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과학이다
달라이라마는 내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그리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서양인들에게 불교가 아필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사실 달라이라마가 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도 몸소 그런 방면에 있어서 체험적인 정보를 충분히 습득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서구인의 정신적 위기, 물질적 풍요 속에 정신적 빈곤 등등의 클리쉐(cliché)를 되씹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우선 제가 충분한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저는 사실 서양인들에게 불교가 아필된다, 이런 말을 근본적으로 하기가 싫습니다. 지금 동양과 서양, 이런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 일어난 불교가 서양에 전파된다, 이런 말도 매우 진부한 말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동ㆍ서양의 구분근거가 무색할 정도로 정보가 교류되고 공간의 국소적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앞서 말씀드린 불교의 세계사의 주류문명에로의 접목이라는 사건은 공간적인 이동이라기 보다는 인류사 전체의 시각적 이동을 두고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동에서 서로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2천여 년의 인류사의 주축이 21세기를 접어들면서 새로운 주축을 찾아 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류사는 여러 문명의 흥기와 소멸에 의하여 이어져 내려왔지만 뭐니뭐니 해도 인류사의 주축문명의 흐름을 장악한 것은 그레코-로망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그레코 로망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Enlightenment) 전통이외로도, 가치있고 또 화려한 많은 고문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독 그레코로망-르네쌍스-계몽주의의 전통을 인류사의 주축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과학’이라고 하는 인류의 물질환경을 지배하는 강력한 연역적 사고(deductive thinking)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과학 전통을 선취한 문명은 모두 20세기 제국주의의 선두에 섰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과학이라는 놈은 기독교 전통의 유일신관을 전제로 해서 태어난 변종이라는 것이죠. 기독교는 이 우주에 대하여 초월적 창조주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실제적 의미는 이 세계의 입법자로서 역할을 했다는 뜻과 상통합니다. 즉 신은 이 우주의 운행의 법칙체계를 입법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르네쌍스의 과학자들은 이 우주에 대한 신의 입법체계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즉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려는 과학의 노력은 애초에는 유신론적 입법체계와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이러한 방면의 매우 포괄적이고 계발적인 논의는 죠세프 니이담의 다음 글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Joseph Needham, ‘Human Law and the Laws of Nature in China and the West,’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pp.518~583.】. 그것이 르네쌍스의 과학이라고 하는 위대한 근대문명의 단초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다르마(Dhama)는 기독교적 신의 법칙체계(divine legislature)보다 훨씬 더 내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지나치게 윤리적 목적의 지배를 받았고, 또 결정적인 것은 희랍인들의 수학과도 같은 정교한 토톨로지의 연역적 언어를 그 바탕으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의 운명은 점점 유신론적 체계로부터 독립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의 법칙의 발견은 최초의 작동자로서의 신이나 입법자로서의 신의 전제가 없이 우주 자체의 인과법칙에 따라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과학은 근원적으로 신의 존재를 요구하지 않는 합리성의 체계로서 자기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근세과학은 인류에게 무신론과 상식에 대한 무한한 신념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근대인(Moderm Man)의 이성(Reason)은 초월적인 창조주에로의 복속을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즉 과학이라는 기독교의 사생아는 더 이상 기독교라는 아버지와의 핏줄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자신이 독자적인 삶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제가 말씀드리는 인류정신사의 패러다임 쉬프트는 이 과학의 자기이해의 패러다임 쉬프트와 보조를 맞추는 사건이라는 것이며, 기독교로부터 불교에로의 세계사적 전환은 바로 이러한 과학의 보편화가 인류에게 공헌해온 정신적 토양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싯달타의 정신혁명은 2500년 후에나 세계 기독교가 성취해놓은 과학문명의 새로운 정신적 토대를 계기로 겨우 드러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기의 성격을 우리 동양사람들보다는 서양사람들이 보다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다고 하는 현상이, 곧 요즈음 미국이나 유럽에서 식자들에게 불교가 아필되고 있는 현상의 진면목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도올선생님의 통찰은 정말 제가 가슴으로 하고 싶었던 얘기입니다. 정말 탁월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정말 어린애처럼 나의 말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에게 강력한 정신적 유대감을 표시해주었다.
▲ 생전에 달라이라마님과 눈 한번 스치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두손 모아 기다리는 티벹의 군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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