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성은 같았지만 습관에 따라 멀어졌다
17-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태어나면서 사람의 본성은 서로 비슷한 것이지만, 후천적 학습에 의하여 서로 멀어지게 된다.” 17-2.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
이 장이 공자의 정치적 거취문제를 다룬 에피소드 다음에 위치한 것은, 편집자의 시각에서는 정치적 참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교육이며 인간의 교육의 가능성에 관한 인간본성의 탐구야말로 「양화」편의 전체적 주제와 관련된 어떤 포괄적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여튼 이 장은 공자가 인간의 본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말한 적이 없다는 일반론과 관련하여, 공자가 인간 본성(human nature)에 관하여 논한 거의 유일한 언급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과연 공자가 여기서 인간 본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우선 공자는 인간의 심성을 하나의 철학적 사유의 테마로서 객관화 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로 성인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지적인 탐구를 하지 않는다.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싯달타도 인간 본성을 논구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인간론에 있어서 본질화되고 실체화되질 않는다. 여기 ‘본성(本性)’이라는 우리의 표현 자체가 어떤 현상적 차원에 대하여 본질적 차원이라는 존재론적 탐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송유들이 이 장에 대하여 곧바로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운운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사이비 논의인 것이다.
최근에 곽점간(郭店簡)에서 『성자명출(性自命出)』이라는 문헌이 나오고 상박초간(上博楚簡)에서 『성정론(性情論)』이라는 매우 유사한 문헌이 나와, 선진시대의 인성(人性)의 문제에 관한 논의가 전반적으로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개두(開頭)로부터 성(性)에 관한 담론이 나오고 있는데 두 문헌이 거의 동일하지만 여기 곽점간을 소개한다(丁原植 校讀).
凡人雖有性, 心無定志, 待物而後作, 待悅而後行, 待習而後定. 喜怒哀悲之氣, 性也. 及其見於外, 則物取之也. 性自命出, 命自天降. 道始於情, 情生於性. 始者近情, 終者近義. 知情者能出之. 知義者能入之. 好惡, 性也. 所好所惡, 物也. 善不善性也. 所善所不善, 勢也.
이것의 해석은 현재도 많은 연구가 진행중에 있고 난해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BC 300년 이전의 문헌임이 확실한 이 죽간에서 이토록 고도의 철학적 사유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다. 중국고대문명의 난숙함을 나타내주는 물리적 사실로서 우리는 춘추ㆍ전국시대의 문헌에 관하여 새롭게 눈을 떠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해석이 얼마나 기존의 유가정통론을 흔들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의 모든 편견적 사유를 근원적으로 혁명시키지 않는 한,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양천년의 모든 고정관념을 분쇄시킬 수 있는 새로운 21세기적 사유의 실마리이다. 어찌하여 이런 문헌이 2300여 년을 땅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하필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지 참으로 인간 역사의 전개는 오묘한 섭리가 있는 것 같이도 느껴지는 경외(敬畏) 그 자체이다. 우선 소략하나마 번역을 시도해보겠다.
대저 인간은 비록 성(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정해진 지향성[志]이 없는 것이다. 오직 외계사물[物]과의 교섭을 기다려서 작동되는 것이요, 오직 기쁨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기다려 행(行)하여지는 것이고, 오직 반복되는 습관(習)을 기다려 정착[定]되는 것이다. 희(喜)ㆍ노(怒)ㆍ애(哀)ㆍ비(悲)의 기(氣)가 곧 성(性)이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데 이르면 곧 외계의 사물이 그것에 침투하여 버린다. 성(性)이란 명(命)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명(命)이란 하늘[天]로부터 내려오는[降] 명령이다. 그러니까 성은 순결한 하늘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도(道)라는 것은 모두 정(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情)은 또 성(性)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도의 시원은 항상 정(情)에 가깝고, 그 종말은 의로움[義]에 가까운 것이다. 정(情)을 아는 자는 도를 발출시키고 의(義)를 아는 자는 도를 수렴시킨다. 인간의 호(好)ㆍ오(惡)는 성(性) 그 자체의 경향성이다. 호(好)하는 바, 오(惡)하는 바, 즉 호ㆍ오의 대상이 곧 물(物)이다. 인간의 선(善)ㆍ불선(不善)은 성(性) 그 자체의 경향성이다. 선(善)하는 바, 불선(不善)하는 바, 즉 선ㆍ불선의 대상이 곧 물질세계가 형성하는 세(勢)이다.
지금 여기 나의 번역에 관하여 설명만 하려 해도 나는 이 책 만큼의 분량의 또 하나의 책을 쓸 수 있다. 그만큼 그 함의는 엄청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세밀히 따라가보면 유가의 정통 원류에 있어서는 맹자로부터 정주를 거쳐 퇴계에까지 내려오는 모든 심성론이 설자리를 잃는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논리에는 모든 본질주의(intrinsicism)가 거부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이 모두 유동적으로 파악되며 다음의 단어는 모두 등가가 성립한다.
성(性) = 생(生) = 심(心) = 정(情) = 기(氣)
최초의 구절을 보라! ‘범인수유성(凡人雖有性), 심무정지(心無定志)’, 여기 성(性)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로 나오다가 바로 심(心)으로 바뀌고 만다. 성(性)과 심(心)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성(性)이란 인간의 마음(心)의 경향성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정해진 지향성(intentionality)이 없다는 것이다. 고정불변한 성향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가치, 호오, 선ㆍ불선은 성(性)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성(性)과 물(物)이 끊임없이 교섭하는 관계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천명(天命)이라는 것도 ‘하늘의 명령’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훈습이 가미되지 않는 순결한 자연상태를 이를 뿐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의 성(性)은 희ㆍ노ㆍ애ㆍ비의 기(氣) 에너지일 뿐이다. 천명이 도덕적 근원이 아니라, 칠정 덩어리일 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性)은 태어나면서[生]부터의 심(心)의 경향성일 뿐이며, 끊임없이 대상세계와 교섭해 가면서 가치를 형성해 가고 종국에는 의(義)로운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자근정(始者近情), 종자근의(終者近義).’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장의 ‘성상근야(性相近也)’는 실제로 ‘생상근야(生相近也)’를 의미한 것이다. 간본(簡本)에서는 성(性)과 생(生)은 통자(通字)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장의 메시지는 성(性)이라는 명사적 개념을 규정하는 명제가 아니라 술부적 사태에 보다 큰 의미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는 서로 가까운데 훈습에 따라 서로 멀어지게 될 뿐이다.
生相近也, 習相遠也.
이것 또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인간의 현상태를 과정론적으로 ‘기술한’ 명제라는 측면에서 간본(簡本)의 성정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습(習)’이라는 회의자의 자형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설문(說文)』에 ‘삭비야(數飛也)’라고 규정되어 있듯이, 새가 자주 나는 모양이다. 나도 어릴 때 집에 있는 비둘기집을 살펴보면, 새끼 비둘기가 날개가 형성됨에 따라 집 근처를 자주 나는 연습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면서의 모습이란 다 비슷한데 후천적 학습(반복) 과정을 통해 다른 모습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간본에 ‘학습을 기다려 다른 모습이 정해진다[대습이후정(待習而後定)]’이라는 것이 바로 이 장의 메시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상근, 습상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공자의 말로서 결국 모두(冒頭)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학습(學習)의 중요성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학이(學而)」편의 공문의 학규(學規)적 내용을 다시 간결하게 부연하여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학이」과 「양화」편은 같은 계열의 그룹에 의하여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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