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나라의 임금이 시해 당한 사건에 토벌하자고 요청한 공자
陳成子弑簡公.
成子, 齊大夫, 名恆. 簡公, 齊君, 名壬. 事在『春秋』哀公十四年.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朝, 音潮.
○ 是時孔子致仕居魯, 沐浴齊戒以告君, 重其事而不敢忽也. 臣弑其君, 人倫之大變, 天理所不容, 人人得而誅之, 況鄰國乎? 故夫子雖已告老, 而猶請哀公討之.
公曰: “告夫三子!”
夫, 音扶, 下“告夫” 同.
○ 三子, 三家也. 時政在三家, 哀公不得自專, 故使孔子告之.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孔子出而自言如此. 意謂弑君之賊, 法所必討. 大夫謀國, 義所當告. 君乃不能自命三子, 而使我告之邪?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以君命往告, 而三子魯之强臣, 素有無君之心, 實與陳氏聲勢相倚, 故沮其謀. 而夫子復以此應之, 其所以警之者深矣.
○ 程子曰: “左氏記孔子之言曰: ‘陳恆弑其君, 民之不予者半. 以魯之衆, 加齊之半, 可克也.’ 此非孔子之言. 誠若此言, 是以力不以義也. 若孔子之志, 必將正名其罪, 上告天子, 下告方伯, 而率與國以討之. 至於所以勝齊者, 孔子之餘事也, 豈計魯人之衆寡哉? 當是時, 天下之亂極矣, 因是足以正之, 周室其復興乎? 魯之君臣, 終不從之, 可勝惜哉!”
胡氏曰: “『春秋』之法, 弑君之賊, 人得而討之. 仲尼此擧, 先發後聞可也.”
해석
陳成子弑簡公.
진나라 성자가 간공을 시해했다.
成子, 齊大夫, 名恆.
성자는 제나라 대부로 이름은 항이다.
簡公, 齊君, 名壬.
간공은 제나라 임금으로 이름은 임이다.
事在『春秋』哀公十四年.
이 일은 『춘추좌전』 애공 14년조에 있다.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공자께서 목욕재계하시고 조회할 때 애공에게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청컨대 그를 토벌하소서.”라고 알리셨다.
朝, 音潮.
○ 是時孔子致仕居魯,
이때에 공자는 벼슬에서 물러나 노나라에 살았다.
沐浴齊戒以告君,
목욕재계하고 임금에게 알린 것은
重其事而不敢忽也.
그 일이 심중하여 감히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臣弑其君, 人倫之大變,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인륜의 크나큰 변고로
天理所不容,
천리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니,
人人得而誅之, 況鄰國乎?
사람마다 죽여도 되는 것인데 하물며 이웃나라에 있어서랴.
故夫子雖已告老,
그러므로 부자께서 비록 늙었기에 벼슬을 그만둔다고 청했지만
而猶請哀公討之.
오히려 애공에게 토벌하기를 요청한 것이다.
公曰: “告夫三子!”
애공이 “세 사람에게 말하라!”라고 말했다.
夫, 音扶, 下“告夫” 同.
○ 三子, 三家也.
세 사람은 삼가다.
時政在三家, 哀公不得自專,
이때에 정치는 삼가(三家)에게 달려 있어 애공이 스스로 온전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故使孔子告之.
공자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이다.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공자께서 “나는 대부의 뒤를 따랐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금께서 ‘세 사람에게 말하라’라고 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
孔子出而自言如此.
공자가 나와서 스스로 말한 게 이와 같다.
意謂弑君之賊, 法所必討.
뜻은 ‘임금을 시해한 적은 법에 반드시 토벌해야 한다.
大夫謀國, 義所當告.
대부는 국사를 도모하니 의리상 마땅히 알려야 한다.
君乃不能自命三子,
그런데 임금이 곧 스스로 세 사람에게 명할 수 없어
而使我告之邪?
나로 하여금 그것을 말하게 하는 구나.’라는 것이다.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세 사람에게 가서 말씀하시니 불가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공자께서 “나는 대부의 뒤를 따랐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씀하셨다.
以君命往告,
임금으로 명령으로 가서 고했지만
而三子魯之强臣, 素有無君之心,
삼자(三子)는 노나라의 강한 신하들로 본래 무군(無君)의 마음이 있어,
實與陳氏聲勢相倚, 故沮其謀.
실제론 진항과 성세(聲勢)가 서로 의지하였기 때문에 도모함을 저지한 것이다.
而夫子復以此應之, 其所以警之者深矣.
부자가 다시 이 말로 응하였으니 경계함이 깊은 것이다.
○ 程子曰: “左氏記孔子之言曰:
정이천이 말했다. “좌씨가 공자의 말을 기록하길
‘陳恆弑其君, 民之不予者半.
‘진항이 임금을 시해할 때 백성이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 반이었다.
以魯之衆, 加齊之半, 可克也.’
노나라의 백성에 제나라 반절의 백성을 더하면 이길 수 있다.’라고 했다.
此非孔子之言.
이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다.
誠若此言, 是以力不以義也.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이것은 힘으로 한 셈이지, 의로 한 건 아니다.
若孔子之志, 必將正名其罪,
공자의 뜻을 말하자면 반드시 그 죄를 바르게 이름하여
上告天子, 下告方伯,
위로 천자에 고하고 아래로 방백에 고하여
而率與國以討之.
우호국(與國)을 거느리고 토벌했을 것이다.
至於所以勝齊者, 孔子之餘事也,
제나라를 이기는 까닭에 이르러선 공자에겐 나머지 일일 뿐이니
豈計魯人之衆寡哉?
어찌 노나라 사람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겠는가?
當是時, 天下之亂極矣,
당시엔 천하의 혼란스러움이 극심하여
因是足以正之, 周室其復興乎?
이로 인해 바로 잡을 수 있었다면 주나라 왕실은 부흥했을 것이로다.
魯之君臣, 終不從之,
그러나 노나라 군신들이 마침내 따르질 않았으니,
可勝惜哉!”
애석함을 이루다 말할 수 있으랴.”
胡氏曰: “『春秋』之法,
호인(胡寅)이 말했다. “『춘추』의 법에
弑君之賊, 人得而討之.
‘군주를 시해한 적은 사람들이 토벌할 수 있다.’고 했으니,
仲尼此擧, 先發後聞可也.”
중니는 이 거사를 먼저 시작한 후에 아뢰는 것이 괜찮았으리라.”
○ 72세의 공자는 현직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 분연(憤然)히 일어났다. 곧, 제(齊)나라의 진항(陳恒)이 그 군주 간공(簡公)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자는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는 노나라 군주 애공(哀公)을 만나, 진항을 토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항은 본디 진(陳)나라 문자(文子)의 자손인데, 그 선조가 제나라로 망명해서 전씨(田氏)로 일컬었다. 이 집안은 제나라에서 세력을 키우더니, 진항이 마침내 간공을 시해한 것이다. 동맹국에 정변이 일어나면 토벌군을 내는 것이 제후들 사이의 의리였다.
하지만 당시 노나라의 정권은 노나라 환공(桓公)의 세 후손인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의 이른바 삼환(三桓)에게 있었다. 애공은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공자에게 세 가문의 대부들에게 알리라고 했다. 공자는 실망해서 “내가 대부 반열의 끄트머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거늘 군주는 세 사람에게 고하라고 하는구나”라고 했다. 그러고는 세 사람에게 알렸으나 이들은 토벌의 군대를 낼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물러나와 ‘내가 대부 반열의 끄트머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탄식했다.
공자는 대부의 직을 그만두었지만 노나라가 여전히 대부로 예우했으므로, 공자는 겸손하게 ‘대부 반열의 끄트머리에 있다’고 말했다. 불감불고야(不敢不告也)는 아무래도 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가 삼환에게 토벌의 당위성을 말한 것은 당시 참월(僭越)의 뜻을 품었던 삼환을 책망(責望)하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기에 삼환은 불가하다고 한 듯하다. 공자는 일생 재계와 전쟁과 질병을 삼갔다. 하지만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토벌의 정당성을 역설했으니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실천 의지를 우리는 읽어내야 할 것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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