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야말로 세계의 중심
달라이라마는 하나의 군주로서 볼 때에도 정말 개명한 군주였다. 마음이 열려있고 부패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전 속에도 명랑한 자신감을 잃지 않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는 듯 엉뚱한 질문을 했다.
“도올선생은 인도에 처음 오신 겁니까?”
“네, 처음입니다. 성하 덕분에 꿈에만 그리던 환상의 인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 참 많은 것을 느끼셨겠군요. 우리 티벹인들은 인도를 아랴부미(Aryabhumi)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땅(the Land of the Holy)이라는 뜻이지요. 나 역시 인도에 한번 스쳐 오는 것을 등에 그쳤습니다. 제가 인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56년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그때의 감회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라즈가트(Rajghat. 간디의 화장터)에서 느겼던 아힘사(Ahimsa, 불살생ㆍ비폭력 저항은 등 의 전을은 제 인생을 더받치는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도올선생께서는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저는 동경에 유학하고 있을 때 미국을 여행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레이하운드 뻐스에 몸을 싣고 필라델피아를 떠났는데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어둠이 깊게 깔린 맨하탄 한복판으로 뻐스가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눈을 뜨게 되었는데 제 눈에 비친 맨하탄의 야경은 정말 제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경외감이었습니다.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위압적인 마천루들의 음영은 정말 거대한 레바이아탄(leviathan)들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노자의 말을 빌어 인간의 유위(有爲)의 장난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다니! 라는 감회를 발하는 한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 저는 유위를 싫어하는 자연주의자였지만, 맨하탄이라는 유위의 극치를 매우 심미적으로 경탄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받은 가장 경이로운 느낌은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공존이 주는 격렬한 콘트라스트였습니다. 인도처럼 태고의 무위와 최첨단의 유위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키 어려운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인도문명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의 극한태를 다 공유하고 용해하는 희한한 힘을 가진 문명인 것 같습니다.”
“참 재미난 표현이군요.”
“저는 아시아대륙의 극동변방의 조그만 반도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암암리 자기가 태어난 문명이 세계문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살게 됩니다. 저도 그러했습니다. 한국에서 어려서부터 본 세계지도는 태평양이 가운데 놓여있고 한국이 그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제가 생각한 세계는, 한국이 직접적으로 속한 중국황하문명과 이 문명에 가장 큰 도전을 던진 그레코-로망 중심의 서구문명, 이 두 문명권을 동양과 서양이라는 개념으로 묶어 인류사 전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러한 세계였습니다. 이러한 동ㆍ서양이라는 좁은 개념의 세계인식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요번 저의 인도여행은 너무도 다른 세계인식의 가능성을 저에게 피부로 와닿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인도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최소한 그러한 시각에서 이 세계를 바라볼 때 훨씬 더 유용하고 다양한 세계인식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죠. 고생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코끼리가 인도대륙에 있는 것을 예로 들어, 아주 옛날에는 인도대륙과 아프리카대륙이 하나로 붙어있었다가 점점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종적으로도 코카소이드(Caucasoid), 몽골로이드(Mongoloid), 오스트랄로이드(Australoid), 니그로이드(Negroid)의 4대 인종이 다양하게 섞여 인종박물관과 같은 느낌을 주고, 언어도 기어슨경(Sir George Gierson, 1851~1941)의 써베이에 의하면 723개의 언어가 있다고 하는데 크게 나누면, 드라비다어족(Dravidia), 인도-이라니안어족(Indo-Iranian), 남아어족(Austro-Asiatic), 한장어족(Sino-Tibetan)으로 대별됩니다. 인도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언어만 해도 15개가 됩니다【남방의 5대 언어문화권: 1) Tamil 2) Kannada 3) Malayālam 4) Telugu 5) Orivā 그리고 북방의 10대 언어문화권: 1) Assamese 2) Bengali 3) Gujarātī 4) Hindī 5) Kashmīrī 6) Marāțhī 7) Punjābī 8) Sanskrit 9) Sindhī 10) Urdū.】. 종교도 힌두교, 쟈이나교, 불교, 시크교,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배화교) 등이 그 뿌리로부터 이 토양에서 성장해왔습니다. 기독교만 해도 예수의 사도인 도마가 AD 52년에 이곳에 와서 교회를 세운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까요. 하여튼 저는 요번 여행을 통해 인도문명을 새롭게 탐구하게 되었고, 새로운 세계사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정말 크나큰 소득입니다. 누에가 고치를 벗어버리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듯한 해방감을 인도에서 느꼈습니다.”
“도올선생님같이 다양한 문명과 언어의 체험을 가지신 분이시니까 아마도 그러한 느낌은 매우 리얼하고 또 타인보다 훨씬 더 증폭되어 나타났을 것입니다. 불교유적을 보시면서는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궁금하군요.”
달라이라마는 정말 무한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남의 말을 참으로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테레비 강연 속에서 우리말의 성인(聖人)이라는 표현에 귀 이(耳)변이 있는 것을 들어, 성인이란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달라이라마는 정말 귀가 열린 성인이었다. 불교유적에 관한 나의 소감이 뭐 그리 들을 만한 게 있을까보냐마는 그는 내가 말을 야물야물 재미있게 잘 해서 그런지 계속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델리 라즈가트에 참배하고 있는 필자,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비폭력주의에 대한 간디의 헌신이야말로 정치적 해결의 유일한 길을 예시했다고 확신했다.” 『유배된 자유』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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