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지식
달라이라마의 논리는 매우 명료했다. 나는 이어 인간의 지식에 관한 또 하나의 주제를 끄집어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불교가 과학적 세계관이나 과학적 가치와 접목됨으로써 앞으로 닥쳐올 인류의 미래를 리드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불교는 과학에 대해서 보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과학적 사유의 본령 속으로 깊게 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종교적 지도자들이 너무 무식합니다. 원래 과학이라는 말은 스키엔티아(scientia)라는 라틴어에서 온 표현인데, 그것은 지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의 원래적 의미는 앞서 말씀드린 그노시스(Gnosis), 즉 영지(靈知)였습니다. 이 그노시스의 개발이라는 목표 아래서 알케미(alchemy)라는 연금술이 나오고, 르네쌍스과학의 중세적 기초가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승려들이 너무 지식과 지혜에 대한 이분법적 사유에 매달려 있으며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무시하려는 고압적 자세로 과학적 대중을 지도하려는 착각증세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티벹의 승려들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만, 대부분의 승려들에게서 받는 우리의 인상은 그들의 지식에 대한 천시가 자신의 무지를 정당화시키는 어리석은 업을 지을 뿐 아니라, 과학적 세기를 리드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는 감정과 본능에 치우친 신앙심과 자비심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역설해왔습니다. 궁극적으로 감정과 이성은 인간에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의식체계의 소산이며, 영적 수행에 지성의 역할은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지혜와 지식도 이분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이성은, 지혜나 감성을 위하여 무한히 허용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지요! 왜냐하면 지혜를 증가시키지 않는 지식은 결코 지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때 정말 달라이라마님께 엎드려 절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솟구쳤다. 진(眞)ㆍ속(俗)의 이분을 거부하고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외치는 고승이라는 자들이 대중 앞에서 벌이는 많은 추태를 경험해온 나로서는 달라이라마의 이러한 진솔한 태도는 너무도 존경스러운 것이었다. 지식인들이 지식을 통하여 달성하는 경이로운 지혜의 경지, 그것이 단지 지식을 위한 지식의 축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삶의 기쁨을 끊임없이 개척하고 또 그러한 지식의 축적이 가져오는 존재의 건강이 고승의 어떠한 경지보다도 더 광막한 지혜의 바다를 헤쳐나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한국의 선승들은 헤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은 것이다. 나가르쥬나도 아띠샤도 쫑카파도 원효도 지눌도 당대의 최고의 과학인이요 지식인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때로 스님에게서 보다 첨단과학자들에게서 더 많은 깨달음과 불법을 얻고 있는 것이다.
▲ 아우랑제브(Aurangzeb)는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과 뭄따즈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삶은 무굴 최고의 영화와 몰락을 동시에 구현했다. 데칸 아우랑가바드에 자기 부인의 화려한 묘를 지었다. 내 눈에는 이 비비까(Bibi-ka-Maqbara)가 따즈 마할보다 더 아름다웠고 완성도가 높았다. 그러나 자신의 묘는 관 하나 이외에 일체의 뚜껑을 가리지 않게 했다. 그는 1707년 2월 20일 아침기도를 올린 후 『꾸란』을 암송하며 죽어갔다. 그리고 그가 손수 지은 모자를 판돈 4.5루삐만을 장례비용으로 쓰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베껴 만든 『꾸란』을 판돈, 305루삐를 당대의 무슬림 성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그것이 그가 소유한 전부였다. 그는 무자비한 제국주의자였으며 극단적 수니파 금욕주의자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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