시였다. 알렉산더대왕은 자기가 정복한 헬레니즘 대제국의 본산으로서 아테네를 능가하는 새로운 문명의 센터를 이곳에 건설하려 했다. 마레오티스(Mareotis, Lake Maryūt)라는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이곳은 새로 정복한 이집트 영역의 신 수도였으며 지중해를 장악하는 해군기지로서 최적의 곳이었다. 알렉산더는 자기가 사랑했던 최측근의 건축가 디노크라테스(Dinocrates)에게 자신의 이름을 딴 이 도시의 설계를 맡겼으며, 헬레니즘의 최정화를 이곳에 구현시키려 했다. 1세기 만에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문명권의 가장 위대한 도시가 되었고 알렉산더를 계승한 프톨레미 1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디미트리오스(Dimitrios)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도서관에는 50만 권의 장서가 들어찼다.
유클리드(Euclid),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네오플라토니즘의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 르네상스시대의 관측을 선구한 천문ㆍ지리학자 프톨레미(Ptolemy, fl. AD 127~145), 에라스토스테네스(Erastosthenes, BC 276~194)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모두 이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미왕조 박물관(Mouseion)의 연구소에서 배출되었다.
예수의 현대사
프톨레미왕조의 마지막 여왕, 로마 공화정의 가장 찬란했던 두 영웅, 줄리어스 시이저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년경~기원전 30)를 사랑의 열정과 권세의 탐욕의 불길 속에 파멸시키고 끝내 독사의 이빨에 39세의 탐스러운 몸매를 던져 온갖 황금으로 치장된 침대 위에서 장엄하게 운명의 막을 내린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 BC 69~30), 그 숙명의 여인이 활약하던 무대, 셰익스피어가 영원한 로맨스를 연출한 그 무대도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버리라’(마 2:16)고 명령해서 예수의 출생이야기에 스릴감을 더해주었던 인물,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BC 73~BC 4)은 클레오파트라의 애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애인의 오랜 친구인 헤롯마저 유혹하여 자기 지배하에 두려했다. 헤롯은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을 물리쳤고, 옥타비아누스 편에 가담하여 유대의 통치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예수는 이러한 시대에 태어났다. 예수가 역사적 실존인물이라고 한다면 줄리어스 시이저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이야기는 물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 투쟁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플루타크 『영웅전』의 이런 이야기들 모두 우리가 박정희·이승만 이야기를 하는 것과도 같은, 예수의 현대사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정벌할 때, 유대인들은 그를 도와 첩자나 용병구실을 했다. 그래서 알렉산더대왕은 그 대가로 이 새로 만든 도시의 일정구역을 유대인의 거주지역으로 만들어주고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생활조건을 허락하고 그들의 활동을 장려했다. 유대인들은 유리한 삶의 조건만 있으면 이동하는 데 익숙해 있다. 곧 대량의 유대인 이주가 이루어졌고,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이즘과 헬레니즘이 교차ㆍ융합하는 코스모폴리스(cosmo-polis)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이주하여 온 유대인들은 개방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문화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은 헬레니즘의 모든 것을 편견없이 흡수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화된 유대인들이 만들어간 도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시대에는 이 세계적인 문명도시 인구의 절반 가량이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국제적인 무역을 장악했기 때문에 매우 부유했다. 예수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명절이나 축제도 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참여가 없이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AD 70년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에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커뮤니티는 건재했다.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이 다이애스포라를 찾아 알렉산드리아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유대이즘의 주요거점이 됨과 동시에 자연적으로 초기기독교운동의 대본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기독교는 원래부터 유대인공동체운동으로서 출발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것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인식했다. 알렉산드리아에 오래 거주한 유대인들은 히브리말을 하지 못하고 헬라말을 했다. 엘에이(L.A.)에 사는 교포들이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고 영어만 잘하는 것과도 같은 현상이다.
셉츄아진트와 쿰란 텍스트
프톨레미 2세(Ptolemy II, BC 285~246)는 유대인들에게 희랍어 성경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 12지파에서 각기 6명씩 선출된 72명의 학자가 72일 동안 제각기 독립된 골방에 쑤셔박혀 번역했는데 나중에 맞추어보니 번역의 결과가 정확히 일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고 유대인학자들은 그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다. 각 부족에서 합의를 거쳐 공동의 노력으로 정밀하게 이루어진 번역이라는 뜻일 것이다. BC 3세기~2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이 번역을 보통 ‘셉츄아진트’(Septuagint), 우리말로는 ‘칠십인역’이라고 부른다. 셉츄아진트는 그 나름대로 마소라 텍스트와는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인 히브리경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많은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것은 히브리어나 아람어 원본에서 번역되었고 어떤 것은 원본 없이 희랍어 자체로 구성되었다. 초기기독교인이 구약을 인용한다 하는 것은 히브리어 원전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셉츄아진트에서 인용하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의 정통후예임을 자랑하는(롬 11:1)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구약도 히브리성경이 아닌 셉츄아진트에서 인용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셉츄아진트가 성립했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시대에 얼마나 유대이즘의 헬라화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방증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셉츄아진트가 히브리어 원문에 없는 내용을 첨가하거나 원문의 내용을 생략했으며, 때로는 부주의하게 번역하거나 원문의 내용의 의미맥락을 바꾸어 교묘하게 왜곡시켰다는 주장이 본문비평과정에서 제시되어왔다. 그러나 쿰란문서의 발견은 이러한 주장을 뒤엎는 계기가 되었다. 쿰란문서 중에서 셉츄아진트 그 자체의 희랍어 초기사본(BC 2세기로 소급되는 문헌들)도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셉츄아진트 번역의 저본이 된 히브리어 텍스트도 많이 발견되었다. 여태까지는 셉츄아진트가 마소라 텍스트에 비교해서 6,000군데나 다르고, 이 다른 부분의 판정에 있어서 모두 셉츄아진트의 텍스트는 열등한 번역의 결과라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쿰란문서의 발견으로 셉츄아진트가 마소라 텍스트와는 다른 종류의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삼았다는 확증을 갖게 했으며, 이 책의 번역자들은 그 원문을 매우 신중하고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또한 그 번역자들이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번역방법의 원리를 적용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셉츄아진트의 가치는 재평가되었다. (천시무엘, 『사해사본과 쿰란공동체 160.)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문명을 로마에 넘겨주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보존되고 성장한 유대이즘의 전혀 새로운 국면, 초기 기독교라는 싹을 로마문명의 주류로 만드는 데도 결정적 기여를 했다. 기독교는 유대이즘과 헬레니즘의 본질적 융합에서 생겨난 기화(奇花)이다. 아니,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헬레니즘의 토양에서 새롭게 피어난 유대이즘의 독특한 가치관체계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초대교회역사를 생각할 때 지나치게 초기기독교인에 대한 로마권력의 박해를 확대해석해왔다. 『쿼바디스(Quo Vadis)』류의 영화 몇 장면이 주는 인상으로 로마제국과 초기기독교 관계를 그릇되게 설정해왔다. 로마가 실제로 박해한 것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해방이나 독립을 꾀하려는 운동이었지,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는 박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로마는 헬레니즘의 문화전통을 이어받아 다양한 신들의 종교문화를 수용하기를 즐겨했으며, 다양한 이방인들의 비교적(秘敎的) 종교전통을 포용했다. 예수는 일찍이 ‘시이저(가이사)의 것은 시이저(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막 12:17, 마 22:21, 눅 20:25)라고 말하여 자신의 영적 운동이 정치적인 맥락에서 떠나 있음을 명료하게 밝혔다. 다시 말해서 시이저가 지배하는 로마권력에 항거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초대교회와 네로 박해의 실상
초대교회의 역사는 실제적으로 시이저가 암살되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칭호를 획득한 이후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시대, 즉 제정 로마의 최전성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로마의 제정(帝政)은 제정이기는 하지만 공화정(共和政)의 축적된 전통의 기반 위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혹한 전제군주들이 아니었다. 초기기독교가 팍스 로마나의 평온한 분위기에서 세력을 팽창시켜 간 시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1~180 재위)에 이르는 5현제시대였다.
네로의 크리스챤 박해도 실상과는 달리 크게 부풀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AD 64년의 대로마화재사건의 주범으로서 기독교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로마화재와 네로 황제는 실제적 관련이 없었다. 네로는 화재가 발생할 당시, 로마에서 56km나 외곽에 떨어진 안티움(Antium)의 빌라에 있었고, 로마의 방화를 사주할 하등의 로만틱한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우발적 화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17세에 로마 역사상 최초의 절대권력의 일인황제로 등극한 그가 화재발생 당시에는 크게 인기를 잃었고 따라서 민심이 그에게 화재의 원인을 돌리자, 황제 주변의 관료들이 당시 평판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던 기독교인들에게 그 화재의 원인을 덮어씌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없었다. 희생되었다면 유대인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1923년 동경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 조선인이 희생당한 해프닝보다도 더 소규모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네로는 대중이 관람하는 무대 위에서 광대 노릇을 할 정도로 예술과 모험에 미친 사람이었고, 모든 이방인의 컬트에 심취했기 때문에, 특별히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탄압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인간이었다. 하여튼 네로는 로마사에서 애매하게 안티크리스트의 화신으로서의 누명을 뒤집어썼다.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공인되기 이전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박해를 받은 기간은 단 5년밖에 되지 않는다. 역병이 고대세계를 휩쓴 AD 250년, 기독교인들에게 희생동물을 바치라고 명령한 데키우스 황제(Emperor Decius)의 치세 1년간, AD 257~259년 발레리아누스 치하에서, 그리고 AD 303~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박해가 되풀이되었지만 교회사의 과장된 기술처럼 그렇게 무자비한 대규모의 학살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기록에 의하면,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받아 순교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의 숫자는 남자 10명, 여자 7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의 로마는 시민법(jus civile)의 시대를 지나 만민법(jus gentium)의 보편주의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스토아철학사상과 결합한 자연법(jus naturale)은 보편이성이 부여하는 모든 인간이 구유할 수밖에 없는 본성상의 평등한 권리를 존중했다. 따라서 종교적 신념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그렇게 함부로 인간을 다룰 수 있는 로마가 아니었다. 로마는 인간의 상식과 실제적 지혜를 존중하는 시민사회였고 법제사회였다.
순교의 자원(自願)
초대교회의 순교의 역사는 로마라는 정치권력의 박해에 기인하기보다는, 교회 내부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종말론적 신념체계 그 자체의 문제점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순교를 갈망했다. 그들은 하루 속히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속세의 삶을 종료시키기를 원했다. 그들의 순교는 영웅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영웅적 순교를 통해 하늘나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기술을 도올의 편견으로 오해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은 당시 로마법정기록을 수없이 열람한 20세기의 대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 귀를 기울여 봄직하다.
초기기독교의 광신주의는 기독교 이전의 이교도문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었다. 기독교 순교자들의 재판에 관한 로마의 의사록은 아주 정확한 역사적 문헌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로마의 재판관들은 별 이유없이 사형을 언도하는 것을 매우 끔찍하게 꺼려했다. 그러나 기독교 순교자들은 사형언도를 내릴 수밖에 없도록 고의적으로 재판관을 휘몰아갔다. 요즈음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정직한 재판기록을 우리가 열람할 수 있다고 한다면, 로마시대의 인도주의적 정신에 지배되고 있는 그러한 재판관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요즈음의 재판이 훨씬 더 광적이라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Arnold Toynbee, Christianity Among the Religions of the World 18).
이러한 분위기는 당대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1~180 재위)의 『명상록』에도 잘 그려지고 있다.
육신으로부터 당장이라도 풀려나 소멸될 수 있는 해탈의 각오가 되어있는 영혼은 얼마나 칭송할 만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각오는 반드시 자신의 구체적 삶의 순간의 결단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지, 그리스도교도들처럼 법관의 명령도 무시하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오는 것이면 안 된다. 심사숙고해야 하며, 품위가 있어야 하며, 타인에게 신념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도들처럼 영웅적ㆍ극적 제스처를 써서는 아니 된다. (Meditations 11.3.)
아우렐리우스의 이러한 통찰을 황제의 안락하고 나른한 푸념이라고 빈정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토인비가 지적하고 있는 사실(史實)에 관한 한 시대적 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공인 이전에 박해받은 것보다는 공인 이후에 이교도와 이단과 신비주의자를 박해한 역사가 몇천 배 몇만 배 잔혹하다는 매우 정직한 사실을 인정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초기 기독교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황제교화된 기독교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고, 순교자를 믿는 것이 아니고, 교회사를 믿는 것이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역사는 성서주의의 본연으로부터 너무 이탈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아니라 황제교화(皇帝敎化)된 다른 차원의 기독교의 발자취라 해야 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공인을 3세기에 걸친 박해와 순교와 이방 선교의 찬란한 극적 승리로서 간주하는 것은 역사적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는 이미 알렉산드리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카르타고, 리옹 등지에 막강한 교구제와 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장로·집사 등 성직자 하이어라키(Hierachy, 계층)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로마제국 전체 내에 5% 이상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5%라는 숫자가 매우 소수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이 소수는 강력하게 조직화된 소수며, 고도의 이론과 신앙으로 무장된 소수며, 로마의 정통적 다신론 신앙이나 다양한 이교도 컬트의 느슨하고 해이되어가는 쇠잔(衰殘)세력과는 대조되는 치밀고 올라오는 흥성(興盛) 세력이다.
로마 최선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며, 로마 최악의 황제라고 평가되는 콤모두스(Commodus, 177~192 재위), 얼마 전 『글라디에이터』라는 영화의 한 주인공으로 나왔던 치졸한 인품의 그가 그의 레슬링코치에게 목졸려 죽음을 당한 이후 이미 로마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제국의 방위를 떠맡고 있었던 군인들의 제위쟁탈전이 시작되면서 국가의 기강은 무너졌고, 1세기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내란의 와중에서 병영황제시대(兵營皇帝時代, 235~284)가 계속되었다. 강력하고 유능한 행정가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6)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3세기의 무정부상태는 막을 내렸지만, 그동안의 제위계승의 부작용을 고려하여 그는 동방과 서방의 로마에 각각 정·부의 황제를 두었다. 이로써 황제가 4명이 있는 사두정치(四頭政治, tetrarchy)가 개시되었던 것이다.
밀라노 칙령
사두정치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부제(副帝)에 취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제(正帝)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 4명의 황제들은 인척관계로 얽히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부제(副帝)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Constantinus I Chlorus, ?~306)의 아들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6)로부터 시작된 사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이후로는 그의 자리를 메꿀 인물이 없었다. 따라서 사두정치는 마구 엉켜들어갔고 306년에는 자그마치 6명의 황제들이 난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중의 한명이었다【312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 이르는 자세한 상황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제13권 165~218을 참고】. 이 콘스탄티누스가 모든 황제들을 쳐부수고 오직 하나인 대제로 세력을 공고히 해가는 과정에서 밀라노칙령(the Edict of Milan)이 발표된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정치적 타협이었고 술수였고 전술이었고 탁월한 비젼이었다. 밀라노칙령이 반포된 것은 313년이었고, 그가 독존의 대제가 된 것은 324년이었고, 니케아 종교회의(the Council of Nicaea)가 열린 것은 다음해 325년이었다.
교회사에서는 밀라노칙령을 기독교의 온 교회가 핍박 없는 평화세계를 만난 역전의 대사건으로 기록하지만, 그것은 기독교만의 공인은 아니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 기독교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똑같이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그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1세기 헌법의 한 단락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감동적 내용이지만, 오히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다는 것이 당대 로마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과제였느냐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기독교를 공인하기 위해서는, 바로 전제(前帝)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열렬히 탄압했던 기독교를 갑자기 공인된 대낮의 떳떳한 종교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에게 똑같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하는 위장전술을 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내전에 참여하고 있는 그의 군단장병들은 미트라스숭배(Mithraism)에 젖어있었고, 로마 전통의 잡다한 수호신들은 로마인들의 모든 생활습속 구석구석에 스며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표면상의 신앙자유선언과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기독교의 위상을 높이고 기독교의 신도수를 소수에서 다수로 전환시키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우선 몰수된 교회재산들을 국가가 보상하여 교회에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황제의 사유재산을 기독교회에 기증하였다. 성직자(clerus)라는 종교전문직을 인정하고 그들의 공무를 면제해주었다. 병역이나 세금이 모두 면제된 것이다.
황제교와 유일신교
6명의 황제가 1명의 황제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타협이 이루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현명한 술책이었다. 6명의 황제란 ‘다신교’ 를 의미한다. 1명의 황제란 ‘일신교’를 의미한다. 로마의 황제는 옥타비아누스 이래로 신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3세기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방불케하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황제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설사 콘스탄티누스가 무력으로 내란을 제압하고 독존의 1인 황제가 된다 해도 그 권위가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로마는 어디까지나 공화제를 거친 시민사회였기때문에 황제등극의 권위준거가 로마시민과 로마원로원에 있었다. 황제 스스로 자기에게 권위를 부여할 수 없었다. 공화정시대에는 최고의 권력자인 집정관을 시민집회에서 선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로마를 건설해보려는 야심 찬 콘스탄티누스가 자기의 불가침의 신성한 1인 절대권력을 새롭게 보장하기 위해서 그러한 자기 정치권력구조와 유사한 이론적 구조를 가지는 종교의 백업이 필요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모든 이방의 종교들을 검토해 보아도 기독교 만한 후보가 없었다. 기독교의 신은 유일하고,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하며, 독재적이고, 일방적이고, 구속사적이다. 로마의 신들은 많고, 친근하며, 인간적이며, 삶에 즐거움을 주며, 쌍방적이고, 민주적이고, 동반적이다. 희랍-로마의 신들은 ‘인간의 구원’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지 않는다. 구원은 인간이 이성의 외침에 따라 스스로 행하는 것이며, 신들은 그 과정을 돕는 친구들일 뿐이다. 로마의 신탁은 절대적인 명령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선남선녀들이 동네 어귀 서낭당에서 비는 지역신들의 흠향에 대한 반응일 뿐이었다. 인문주의가 만개한 자신있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전성시기에는 여유로운 로마인들은 유대이즘전통의 유일신사상은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억지춘향의 미신이라고 간주했다. 배타적인 그들의 독선이 매우 촌스럽고 유치하게 보였다. 그러나 쇠잔기에 들어선 허약한 로마인들에게 강력하고도 배타적인 유일신사상은 희망이고 위안이고 방황할 필요없는 절대적 삶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허약해진 사람들에게는 초기기독교가 제공하는 공동체적 소속감은 위대한 위로였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간파하고 크리스챤조직을 자기의 절대권력의 기반으로 교묘하게 활용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로마제국에 산재한 기독교교구 주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능한 모든 재정적 특권을 주었다. 최초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를 쓴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4세기 콘스탄티누스와 동시대 활약)는 콘스탄티누스의 칙령 이후 기독교에 개종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앙보다는 이권 때문’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통치야말로 신의 섭리의 실현이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야말로 주님의 제13 사도라고 극구의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콘스탄티누스의 교활한 삶
콘스탄티누스는 310년 자기 아내의 아버지였던 선제(先帝)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를 죽였다. 2년 뒤인 312년에는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밀비우스 다리에서 무찔러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다리밑 테베레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 시체를 다시 참수하여 그 대가리를 창끝에 꽂고 로마에 입성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결정적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현몽하여 승리와 그 모든 것을 예시하였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325년에는 자기 이복누이의 남편인 정제(正帝) 리키니우스(Licinius)를 전투에서 무찔렀다. 리키니우스는 제위의 상징인 보라색 망토를 벗고 콘스탄티누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일개 야인으로 은퇴하여 누이동생과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는 선심 쓰는 척 처음에는 리키니우스에게 데살로니카에서 은퇴생활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1년도 못 되어 반란음모를 구실삼아 그를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시켜버렸다.
뿐만 아니다. 기독교를 공인하고 예수의 복음을 온 천하에 선포한 그가, 자기를 황제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탁월한 장수였던 친아들, 부제(副帝) 크리스푸스(Crispus)를 어느날 갑자기 체포하여 이스트라반도 끝에 있는 풀라의 감옥으로 극비리에 호송해버렸다. 그리고 가혹하기 그지없는 고문과 심문을 되풀이했다. 그는 로마제국의 제2인자인 황제였다. 로마에서는 노예가 아니면 자백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시민을 고문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크리스푸스는 믿고 따르고 충성을 다 바쳤던 아버지에게 무죄를 주장했지만 가혹한 고문으로 처참하게 죽어갔다. 29세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뒤주간에 갇힌 사도세자보다도 더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다. 어차피 피장파장이겠지만 영조는 그래도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모궁(景慕宮)을 지어주었다. 노론 소론 싸움의 제물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들을 악랄하게 죽였고 입다시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무엇을 자백받으려 했을까?
바로 자기 둘째 부인 파우스타(Fausta)와의 불륜이었다. 크리스푸스는 첫째 부인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크리스푸스에게는 파우스타는 계모였다. 파우스타는 선제 막시미아누스의 딸이며, 남편이 자기 아버지와 오빠를 죽이는 권력투쟁의 가슴아픈 세월을 20년이나 견디며 아들을 셋이나 낳아주었다. 현숙한 여인이었다. 열 살 정도 아래의 전처 소생, 크리스푸스와 정말 정을 통했을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가슴을 조이며 권력의 뒤안길에서 현숙하게 살아가는 중년부인 계모에 대한 애처로운 가슴은 크리스푸스에게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죄를 절규하는 크리스푸스의 마지막 항변이 어두운 감옥의 돌벽에 메아리쳤을 때 황후 파우스타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파우스타가 무심코 황궁 안의 가족전용의 김이 자욱한 욕실에 들어갔을 때 문이 철커덩 닫혔다. 그리고 끓는 물은 계속 퍼부어졌다. 황후 파우스타는 목욕하다가 사망했다고 공표되었다. 이 악랄한 살인의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친아들이지만 스물두 살밖에 차이지지 않는 크리스푸스는 황위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우스타가 낳은 세 아들이 이미 유아기를 지나 황통의 확고한 계승자로서 엄존했기 때문에 두 사람을 싹 쓸어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것이 제13 사도, 교회사에서 최고의 성자로 추앙받는 콘스탄티누스의 교활한 삶이다.
천국을 도둑질하고 죽은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 그는 골(Gaul)족과의 전쟁(316~22)에서도 승리한 후, 북방 바바리안들의 왕들과 수천 명의 부하들을 함께 야수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이러한 끔찍한 사건은 이교도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모두 기독교공인 이후의 행적들이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세례받기를 거부했다. 그는 요단강에 가서 직접 세례를 받겠다고 하면서 미루기만 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죄가 사함을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삶의 최후의 순간까지 그가 저질러야 할 너무도 많은 죄악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례의 순간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337년 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소아시아로 갔다. 페르시아 왕국이 40년만에 로마를 상대로 다시 군사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이었다. 노구(老軀)의 콘스탄티누스는 지쳐 있었다. 소아시아반도의 서북단 니케아 근처의 니코메디아(Nicomedia)에 왔을 때 그만 그는 병석에 누웠다. 그곳은 그가 18세부터 30세까지 아버지를 떠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6) 황제 밑에서 그의 청춘을 보냈던 곳이다. 죽기 직전, 그는 황제의 보라색 망토를 벗고 초심자가 입는 흰 까운을 입고 세례를 받았다. 집전자는 아리우스파였던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였다. 그리고 죽었다. 향년 62세. 337년 5월 22일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유머에 찬 표현대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천국을 도둑질하고’ 죽었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은 절대왕정이 화려하게 꽃핀 17세기에 영국의 제임스 1세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주장한 설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것을 ‘현세에 대한 지배권의 신수설’로 바꿔 말하면, 17세기보다 1300년 전에 이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씨를 뿌린 ‘사상’이었다. 지배권의 신수설이라는 ‘사상’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장수를 누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프랑스혁명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통치자를 결정한다는 이 ‘사상’이 지배자에게는 정말로 편리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3-350).
이것은 로마 역사에 관해서 서방의 고전학자들에게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통찰력 있는 언급이다.
예수는 음모와 권세 속에 있지 않다
과연 로마는 콘스탄티누스의 계획대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활력소로 인하여 되살아났는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로마의 멸망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기독교라는 요소가 결코 쇠망의 길로 접어든 로마를 흥성의 길로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로마의 문제는 이미 창조성을 결여한 시민사회의 도덕적 해이(moral laxity)였다. 로마와 접합된 기독교는 이미 권위화된 기독교였으며, 그 유일성과 배타성과 절대성은 로마사회를 더욱 경직시켰으며, 멸망을 재촉시켰다. 결국 기독교는 로마의 멸망을 한 1세기 더 연장시켜 준 셈이지만, 너무도 중요한 사실은 그 멸망연장기간을 통하여 너무도 심각하게 향후 모든 유럽역사의 발전을 기독교 일색(一色)으로 염색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오늘의 이스탄불에 이슬람의 회칠로 덮여있는 소피아성당(Hagia Sophia), 그리고 베드로의 무덤 반석 위에 섰다고 하는 로마의 베드로성당(Saint Peter's Basilica)의 위용에 우리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모종의 기운을 느끼지만 그 원래의 구전(舊殿)은 모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320년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은 그러한 위압적인 거석(巨石) 안에는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소피아성당과 베드로성당, 이 동·서 로마의 양대 심볼 속에서 우리는 콘스탄티누스가 씨뿌려놓은 기독교 문명의 천여 년 성상의 성쇠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식물들이다. 그것은 구운몽(九雲夢)의 덧없는 한 장면일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인들이 성지순례를 하기 어려웠던 시절, 이미 약관의 나이에 몸소 이 성지의 유적들을 다 돌아보면서 그렇게 절감했다. 내가 발견한 예수는 웅장한 베드로성당의 돔 안에도, 미켈란젤로의 섬세하고도 가냘픈 피에타(Pieta) 조각 속에도, 하기아 소피아의 정교한 모자이크 속에도 있지 않았다.
갈릴리 바다의 북단 가버나움(Capernaum, Kapharnaoum)의 호수가에 찰랑거리는 물결, 살랑거리는 산들바람, 그리고 산상수훈이 설파되었다는 작은 동산, 그것은 우리나라 강원도 옛 감자바위 동네의 소박한 모습이나 이효석이 읊어댄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 들녘이나 꽃 덮인 샛길, 장터, 이런 것들이 연상되는 그러한 곳에 예수는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음모와 권세와 부귀와 영화의 찬란한 금빛 장식 속에 있지 않았다. 우리가 시골장터에서 만나볼 수 있는 그러한 갈릴리의 군중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정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불쌍히 여길 줄 알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러한 이름 모를 뭇 군중 속에 있었다. 나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보고 난 후 이스라엘 가버나움의 호수가에 하염없이 앉아서, 이런 생각을 눈물겹도록 하고 또 해보았다(1978년 7월 22일 토요일, 나의 생애에서 기억할 만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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