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나라의 임금이 시해 당한 사건에 토벌하자고 요청한 공자
14-22. 제나라의 가로 진성자(陳成子)가 제나라의 임금 간공(簡公)을 시해하였다. 이에 공자께서 목욕재계하시고 조정에 나아가 애공(哀公)에게 아뢰었다: “진항(陳恒: 진성자의 실명)이 그의 군주를 시해하였사오니, 그를 토벌하시옵소서.” 14-22.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애공이 말하였다: “저 삼환(三桓)의 실권자들에게 고(告)하라.”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도 대부들과 같이 노니는 중신(重臣)인 셈이라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저 삼환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시는구나.”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공자는 삼환에게 차례로 찾아가 고하였다. 모두 불가(不可)하다고 답하였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도 대부들과 같이 노니는 중신인 셈이라 그들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
이 사건은 공자가 죽기 바로 전 전 해인 BC 481년, 애공 14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춘추경』과 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 공자의 이야기도 『좌전』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나라는 산동의 대국(大國). 진씨는 하남성 회양(淮陽)에 도읍하고 있는 진(陳)나라의 왕족인 진경중(陳敬仲)이 제나라로 망명하여 와서 안착된 귀화인 패밀리이다. 진경중은 제환공을 잘 보필하여 제환공의 총애를 얻었는데, 그 후손들은 제나라에서 점점 발호하여 제나라를 결국 갈취하기에 이른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는 제나라의 대부였는데 전성자(田成子)라는 별성(別姓)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명은 항(恒)이다. 진성자가 간공(簡公)을 시해한 사건은 결국 백년 후에 그의 증손자 전화(田和)가 제나라를 완전히 갈취하여 제나라의 임금이 되는 사건에까지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니까 진성자가 간공을 시해한 사건은 그래도 문명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던 춘추시대가, 살벌한 패도의 각축장인 전국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패러다임 쉬프트의 주요 계기인 셈이다. 이 상징적 사건을 대하는 공자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다. 노나라의 실력으로 제나라를 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공자가 잘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공자는 대의명분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공자가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고 공자의 속셈으로는 노 나라가 병(兵)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제나라의 민심이 이반했기 때문에 제나라의 군민이 반은 노군에 가담하리라는 구체적인 계산이 있었다[陳恒弑其君, 民之不與者半. 以魯之衆加齊之牛, 可克也.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공자는 실제로 거병(擧兵)만 할 수 있다면 자기가 군대를 데리고 가서 싸울 셈이었던 것이다. 이때 자로도 아직 살아있던 때였다. 71세의 노구였지만 공자는 이토록 자신의 신념에 투철했고, 실천력이 그대로 살아있었고, 판단력이 정확했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가였다.
‘이오종대부지후(以吾從大夫之後)’의 용례는 이미 안회의 장례 때(11-7) 기출한 표현이다. ‘대부의 뒤를 따른다’는 말의 실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직역 하여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내 번역이 그 참 뜻일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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