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서귀 이기발의 의리 정신과 「양사룡전」의 입전 의식
의리 정신의 표출양상
서귀 이기발은 서두에 잠깐 언급하였듯, 철저한 대명의리론자였다. 이기 발이 의리를 앞세워 평생 동안 고집스러울 만큼 출사를 거부한 것은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를 청나라가 멸망시켰는데 원수에게 복수는 못할망정 청 나라의 배신(陪臣) 노릇은 절대 할 수 없다는 의식 때문이었다【그러나 명이라는 대상은 이기발의 의리 정신에 있어 우연적 대상에 불과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이 의리요, 보은은 못할망정 배신을 한다는 것은 지극한 불의가 되니 차마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이기발은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면 비록 성현의 일이라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 강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다음 글에 잘 드러난다. “아! 지금 명나라를 섬기던 예를 북인들에게 옮겼습니다. 아! 어떻게 성현을 취하여 그 일을 행하는 것으로 하늘의 이치에 합하고 인정을 순응시키겠습니까? 진실로 어긋나고 뒤집어졌다면 비록 성현의 일이라도 나는 또한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자식이 어찌 그 노모를 봉양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噫! 乃今移其禮於北人耶? 噫! 何以取聖賢焉, 以其行事, 合於天理而順乎人情也? 苟違焉逆焉, 雖聖賢之事, 吾且不取. 噫! 人子豈不欲養其老母耶?)”(『西歸遺稿4 권8 「湖南伯問答」)】. 이런 의식의 소유자였던 까닭에 그의 『서귀유고(西歸遺稿)』를 일람하노라면 문집 전체를 통관하는 강렬한 의리 정신을 만날 수 있는데, 서귀의 의리 정신은 ‘마땅함’을 기준으로 몇 가지 양상으로 표출된다.
첫째는 ‘어찌 차마[那忍]’인데, 이것은 부당한 일에 대해 ‘어찌 차마 그런 일을 하랴[那忍]’【부당한 일에 대한 ‘나인(那忍)’의 자세는 출사를 권유하기 위해 찾아온 전라관찰사 이시모(李時模)와의 문답을 기록한 「호남백문답(湖南伯問答)」(『서귀유고(西歸遺稿)』 권8)에 잘 나타나 있다. 가령, “명나라의 국운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국가는 차마 명나라를 섬기던 자로서 오랑캐를 섬기면서 편안히 거리끼는 바가 없고 아무 일 없듯 수치로 여기지 않으니 인륜이 모두 사라지고 하늘의 이치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지사들이 바다로 뛰어들고 산중으로 들어가기에도 급급한 일인데 어찌 차마 봉록과 출사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大明曆服, 不知時在何處, 國家忍以事大明者事虜, 晏無所忌, 恬不爲恥, 人倫掃地, 天理泯滅. 此固志士蹈海入山之不暇, 可忍言祿仕耶?]”, “임진년에 내 부친은 나이 14세였고 모친은 15세였습니다. 만일 명나라 병사들이 와서 왜적을 무찌르지 않았다면 우리 부친과 모친은 목숨을 온전히 하여 나를 낳고 기를 수 있었겠습니까? 명나라가 내 부모님을 살려주었는데 내가 곧 명나라를 멸망시킨 추악한 오랑캐 에게 陪臣 노릇을 하면서 남은 재물을 공략하는 것을 돕는 것으로써 내 모친을 봉양한다면, 비록 사람들이 나를 책망하지 않더라도 내 어찌 신명께 얼굴을 들며,, 내 어찌 상제께 얼굴을 들겠습니까?[在壬辰, 吾父年十四, 母年十五, 使無大明之兵來鏖賊者, 吾父母能保此全生, 以生我長我乎? 大明活我父母, 我乃爲陪臣於滅大明之醜虜, 得助攻餘財, 以養我母, 人雖不我咎, 我何顔神明, 我何顔上帝乎?]” 등이 ‘어찌 차마’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로 언명된다. 차마 배은망덕의 불의를 행할 수 없어 은거를 선택한 서귀였기에 선악과 시비, 출처의 기점에서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은 절로 의리를 택할 수밖에 없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둘째는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마땅히 하라[當爲所當, 當爲所能]’【‘당위소당(當爲所當)’과 ‘당위소능(當爲所能)’의 자세는 본고의 고찰 대상인 「양사룡전」, 나머지 하나의 전인 「송경운전」, 그리고 「식미가병서(食薇歌並序)」(『서귀유고(西歸遺稿)』 권1) 등에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차마 어찌 그런 일을 하랴”가 서귀의 의리 실행에 직접적인 동인이 되긴 하였지만, 그것은 여전히 수동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 ‘당위소당(當爲所當)’과 ‘당위소능(當爲所能)’은 거기서 한 발 더 진전된 면모를 보여준다. 해서는 안 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간다면 ‘그것 말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능동적 실천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출되기 때문이다.
진아의식
마지막은 본고에서 제시한 ‘진아(盡我)’이다. ‘진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다음 글에서 확인된다.
대저 더없이 미약한 사람으로서 더없이 높고 두터운 하늘, 땅과 그 덕을 합하는 것은 성인이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시(四時)를 차례대로 따르게 하고 음양을 법도대로 조절하는 것은 훌륭한 재상이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중략)… 일시의 절개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는 것은 의로운 선비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것은 모두 나에게 있어 내가 진실로 내게 있는 것을 다 한다면 나는 반드시 그 어려움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 가운데 공자가 계시고, 훌륭한 재상 가운데 주공(周公)이 계시고, 훌륭한 장군 가운데 방숙(方叔)이 있고, 효자 가운데 증삼(曾參)이 있고, 의사(義士) 가운데 백이(伯夷)가 있으니 이 분들은 모두 ‘나를 다하신[盡我]’ 분들이다 공자 같은 성인께서도 과연 천지와 함께 그 덕을 합치하는 것을 어려워 하셨는가? 주공 같은 재상도 과연 사시를 순조롭게 하고 음양을 조절하는 것을 어려워 하셨는가? …(중략)… 백이의 절개로도 과연 만고의 강상을 부지하는 것을 어려워했는가? 비록 그러하나 세상에는 또한 나 아닌 것이 있으니 나 아닌 것은 남이다. 무릇 덕(德), 재(才), 성(誠), 절(節)은 진실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그것을 다하여 공자가 되실 수 있었고, 주공과 방숙은 그것을 다하여 주공과 방숙이 될 수 있었고, 증삼과 백이는 그것을 다하여 증삼과 백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이른바 때[時]라는 것은 남에게 있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끝내 지위를 얻지 못하셨고, …(중략)… 백이는 말고삐를 부여잡고 한 간언을 이룰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내게 있는 것은 비록 아주 어렵더라도 능한 자는 어렵다 여기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은 비록 아주 쉽더라도 성인도 끝내 쉽게 할 수 없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게 있는 것을 다 하지 않고서 남에게 먼저 구하는 것, 이는 우리의 공통된 걱정거리 아닌가?
夫以莫微之人身也, 而能與莫高厚之天地合其德, 爲聖人不其難矣乎. 居宰輔之位而能使四時順其序, 陰陽調其度, 爲良相不其難矣乎? …(中略)… 一時之節能扶萬古之綱常, 爲義士不其難矣乎? 雖然, 是皆在我, 我苟盡在我, 我未必不易其難. 是故, 聖人有孔子, 良相有周公, 良將有方叔, 孝子有曾參, 義士有伯夷, 是皆盡我者也. 孔子之聖, 果難與天地合其德乎. 周公之相, 果難順四時調陰陽乎. …(中略)… 伯夷之節, 果難扶萬古綱常乎. 雖然, 世亦有不我者, 不我, 人也. 夫德也才也誠也節也, 是固在我者, 故孔子能盡之而爲孔子, 周公․方叔能盡之而爲周公․方叔, 曾參․伯夷能盡之而爲曾參․伯夷. 若夫所謂時也者, 在人非在我, 故孔子終於不得位 …(中略)… 伯夷不能遂叩馬之諫. 是故, 在我者雖甚難, 能者不以爲難; 在人者雖甚易, 聖人亦終不能易之. 况凡人乎? 不盡其在我者, 而先求諸人, 此豈非吾人所通患者乎?(『西歸遺藁4 권5 「與松京留守李令書」)
인용문은 서귀가 개성유수 이시만(李時萬)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이다. 서귀는 ‘진아(盡我)’한 인물의 예로 성인 공자, 훌륭한 재상 주공, 훌륭한 장수 방숙, 효자 증삼, 의사(義士) 백이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각자 성현으로 추앙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있는 덕(德), 재(才), 성(誠), 절(節)을 모두 다 펼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편 서귀는 세상에는 ‘나’ 아닌 ‘남’이 있다고 하면서 그 예시로 ‘때[時]’를 들었다. 이 ‘때’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남’에게 있는 것은 제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바로 ‘남’의 것이기 때문에 ‘나’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 이하 여러 성현도 이루지 못한 바가 있었다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로 논의를 이끈다. 그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다 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있는 것을 다 하려 하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을 먼저 구하려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다. 그러니 남에게 있는 것을 구하려 하지 말고 내가 할 도리를 다 해야 한다고, 다시 말하면 ‘진아(盡我)’해야 한다고 서귀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의리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나’와 ‘때’이다. ‘나’는 의리 시행의 주체이다. 여기서의 ‘나’는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나’이다. ‘때’는 의리 시행의 외적 조건이다. 의리는 기본적으로 실천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실천의 상황의 동반하는데 그 상황이 곧 ‘때’이다. 의리는 이 ‘때’와 만나 ‘時宜’로서 구체화되는데, 그런 점에서 ‘때’는 의리의 실천에 있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귀의 경우를 놓고 보면 ‘나’는 불의한 ‘때’를 만났기 때문에 외재해 있는 ‘때’를 따를 수 없고 ‘나’에게 내재한 것을 따라야 했다. 그것이 서귀에게는 은거를 통한 ‘盡我’의 구현이었다.】.
그렇다면 서귀는 무엇을 통해 ‘진아(盡我)’를 실천하였을까?
堯舜君民計自深 | 요순의 임금 백성 계책 절로 심원한데 |
如何身世此山林 | 어째서 이 신세는 이 산림에 들어왔나? |
夷齊餓死非吾分 | 백이숙제 아사(餓死)한 건 내 분수가 아니요 |
靖節歸來得本心 | 도연명의 귀거래가 내 본심에 꼭 맞았네. |
俯仰百年無愧怍 | 평생을 돌아보며 부끄러움 짓지 말고 |
棲遲一壑任行吟 | 골짝에 거처하며 읊조리길 맘껏 하리. |
讀書不可要科目 | 독서는 과거 시험 바라서는 안 되니 |
須向彝倫仔細尋 | 모름지기 이륜(彛倫)을 자세히 살펴야지. 『西歸遺稿4 권4 「偶吟眎諸生」 |
이 작품은 출사를 단념한 뒤 전주에 은거하면서 가르치던 유생들에게 보인 시이다. 이 시에는 절의를 지키기 위해 서귀가 선택한 방법과 은거 이후 지향한 삶의 대개가 드러나 있다. 서귀는 함련에서 백이숙제의 아사(餓死)는 자신이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도연명의 귀거래가 자신에게 마땅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의 문집을 살펴보면, 가령 “정신없이 바쁜 행색 모두 생계 때문이니, 백이숙제 대현(大賢)임을 비로소 알겠노라[奔忙行色皆糊口, 始識夷齊是大賢. 『西歸遺稿4 권4 「秋夜雨中歸來有感」.]”나 “백이숙제 아니니 곡기는 못 끊겠고, 풍년들어 술잔에 술이나 그득 했으면[不作夷齊難却食, 年豐願得酒盈杯. 『西歸遺稿4 권4 「立春」.]”과 같이 자신과 백이숙제를 비교하며 자신은 백이숙제처럼 할 수 없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 백이숙제가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것은 서귀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귀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였는가? 경련에 제시된 부끄러움 없는 삶과 매임 없는 유유자적한 삶이 서귀가 은거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 던 삶이었다. 그리고 미련에서처럼 서귀는 출세를 위한 독서가 아닌 인륜을 깨우치는 독서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였다. 서귀는 이러한 자기 삶의 지향을 제자들에게 보임으로써 제자들을 참 공부의 길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처럼 출사를 단념한 서귀는 자신이 마땅히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하는 교육[학문]과 수양을 통해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다.
서귀가 제시한 ‘진아(盡我)’ 정신은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서귀 자신이 개념화한 독특한 용어이다. 맹자에 나온 ‘진기(盡己)’가 비슷할 수 있겠는데, ‘진기(盡己)’의 ‘기(己)’가 보편적 본성의 담지자로서의 측면이 강한【차미란, 「위기지학 : 성리학의 인성교육론」, 『도덕교육연구』 제30권 1호, 2018, 18면.】 반면, ‘진아(盡我)’는 인용문에서 공자-德, 주공-才, 증삼-誠, 백이-節으로 대칭시키며 각자가 가진 것을 다 할 때 공자가 공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 것처럼 개별 존재의 가능성에 중심이 실려 있는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서귀의 ‘진아(盡我)’는 앞서 제시된 의리의 두 가지 양상[那忍과 當爲]을 포괄하는 동시에 의리 시행의 주체로서 ‘나’를 명시함으로써 그 주체성과 개별적 가능성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귀의 문집에서 일관되게 확인되는 의리의 양상이 「양사룡전」의 핵심적인 의사와 긴밀하게 조응된다는 점이다. 앞서 본 대로 양사룡이 “지금 나는 천한 사람이라 많은 재물을 가지고서 어려운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나의 가난이 심해서 할 수 없다면서 혹여 사람을 이롭게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버지께 은혜만 입고 보답하지 않는 자식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한 것은 배은(背恩)은 차마 할 수 없다는 ‘나인(那忍)’의 자세와 연결되고, “그런데 내게는 남에게 은혜를 베풀 돈과 재물이 없고, 내게는 남에게 혜택을 줄 작위도 없으니 나는 다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리라.”라고 다짐한 것은 ‘당위소당(當爲所當)’의 정신과 연결된다. 또 아내와 함께 묵정밭 수십 이랑을 개간하여 오이를 정성껏 가꾸고 험한 고개를 넘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오 이를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의 갈증을 풀어준 것은 하늘에 보은하기 위해 자신 이 할 도리를 마땅히 행하는 ‘진아(盡我)’의 실천으로 읽을 수 있다.
더욱이 「양사룡전」이 하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론을 도입부에 두고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그 관계를 강조하고 상기시켰던 것을 감안하면, 양사룡은 오이 재배와 나눔을 통해 하늘과의 의리를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이런 점에서 양사룡은 서귀가 현실에서 발견한 ‘진아(盡我)’의 실천자라 할 수 있다.
진아한 인물들
「양사룡전」에 등장하는 양흔동, 홍춘반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진아(盡我)’한 인물들이다. 이처럼 「양사룡전」을 저술한 기저에는 서귀의 의리 정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양사룡전」은 그저 효의 가치를 계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아(盡我)’의 실천자들을 입전하여 ‘진아(盡我)’의 가치를 확산하고자 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서귀가 쓴 두 편의 전 가운데 하나인 「송경운전(宋慶雲傳)」에서도 확인된다.
늘 손님이 오면 경운은 비록 손에 잡은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서둘러 그만두 고 비파를 가져오면서 “소인은 천한 사람인데 귀하를 자주 뵐 수 있는 것은 그 공이 소인 수중에 있는 이것에 있어서 그런 것이니 소인이 어찌 감히 천천히 손을 댈 수 있으며 소인이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반드시 곡조를 갖추어 연주하여 마음에 흡족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비록 천민이 오더라도 언제나 이와 같이 수응했으니 이렇게 하기를 20여 년이 되도록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주 사람들의 환심을 얻을 수 있었다.
每客至, 慶雲雖手執事, 必顚倒釋, 以取琵琶曰: “小人賤品也, 而多見以貴下者, 其功在小人手中, 小人豈敢遲下手乎? 小人豈敢不盡心乎?” 必具曲度以鼓之, 知其飫於心而後已. 雖輿儓人至, 亦莫不以是酬酢, 如是者至二十餘年不懈, 以是得完山人懽心.(『西歸遺稿4 권7 「송경운전(宋慶雲傳)」)
송경운은 서울에서도 이름을 날린 비파 명연주자였는데 정묘호란 때 전주 로 피신한 뒤 그대로 전주 사람이 된 인물이다. 송경운은 전주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지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에게 비파를 들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송경운이 손님들을 위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비파 연주요, 송경운은 이 비파 연주를 통해 사람들과 호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경운의 행위가 지닌 의미는 「송경운전」 마지막 부분에 붙인 서귀의 평가에 잘 나타나 있다.
아 훌륭하도다! 경운의 마음이여! 그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었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이 큰일임을 알아 다소의 수고로움을 괘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은 재주가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 됨을 알았고, 그는 작은 재주를 가지고서 남에게 교만을 부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음악을 일삼는 것으로써 남에게 미치는 바가 있음을 알았고, 그는 음악을 자신만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자신의 음악으로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이와 같이 한 뒤라야 자신을 낳아준 하늘에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경운의 마음을 큰 사업으로 옮겨 쓴다면 그 성취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벼슬에 있는 자들이 취한 바 있어 그것을 본받는다면 또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니 지벌이 낮아서 어렵다 할 것인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서 어렵다 할 것인가? 숭상하던 옛것으로써 오늘날에 적용하였으니 또한 세상을 따라 미루어 변화할 줄 아는 도에서 얻은 것 아닌가?
噫善哉! 慶雲之心乎! 其能知人有望於[缺], 遂於人也; 其能知悅人爲大, 小勞不暇念也; 其能知我小技能以悅多人, 爲可幸也; 其能知挾小技以驕人, 爲不可也. 其能知業其樂以有及乎人也, 其能知不可以自私也, 其能知不可以訑訑也, 其能知如是而後可以不害於我之天也. 使移其心於大事業上, 其成就也可量歟? 使在位者有所取而則之, 則亦何有於治天下國家乎? 可以地卑乎? 可以名不著乎? 尙古以間今, 不亦得於與世推移之道者歟?(같은 글)
서귀가 내린 평가의 핵심은 하늘이 내려준 천부의 재능을 자기만의 독단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서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낳아준 하늘에 해를 끼치지 않는, 곧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면 송경운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當爲所能] 을 가지고 ‘진아(盡我)’함으로써 하늘과의 의리를 지킨 사람이 되며 「송경운전」 또한 ‘진아(盡我)’의 실천자를 발견하고 입전한 작품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양사룡전」과 「송경운전」의 입전 인물이 모두 천민이라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양사룡전」과 「송경운전」에는 ‘천민도 이럴진대’와 같은 우월적이고 차등적인 인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효자전의 논평부에 흔히 나타나듯 나라가 입전인물에 대해 은전을 베풀어야 한다는 등의 시혜적 인식을 드러내지 않는다【林孝子傳(『息山續集4 권6), 鄭孝子傳(『訥隱集4 권20), 琴孝子傳(『立齋遺稿4 권19), 孝子吳後種傳(『九思堂集4 권8) 등 다수의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나라의 정려나 포상을 요구하거나, 혹은 나라로부터 은전을 받은 사실을 계몽적 차원에서 서술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그들의 입을 빌어 특기(特記)하고, 그들에 대한 진심어린 교감과 논평을 전면화할 따름이 다. 천민에 대한 이러한 관점과 인식은 서귀 당대의 문인들에게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면모로서 서귀가 보인 인간 이해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인용
Ⅰ. 머리말
Ⅲ.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
2. 중복 구성을 통한 주제의 심화와 특징적 인간상의 강조
Ⅳ. 서귀 이기발의 의리 정신과 「양사룡전」의 입전 의식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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