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벹의 비극
나는 평생을, 중국문명의 전도사라고 한다면 정말 자격있는 전도사로서 살아왔다. 나는 중국문명이 자체로 함장(함장)하고 있는 문화적 가치의 보편성, 그리고 그 위대함에 대하여 항상 경외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중국문명의 정신적 가치는 참으로 인류에게 고귀한 삶의 지혜를 끊임없이 던져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이상의 발현은 국가주의를 초월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논어』를, 『노자』를, 그리고 수없는 중국의 고전을 오늘 우리 삶의 가치로서 해석하고 발양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적 가치의 진실된 모습과는 상반되게, 중국문명이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물론 명료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지성인들의 광정(匡正)의 요구는 반드시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세계 지성인들은 우리 한국정부의 정치 행태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로써 그 도덕성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보편적 윤리를 공감하는 중국 지성인들의 양심에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은 서구열강과 야마토의 제국주의의 마수에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중국이 팔로군의 장정을 거쳐 마오라는 위대한 지도자(the Great Helmsman)의 영도하에 주권을 회복했다는 세계사적 전환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중국은 그러한 주체적 출발과 동시에 자기자신의 새로운 제국주의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근대적 국가의 기본요건인 제(祭)ㆍ정(政)의 정확한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원의 정적 속에서 국제적 정세변화와 무관하게 살고 있었던 6백만의 티벹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다. 1951년 5월 23일 자주적 외교권과 군사권을 박탈하고 단지 종교적 자유, 달라이라마의 지위, 기존의 형식적 정치기구만 존속시키겠다는 터무니없는 17개 조항의 협정(the Seventeen-Point Agreement)이 강제로 조인되었고, 1951년 10월 26일에는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라사(Lhasa)에 진주하였다. 1959년 3월 31일, 티벹 조국의 땅을 떠나 망명지 인도의 땅을 밟기까지 10년에 걸쳐 나이 어린 소년군주 달라이라마가 겪었던 고초는, 병자수호조약, 갑오경장, 동학전쟁,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에 이르는 풍전등화 같은 불안의 세월 속을 헤매어야 했던 고종황제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고종은 합방의 비운 속에 묻혀 버렸고 드디어 일인 손에 독살되고 말았지만, 달라이라마는 인민 해방군의 강점의 포화 속을 탈출하여 인류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서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1949년 이래 약 50여년간 티벹인민들은 줄기찬 항쟁을 계속해왔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무자비한 탄압을 계속해왔다. 승려의 두 눈을 후벼 성벽에서 던져버리고, 거룩한 사원ㆍ성지들을 인간의 도륙장으로 만들고, 개미도 살생해본 적이 없는 승려들에게 도끼를 쥐게 하여 동포의 목을 자르게 하고, 마차에 사람을 묶어 사지를 찢어 죽이고, 말꽁무니에 사람을 매달아 죽을 때까지 달리게 하고, 로프에 매달은 사람들 눈에 고추가루를 퍼붓고, 비구니의 항문과 질 속에 전기봉을 넣어 고문하고, 양심 구속수들이 간수들의 무술연습상대가 되어 죽어가는가 하면……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는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이 예사스럽게 자행되어 온 것이다. 비무장의 시위군중들에 무차별 기관총난사, 연행, 구타, 고문, 재판없는 처형, 투옥, 자살로 목숨을 잃은 티벹인민의 숫자는 무려 130만 명을 넘는다【이상의 참상에 관한 기록은 나의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정확한 증언에 의한 것이며, 대부분 달라이라마의 자서전, 『유배된 자유』에 의거한 것이다. Freedom in Exile, p.249.】.
인천과 같은 도시의 전체 인구가 모조리 학살된 것이다. 항우(項羽)는 투항한 진나라의 병사 20만 명을 신안(新安)에 생매장시켰다. 지혜로운 장수 범증(范增)은 항우의 미래는 이러한 만행으로 이미 결판났다고 통곡했다. 지금 남경(南京)에 가보면, 남경대도살기념관(南京大屠殺記念館)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면서 중국인민 30만 명을 학살한 그 참담한 흔적과 유해가 잘 보존되어 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38년 1월에 이르기까지, 13군데에서 하루에 1만 명씩 모두 30만 명을 도륙한 것이다. 이 비극적 장면들은 우 쯔니우(吳子牛)의 영화 『남경』(南京)에도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가공스러운 만행에 지금도 중국인들은 몸서리를 친다. 창살(槍殺), 활매(活埋), 감살(砍殺), 자살(刺殺), 분소(焚燒), 수익(水溺)! 그런데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명상 속에 잠들고 있던 나라 티벹의 인민을 그보다 더 잔악하게 130만 명이나 도륙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인류역사의 도덕성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 것인가?
▲ 길거리에서 땅콩을 팔고 있는 인도인, 인도의 음식은 화학조미료가 가미되어 있질 않아서 좋았다. 조미료를 안 넣으려는 의식이 있다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돈이 드는 그런 짓을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뻔데기 장수들의 봉투와도 같은 것이 꽂혀있는 모습이 정겨웁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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