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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 - 송봉사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 본문

산문놀이터/삼국&고려

최해 - 송봉사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

건방진방랑자 2019. 5. 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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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을 받든 이중보(李中父)가 고려로 환국함에

송봉사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

 

최해(崔瀣)

 

 

고려인들 중국 과거에 급제하며 실력을 떨치다

翰林李中父, 奉使征東, 已事將還, 過辭予, 因語之曰:

進士取人, 本盛於唐長慶初. 金雲卿, 始以新羅賓貢, 題名杜師禮牓, 由此以至天祐終, 凡登賓貢科者, 五十有八人. 五代梁, 又三十有二人, 盖除渤海十數人, 餘盡東士.

逮我高麗, 亦甞貢士於宋, 淳化孫何牓, 王彬崔罕, 咸平孫僅牓, 有金成績, 景祐張唐卿牓, 有康撫民, 政和中, 又親試, 權適金端等四人, 特賜上舍及第, 擧是可見東方代不乏才矣.

 

중보, 원나라에서 급제하다

然所謂賓貢科者, 每自別試, 附名牓尾, 不得與諸人齒, 所除多卑冗, 或便放歸. 欽惟聖元, 一視同仁, 立賢無方, 東士故與中原俊秀竝擧, 列名金牓, 已有六人焉.

中父雖後出, 迺擢高科, 除官禁省, 施及二親, 俱霑恩命. 光捧詔書, 來使故國, 謁母高堂, 焚黃先隴, 爲存歿榮, 得志還鄕, 不獨長卿翁子夸于蜀越矣.

 

최치원과 중보의 차이

吾家文昌公十二西㵀游, 十八登咸通十五年第, 歷尉中山, 佐淮南高侍中, 官至待御史內供奉, 二十八奉使歸國, 鄕人至今傳以爲美談. 當是時也, 屬於唐季, 四海兵興, 而公以羇旅孤蹤, 寄食于藩鎭, 雖授憲秩, 職非其眞. 及乎東歸, 國又大亂, 道梗不果復命, 論其平生, 可謂勞勤而其爲榮, 無足多者. 曷若吾中父遇世休明, 致身華近, 而且年方強壯, 志愈謙光, 其前途有未易量者, 則顯榮家國, 豈止此一時? 必見富貴苦逼, 功名滿天下, 晝錦之堂, 將大作於東韓, 未識後來視中父, 昔東人爲何如也.

 

중도 하차했던 내가 중보에게 하고 싶은 말

復記在至治元年, 亦自猥濫, 與計而偕, 是年擧子尙未滿額, 登龍牓者 纔四十三人. 予幸忝第二十一名, 拜蓋牟別駕, 赴官數月, 以病求免. 今玆退安里巷, 十有三年, 壯志日消, 無復飛騰之勢矣. 比見中父, 益知予之終於自棄而無成也, 慚負聖朝, 又奚言哉? 中父尙勉旃, 毋以一簣進止而虧九仞之高也. 予與中父厚, 旣美其行, 且訟予拙而勖復之云. 東文選卷之八十四

 

 

 

 

해석

 

고려인들 중국 과거에 급제하며 실력을 떨치다

 

翰林李中父, 奉使征東, 已事將還, 過辭予, 因語之曰:

한림(翰林)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받들어 정동성(征東省)에 들렀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하는데 들러 나에게 작별하기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進士取人, 本盛於唐長慶初.

진사(進士)가 되어 사람을 취함은 본래 당나라 장경(長慶)장경(長慶): 당나라 목종(穆宗)의 연호이다. 초에 성행했다.

 

金雲卿, 始以新羅賓貢, 題名杜師禮牓, 由此以至天祐終, 凡登賓貢科者, 五十有八人.

김운경(金雲卿)이란 이가 처음으로 신라 빈공(賓貢)빈공(賓貢): 타국에서 중국의 조정에 천거한 인재를 가리킨다.으로 두사례(杜師禮) 합격자 명단에 쓰여졌고 이로부터 천우(天祐)천우(天祐):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의 연호이다.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빈공과에 오른 이가 58명이었다.

 

五代梁, 又三十有二人, 盖除渤海十數人, 餘盡東士.

오대(五代)의 양()ㆍ당()에 또 32명이 있었으니, 대개 발해(渤海)10여 인을 제외하곤 나머진 죄다 통일신라의 사람이다.

 

逮我高麗, 亦甞貢士於宋, 淳化孫何牓, 王彬崔罕, 咸平孫僅牓, 有金成績, 景祐張唐卿牓, 有康撫民, 政和中, 又親試, 權適金端等四人, 特賜上舍及第, 擧是可見東方代不乏才矣.

우리 고려에 이르러 또한 일찍이 송() 나라에서 선발하니 순화(淳化)에 손하(孫何)의 합격자 명단에 왕빈(王彬)ㆍ최한(崔罕)이 있었고 함평(咸平)에 손근(孫僅)의 합격자 명단에 김성적(金成積)이 있었으며, 경우(景祐)에 장당경(張唐卿)의 방에 강무민(康撫民)이 있었고, 정화(政和)의 친시(親試)에서 또 권적(權適)ㆍ김단(金端) 4명에게 특별히 상사급제(上舍及第)를 하사했으니, 이를 열거하면 우리나라는 대대로 재주 있는 이가 부족하지 않았다는 걸 볼 수 있다.

 

 

 

중보, 원나라에서 급제하다

 

然所謂賓貢科者, 每自別試, 附名牓尾, 不得與諸人齒, 所除多卑冗, 或便放歸.

그런데 소위 빈공과(賓貢科)는 매번 별시(別試)로부터 합격자 명단의 끝에 이름을 붙여 모든 사람과 동등할 수 없었고 제수(除授)됨에 비관(卑官)이나 용관(宂官)이 많았으며 혹은 곧바로 환국하게 했다.

 

欽惟聖元, 一視同仁, 立賢無方, 東士故與中原俊秀竝擧, 列名金牓, 已有六人焉.

공경히 생각기로 성스런 원나라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일시동인(一視同仁):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함하여 어진 이를 세움에 계급은 묻지 않았으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의 빼어난 수재와 아울러 천거되어 합격자 명단[金牓]에 이름이 나열된 이가 이미 6명이었네.

 

中父雖後出, 迺擢高科, 除官禁省, 施及二親, 俱霑恩命.

중보(中父)가 비록 뒤에 진출해 높은 등급에 선발되어 금성(禁省)금성(禁省): 궁궐과 그 안에 있는 관청.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양친(兩親)에게 미쳐 모두 은혜로운 왕명에 적셔졌다.

 

光捧詔書, 來使故國, 謁母高堂, 焚黃先隴, 爲存歿榮, 得志還鄕, 不獨長卿翁子夸于蜀越矣.

영광스레 조서(詔書)을 받들고 고국에 사신으로 와서 고당에서 어머니를 뵙고 선친의 무덤에서 분황(焚黃)분황(焚黃): 조선시대의 사후 의식. 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조정에서 추증된 관직의 사령장과 황색 종이에 쓴 부본(副本)을 주는데, 이를 받은 자손은 추증된 선조의 무덤에 고하고, 황색 종이의 부본을 그 자리에서 태우는 의식을 올렸다.하여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영화롭게 했으니 장경(長卿)과 옹자(翁子)가 촉월(蜀越)에 자랑함을 홀로하지 못하게 했다금의환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나 주매신(朱買臣)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말이다. 장경과 옹자(翁子)는 각각 사마상여와 주매신의 자인데, 이들의 고사는 다음과 같다. 사마상여가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고향인 파촉(巴蜀) 땅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촉군 태수(蜀郡太守) 이하가 모두 교영(郊迎)하였으며, 현령(縣令)몸소 쇠뇌를 등에 지고 앞장서서 달림으로써負弩矢先驅존경하는 뜻을 보였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117 司馬相如列傳한나라 주매신이 만년에 영달하여 회계 태수(會稽太守)로 부임할 때 누더기 차림에 인수(印綬)를 허리에 차고 군저(郡邸)에 가자 아전이 인수를 발견하고는 경악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치우게 하였는데, 그중에는 주매신을 경멸하며 버렸던 옛날의 아내와 그 남편도 끼어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64朱買臣傳」】.

 

 

 

최치원과 중보의 차이

 

吾家文昌公十二西㵀游, 十八登咸通十五年第, 歷尉中山, 佐淮南高侍中, 官至待御史內供奉, 二十八奉使歸國, 鄕人至今傳以爲美談.

우리 가문 문창공(文昌公)께서는 나이 12살에 서쪽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18살인 함통(咸通) 15년에 급제하여 중산위(中山尉)를 지냈으며 회남(淮南) 고변(高騈) 시중(侍中)의 막부에서 도왔고 벼슬이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이르렀다가 28살에 사명을 받고 환국하니 고향 사람들이 지금까지 전하며 미담으로 삼았다.

 

當是時也, 屬於唐季, 四海兵興, 而公以羇旅孤蹤, 寄食于藩鎭, 雖授憲秩, 職非其眞.

이 때는 당나라 말에 속해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공께선 나그네의 외로운 자취로 주둔지에서 기식하며 비록 헌질(憲秩)헌질(憲秩) : 어사(御史)의 직위를 가리킨다을 제수받았지만 직분은 참된 게 아니었다.

 

及乎東歸, 國又大亂, 道梗不果復命, 論其平生, 可謂勞勤而其爲榮, 無足多者.

환국함에 이르러 나라가 또한 크게 혼란스러워져 길이 막혀 과연 복명(復命)을 못했으니 평생을 논하자면 애썼지만 영광스러운 것은 많지가 않다고 할 수 있다.

 

曷若吾中父遇世休明, 致身華近, 而且年方強壯, 志愈謙光, 其前途有未易量者, 則顯榮家國, 豈止此一時?

어찌 우리 중보와 같이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만나 화려하고 측근인 벼슬에 몸을 맡기고 또한 나이는 혈기가 왕성하지만 뜻은 더욱 겸손하니 앞길이 헤아리기 쉽지 않으니 국가의 드러난 영광스러움이 한 때에 그치겠는가?

 

必見富貴苦逼, 功名滿天下, 晝錦之堂, 將大作於東韓, 未識後來視中父, 昔東人爲何如也.

반드시 부귀가 몹시 괴로움을 보고 공명이 천하에 가득하여 주금당(晝錦堂)이 장차 우리나라에 크게 지어지리니 후대 사람들이 중보를 보길 옛날의 동방의 사람들이 어떠했다 하련지 모르겠다.

 

 

 

중도 하차했던 내가 중보에게 하고 싶은 말

 

復記在至治元年, 亦自猥濫, 與計而偕, 是年擧子尙未滿額, 登龍牓者 纔四十三人.

다시 기억하기로 지치(至治) 원년에 또한 스스로 외람되이 계부(計簿)와 함께 했는데 이 해엔 과거 보는 사람이 오히려 숫자를 채우지 못하여 합격자 명단[龍牓]에 오른 사람이 겨우 43명이었다.

 

予幸忝第二十一名, 拜蓋牟別駕, 赴官數月, 以病求免.

나는 다행히 욕 되이 제21명으로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지만 관아에 부임한 지 수개월에 병들어 면직하길 구했다.

 

今玆退安里巷, 十有三年, 壯志日消, 無復飛騰之勢矣.

지금 이처럼 마을에 물러난 지 13년으로 왕성한 뜻은 날로 쇠해 다시 날아오를 기세는 없어졌다.

 

比見中父, 益知予之終於自棄而無成也, 慚負聖朝, 又奚言哉?

중보에 비교하여 보면 더욱 나는 스스로 포기하여 이룬 게 없는 데 그쳤음을 알았으니 성스런 조정을 저버림에 부끄러워 또한 무얼 말하리오?

 

中父尙勉旃, 毋以一簣進止而虧九仞之高也.

중보는 오히려 힘써 한 삼태기의 나아감을 그침으로 아홉 길이의 산을 허물어뜨리지 말라.

 

予與中父厚, 旣美其行, 且訟予拙而勖復之云. 東文選卷之八十四

나와 중보는 사이가 두터워 이미 그 행실을 찬미하며 또한 나의 모자름을 꾸짖고 다시 힘쓰게 하는 것이다.

 

 

인용

작가 / 지도

앞 글(桂苑筆耕序) / 뒷 글(上崔相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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