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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0장 - 빛의 증표는 동과 정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0장 - 빛의 증표는 동과 정

건방진방랑자 2023. 3. 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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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증표는 동()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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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너희는 어디서 왔느뇨?’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빛에서 왔노라. 빛이 스스로 생겨나는 곳에서 왔노라. 빛은 스스로 존재하며, 자립하며, 그들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도다.’ 2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그 빛이 너희뇨?’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이다.’ 3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속에 계시다는 증표가 무엇이뇨?’라고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그것은 운동이요, 안식이로다.’”

1Jesus said, “If they say to you, ‘Where have you come from?’ say to them, ‘We have come from the light, from the place where the light came into being by itself, established [itself], and appeared in their image.’ 2If they say to you, ‘Is it you?’ say, ‘We are its children, and we are the chosen of the living father.’ 3If they ask you, ‘What is the evidence of your father in you?’ say to them, ‘It is motion and rest.’”

 

 

이 장의 내용을 마치 영지주의 신화구조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간주하는 주석은 근본적으로 내면에 흐르는 상식적 의미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주석이다. 불트만요한복음강해에서 말하는 바 빛의 파편이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구중천(九重天)의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제시해야 하는 암호, 즉 그노시스의 열쇠를 확인하는 문답처럼 해석하는 것이다(메이어). 그러나 전혀 그런 신화구조를 전제로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구중천 관문의 파수꾼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세속적 인간들이다. ‘그들은 추구하는 도반들과 대비되는 세속의 인간들일 뿐이다.

 

본 장의 49나라를 달리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인간이 본시 나라에서 왔고, 다시 나라로 돌아가리라 했으니, 인간은 빛에서 왔고 빛으로 돌아간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빛을 예수에게만 허용하였고, 어두운 세상의 감옥에 갇힌 인간은 오직 그 일부 소량의 파편만을 간직한 것으로 묘사하였지만, 여기 도마는 인간에게 예수와 동일한 빛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빛은 스스로 생겨난다.’ 그것은 자생하는 것이며 타생적 존재가 아니다. 즉 타자에 의하여 피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헬레니즘세계에 있어서의 희랍적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불피동의 사동자(the Unmoved Mover)’와도 같은, 존재의 하이어라키의 근원을 지시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며, 자립한다는 표현도 16홀로 선다는 표현과 상통한다. 그리고 그들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도 이미 28에서 나왔던 표현이다. 83도 같이 참조하라.

 

빛의 자녀들이라는 표현도, 빛의 파편만을 포함한 미미한 존재, 그래서 전적인 빛인 예수, 그 로고스의 구원의 역사를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야말로 전적으로 빛이며, ‘살아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the chosen of the living father)’라는 것을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는 예수와 동급이다.

 

전 대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구문은 마지막 대답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서양의 주석가들은 대체적으로 이 구문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 속에 계신 아버지의 증표’(직역, 본문은 약간 의역되어 있다)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참으로 명언이다: “()과 정().”

 

너희 속에 계신 아버지는 결국 이다. 그것은 나라이며, 생명의 질서이다. 여기 우리는 창세기 11부터 24에 걸치는 내러티브를 연상할 필요가 있다. ‘운동(motion)[Meyer], (movement)[Lambdin]’이란 우주의 창조이며 생명의 창조이다. 요한비서 제2(the Secret Book of John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담이 흙으로 주물러져 만들어졌을 때, 그것은 움직임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없는 무기물 덩어리였다는 뜻이다. 데미우르고스인 얄다바오쓰(the demiurge Yaldabaoth)가 그 얼굴에 입김으로 영을 불어넣자 아담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게 되면 반드시 쉼(안식)을 필요로 하게 된다. 창세기에도 엿새 동안의 창조행위() 끝에 이렛날에는 안식한 것은 이러한 생명의 리듬을 말한 것이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이성의 반대는 피로이다(Fatigue is the antithesis of Reason)”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만, ‘피로는 필연적으로 쉼(Rest)을 유발시킨다. 잠이라는 것도 신경이나 고차원의 의식이 없는 생명체에서는 두드러지는 현상이 아니다. 신경활동이 있는 동물은 반드시 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란 엔트로피의 감소를 위한 생명의 요청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대유 왕선산(王船山, 1619~1692)()이란 동()의 정()일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은 동이 부정되는 사태가 아니라 동의 다른 양태일 뿐이다. 따라서 생명의 특질은 어디까지나 동()이다. 노자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항상 돌아가는 것이 도의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도덕경40이라는 것도 여기서 말하는 “It is motion and rest,”라는 표현과 대차가 없다.

 

우리는 본 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끄집어낼 수 있다. ‘()은 동()이다.’ 빛은 움직임을 창조한다. 그런데 그 창조는 생명의 창조이기 때문에 반드시 을 요청하는 것이다. 27안식일을 안식일으로서 지킨다라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료해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의 가장 구극적인 아이덴티티는 빛이며, 그 빛은 예수이며 아버지이며 생명이며 동과 정인 것이다. 여기 본 장을 유치한 영지주의 신화구조 속에서 해석할 여지는 전무한 것이다. (), 즉 안식(安息)은 동()을 포섭하는 것이며 동의 목표이기도 한 해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을 동의 텔로스(telos)로서 파악할 필요는 없다. 정과 동의 이분법적 사고를 근원적으로 융합시키는 데서 우리는 빛의 리얼리티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가리트의 지하무덤은 주거지와 혼재해 있다. 그러니까 네크로폴리스가 삶의 공간 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지하계단 입구가 반드시 있다. 그 석축의 정교함은 고문명의 수준을 말해준다. 왼쪽 사진은 왕궁에서 발견된 왕자의 상아 조각상이다. 두께 10cm, 높이 15cm, 우가리트사람의 현실적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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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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