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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십사분 - 14.4~9 我今得聞如是經典 ~ 如來說非忍辱波羅蜜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십사분 - 14.4~9 我今得聞如是經典 ~ 如來說非忍辱波羅蜜

건방진방랑자 2022. 11. 17.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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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깨닫고 이를 받아지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지만, 만약 먼 훗날 후 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있어 이 경을 얻어듣고, 믿어 깨달아 이를 받아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하겠나이다.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則爲第一希有.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약당래세후오백세, 기유중생득문시경, 신해수지, 시인즉위제일희유.

 

14-5.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이 사람은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따라서 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자를 곧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何以故? 此人無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所以者何? 我相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하이고? 차인무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소이자하? 아상즉시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즉시비상. 하이고? 리일체제상, 즉명제불.”

 

14-6.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佛告須菩堤: “如是如是.

불고수보리: “여시여시.

 

14-7.

만약 또 한 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이야말로 심히 희유의 사람이라는 것을.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甚爲希有.

약복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심위희유.

 

14-8.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여래는 설하였다.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라고, 그래서 비로소 제일바라밀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何以故? 須菩堤! 如來說第一波羅蜜, 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바라밀, 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14-9.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여래가 설하기를,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須菩堤!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설비인욕바라밀.

 

 

9절에서 우리는 해인사본과 대정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여래설비인욕바라밀(如來說非忍辱波羅蜜)’ 다음에 시명인욕바라밀(是名忍辱波羅蜜)’이 첨가되어 있다. 이 경우 산스크리트 원문에도 시명(是名)’구절이 있을 여지가 없다. 시명(是名)구절을 천편일률적으로 집어넣어 그 문맥상의 패러렐리즘(parallelism, 병행立行)을 고수하는 것이 의미의 완벽을 기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가 참으로 매우 유치한 것이다. 라집(羅什)은 이런 병문적(騈文的)인 획일주의를 아주 싫어했던 것 같고 문맥의 다양성을 말살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133의 경우도 라집(羅什)은 의도적으로 시명(是名)구절을 빼버렸던 것이다. ‘A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라 이름할 수 있다라는 구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장은 ‘AA가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A라 이름할 수 있다‘AA가 아니다라는 논리구조에서 도출되는 부분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AA가 아니다라는 역설의 주장만으로 종결이 되어도 그러므로이후의 종속적 구문은 때로 더 강력하게 함의될 수 있는 것이다. 라집(羅什)은 이러한 문의(文義)의 심오한 중층적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시명(是名)’구문을 짜맞추고 있는 후대의 교주가(校注家)들은 이러한 라집(羅什)의 심오한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앞서 지적했듯이 시명(是名)’ 구문을 근본적으로 오석(誤釋)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욕(kṣānti)이란, 대승보살의 수행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 중의 하나이다. 인욕이란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모욕(侮辱)과 박해(迫害), 외도(外道)의 박해자나 비방자들의 비난, 중상, 모략, 굴욕 등을 참아내어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가 참는다.’ ‘인내한다라는 말을 할 때, 흔히 우리는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박해의 실체를 상정하기 쉽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참음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욕됨을 용서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받는다는 적극적인 뜻과, 모든 일에 대하여 희노애락의 동요됨이 없이 사물의 본성이 평등무이(平等無二)함을 깨달아 해탈(mokṣa)한다는 의미로 확산된다. 사실 인욕의 본질은 참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박해의 실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단순히 참는다는 것은 인욕이다. 그런데 참는 대상이 없어지고 참는 주체가 사라지는 경지, 즉 내가 참고 있다라고 하는 의식마저 해소되어버리는 경지가 곧 인욕바라밀이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인욕의 삶을 살았다면, 참으로 대승적 예수는 그렇게 자기가 인류를 대속한다 하는 의식도 없어야 하고 또 자기가 인욕했다고 하는 인욕의 의식조차 없어야만 진정한 예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아(無我)의 바라밀지혜가 없으면 그는 항상 배신감에 젖게 되고, 불운에 대한 저주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불타는 인욕바라밀조차 그것이 인욕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욕바라밀일 수 있다는 역설의 논리를 여기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4분의 기자는 이러한 인욕바라밀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생담(本生譚)의 이야기를 하나 도입하고 있다. 14분의 기자는 매우 문학적인 상상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본생담이란 본생경(本生經)에 쓰여져 있는 이야기를 일컫는 일반명사다. ‘본생(本生)’이란, ()이 되는 생()이란 뜻으로 석존(釋尊, 석가모니)의 전생을 의미한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전생이란 윤회(saṃsāra)의 굴레 속에서 무한히 가능하다. 그러므로 무한히 가능한 이야기들이 말하여질 수 있다. ‘옛날 옛적에 ’, ‘옛날 어느 나라에 어느 왕이 다스리고 있었을 때에’, ‘어느 어느 지방에 사는 어느 여자의 태 속에 회임되었을 때에 ’(이것은 실제로 정형화되어 있는 양식의 샘플이다)라 하고 그냥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양식적인 무제약성 때문에 인도의 설화문학, 그리고 기존하는 모든 지혜로운 인도의 민담이 재미만 있으면 불타의 이야기로 둔갑되어 수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쓰인 경전을 일반명사로 통칭하여 본생경(本生經)’이라 하고, 그것을 범어로 자따까(Jātaka)’라고 하는데, 이것은 물론 탄생’, ‘출산’, ‘기원’, ‘생명의 뜻을 가지는 자피(jāti)’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된 말로 태어남의 뜻이다.

 

재미난 것은 이러한 초기불교설화문학이 아주 크게 성행하여, 오늘날 대정대장경3~4() 전체가 본생경으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방대한 문학을 형성했다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본생경문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솝우화나 아라비안나이트 속으로도 흡수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는 20세기에나 와서 이솝우화를 배우면서희랍인의 민간설화가 AD 1세기경 로마의 파에드루스(Phaedrus)에 의하여 수집 기록된 것 서양의 지혜를 신기하고 재미있게 배운다는 생각은 했을지언정, 바로 그 이솝우화의 원형들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우매한가? 서양을 따라간다고 헛구름을 쫓았던 우리민족의 개화의 역사여! 태고적 신라인들이야말로 21세기 우리보다 훨씬 더 개화되어 있었으니! 석굴암을 보라! 그것은 희랍조각예술이 간다라예술을 거쳐, 돈황ㆍ용문을 거쳐 우리의 것으로 승화 완성된, 인류사상 가장 국제적인 예술작품이었으니! 오늘 21세기 디지털문명에서의 조선문명의 성취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자신의 가능성을 모르고 비굴하게 미국이나 일본의 뒷다리만 잡고 있으면 살길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이 얼마나 초라한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나를 모르고 나 아닌 것만 쫓는 가련한 우파 꼴통들이여! 고조선-고려의 기상을 계승하여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포효에 귀를 기울여라!

 

여기에 수록된 본생담은 바로 불타가 그 옛날 옛적에 끄샨띠바딘리쉬(Kṣāntivādin ṛṣi,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 시대의 왕은 가리왕(歌利王, Kali-rāja)이었는데 가리(歌利)’, ‘가리(迦利)’, ‘가리(迦梨)’, ‘갈리(羯利)’로도 음사되고, ‘Kaliṅga’로 불리기도 하기 때문에 가릉가(迦陵伽)’, ‘갈릉가(羯陵加)’, ‘가람부(迦藍浮)’라고 음사되기도 한다. 가리왕(歌利王)에서 앞의 가리(歌利)‘Kali’의 음사인데 그것은 그냥 악()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가리왕(歌利王)이 고유명사였다기보다는 그냥 나쁜 왕’(악왕惡王)이라는 비특칭적인 뜻에서 만들어진 이름일 것이다. 투쟁(鬪爭)’, ‘악세(惡世)’, ‘악생(惡生)’, ‘악세무도(惡世無道)’ 등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의역이 상징하듯이 극악무도함이 이를 데 없는 아주 흉악한 인물이었다. 이때의 붓다의 이름은 찬디바리(羼提波梨)물론 앞의 Kṣāntivādin의 음사임을 알 수 있다. ‘인욕의 수행자의 뜻였다.

 

찬디바리는 인욕(忍辱)을 실천하기 위해 산중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었다. 때마침 가리왕은 많은 신하와 궁녀를 데리고 이 산으로 사냥을 왔다. 왕은 점심을 먹은 후 노곤하여 잠이 들었다. 궁녀들은 이 틈을 타 유행(遊行)을 나갔는데 한참 가다보니 찬디바리가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가슴에서 공경한 마음이 우러나와 꽃을 꺾어 찬디바리 주위에 뿌리고 그 앞에 앉아 조용히 설법을 듣게 되었다.

 

한편 왕은 잠을 깨어 사방을 둘러보니 궁녀들이 보이지 않는지라, 사대신(四大臣)을 대동하고 궁녀들을 찾아나서 여인배와 찬디바리가 같이 앉아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보자, 가리왕은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가리왕은 찬디바리에게 물었다:

 

너는 사공정(四空定)에서 얻은 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너는 사무량심(四無量心)에서 얻은 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너는 사선사(四神事)에서 얻은 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너는 아무런 공덕(功德)을 얻은 바가 없다면 일개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는 놈이로구나! 그런데 어찌하여 궁녀들을 데리고 폼잡으며 설법하고 야단이냐? 도대체 넌 뭘 하는 놈이냐?”

인욕(忍辱)을 수행(修行)하고 있습니다.”

 

이 때 가리왕은 날이 시퍼런 검을 쑤욱 빼들었다.

네 이놈! 네가 정말 인욕을 수행하는 자라면, 네 인욕을 내가 당장 시험하리라!”하고 양팔을 싹뚝 짤라버렸다.

너 정말 뭐 하는 놈이냐?”

인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왕은 다시 찬디바리의 양다리를 싹뚝 베어버렸다.

다시 묻건대, 너 정말 뭐하는 놈이냐?”

인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오른 가리왕은 찬디바리의 머리카락을 움켜 쥐고 찬디바리의 코를 싸악 베어버렸다.

 

이 때도, 찬디는 안색(顔色)이 하나도 동요함이 없이 인욕을 수행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하늘과 땅이 여섯 번 크게 다른 모습으로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이 때 선인(仙人)의 오백(五百)제자들이 허공을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더니 찬디에게 묻는 것이었다.

 

찬디바리님이시여! 이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고도 인욕의 마음을 잃지 않으셨나이까?”

내 마음 한 치의 변함도 없다.”

 

가리왕은 이 모습을 보고 크게 경악하였다. 그래서 찬디에게 다시 물었다.

네가 아직도 인욕을 운운한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내 진실로 인욕하는 마음이 지성(至誠)하여 거짓됨이 없다면, 내 흘린 피 모두 젖이 되리라, 그리고 모든 잘린 몸이 제자리로 돌아오리라![아약실인我若實忍, 지성불허至誠不虛, 혈당위유血當爲乳, 신당환복身當還復!]”

 

이 말이 끝나자 마자 피가 드디어 우유빛 같은 젖이 되고, 예전과 같이 몸이 온전하게 되돌아왔다.

 

이에 찬디바리의 인욕바라밀이 인증되는 것을 보고, 가리왕의 공포는 더욱 짙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나의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제가 대선(大仙)을 훼욕(毁辱)하였으나 그대는 나를 오직 가엾게만 여겼을 뿐이외다. 나의 참회를 받으소서.”

 

이에 찬디바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 여색(女色)으로 인하여 나의 형체를 도륙하였도다. 나는 대지처럼 굳세게 참았노라. 내 훗날 성불(成佛)케 되면 혜도(慧刀)로 먼저 너의 삼독(三毒)을 치리라[여이여색汝以女色, 도절아형刀截我形, 오인여지吾忍如地. 아후성불我後成佛, 선이혜도先以慧刀, 단여삼독斷汝三毒].”

 

이때 산중의 제룡(諸龍)과 귀신(鬼神)들이 가리왕이 찬디바리 선인(仙人)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큰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 번개와 벼락을 내리쳐 가리왕과 그 모든 권속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때 찬디 선인(仙人)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치기를: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진정으로 날 위한다면 이들을 해치지 말라!”

 

이때 비로소 가리왕이 크게 뉘우치고 선인을 궁()으로 모셔다가 잘 공양(供養)하더라.

 

이야기는 또 이어지지만, 여기까지가 현우경(賢愚經)권제2(卷第二)대정(大正)4/359-360에 쓰여져 있는 가리왕과 인욕선인의 이야기찬디바리품제12羼提波梨品第十二를 내가 상술(詳述)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의 보고들이 수만 장의 장판(藏版)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을 감동시킨 스테판의 죽음의 장면(사도행전7)이 연상되기도 하고,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연상되기도 하는 이 한 이야기 속에서만도 우리는 수없는 설화의 전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차돈의 순교의 피는 왜 흰 젖기둥이 되어 한 길이나 치솟았는가?(백유용출일장白乳湧出一丈. 삼국유사(三國遺事)권제3(卷第三), 원종흥법(原宗興法) 위촉멸신(猒觸滅身)).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설화의 전형이며, 농경문화에서 성립할 수 없었던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기마민족 유목민족인 아리안족의 생활관념(=)이 반영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불타가 자기의 과거본생(本生)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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