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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 식암집서(息菴集序)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김창협 - 식암집서(息菴集序)

건방진방랑자 2019. 5. 11.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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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암집서(息菴集序)

 

김창협(金昌協)

 

 

계곡과 장유, 식암

國朝近世文章, 最推谿谷澤堂爲作家, 余嘗妄論: ‘二氏之文, 以謂谿谷近於天成, 澤堂深於人工, 比之於古, 蓋髣髴.’

二氏以後, 作者多矣, 然其能追踵前軌, 卓然名世者亦少, 最後乃始得息菴金公. 公之文, 雖天成不若谿谷, 而人工所造, 殆可與澤堂相埒, 乃其瑰奇泬㵳之致, 鼓鑄淘洗之妙, 則又獨擅其勝云.

 

조선의 문장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와 원인

蓋嘗謂我東之文, 其不及中國者有三, 膚率而不能切深也, 俚俗而不能雅麗也, 冗靡而不能簡整也. 以故其情理未晢, 風神未暢, 而典則無可觀, 若是者, 豈盡其才之罪? 亦其所蓄積者薄, 所因襲者近, 而功力不深至耳.

 

식암이 우뚝한 이유와 문장의 특징

公旣才素高, 於學又甚博, 而尤好深湛之思, 鑱畫之旨. 自少攻詞賦, 已能一掃近世陳腐熟爛之習, 而自刱新格, 每試輒驚其主司, 而一時操觚之士, 競相慕效, 以求肖似. 及其爲古文, 上溯秦漢, 下沿唐宋, 以放於皇明諸大家. 參互擬議, 究極其變, 用成一家言, 大抵本之以意匠而幹之以筋骨, 締之以材植而傅之以華藻, 卒引之於規矩繩墨, 森如也.

章箚, 尤精覈工篤, 其指事陳情, 論利害辨得失, 能曲寫人所不能言, 往往刺骨洞髓, 而要不失古人氣格. 詩律亦沈健而麗絶, 不作浮聲慢調.

 

인공미에 있지만 공무를 맡아 많이 지을 순 없었던 작품들

蓋其爲稿者凡二十五卷, 而試求其一篇, 近於膚率俚俗而冗靡者, 無有焉. 嗚呼! 公之於文章, 其人工至到, 雖謂之奪天巧, 可也, 而於以接武谿澤也, 其可以無愧矣. 然公蚤被枋用, 身總軍國之重, 鉛槧之業, 太半爲籌畫韜鈐所奪. 卒又限以中身, 不得大肆志於結撰, 而其所成就, 猶足以跨越一世, 焜耀後來, 此豈不尤難也哉?

 

식암 집안의 안타까운 후일담과 서문을 짓게 된 배경

始公旣沒, 嗣子都事道淵, 用鐵字印公全稿若干本, 旣行於世矣. 今靈光守洪侯璛, 卽公侯芭, 謂公文宜百世不朽, 而集無板刻, 難保於傳遠. 甫上官, 卽鳩工鋟榟, 來問序於余. 余竊念自公沒未幾, 己巳之禍, 都事君以憂死, 夫人竄海島, 室家蕩析, 爲世所悲.

今雖世道更化, 幽枉畢伸, 而公家乃無一遺胤以尸其後事, 洪侯獨以舊門生, 惓惓致力於遺籍, 以爲永久圖. 其義良足感人, 是不可無一語以相其役. 且自以平生素慕公文, 而又嘗辱片言之奬, 顧不得一奉藝苑緖論, 以爲沒世恨. 今而託名卷端, 以效其區區之私, 實與有幸, 輒敢不辭, 而爲之序如此. 若公事業勳伐之盛, 國史自有紀, 玆不具論云. 農巖集卷之二十二

 

 

 

 

해석

 

계곡과 장유, 식암

 

國朝近世文章, 最推谿谷澤堂爲作家, 余嘗妄論: ‘二氏之文, 以謂谿谷近於天成, 澤堂深於人工, 比之於古, 蓋髣髴.’

우리나라 근세의 문장은 계곡(谿谷)과 택당(澤堂)을 최고로 추천하여 작가로 삼으니 나는 일찍이 두 작가의 문장은 계곡은 천성에 가깝고 택당은 인공미에 심오하니 옛날에 비교하자면 대체로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에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망령된 평을 했다.

 

二氏以後, 作者多矣, 然其能追踵前軌, 卓然名世者亦少, 最後乃始得息菴金公.

두 작가 이후로 작가는 많았지만 앞선 궤적을 따를 수 있어 우뚝하게 세상에 이름난 이가 또한 적었고 최근에야 비로소 식암 김공을 얻게 됐다.

 

公之文, 雖天成不若谿谷, 而人工所造, 殆可與澤堂相埒, 乃其瑰奇泬㵳之致, 鼓鑄淘洗之妙, 則又獨擅其勝云.

김공의 문장은 비록 천성으론 계곡만 못하고 인공미의 나아감은 거의 택당과 비슷하여 이에 특출하고 기이하며 넓혀 나간 운치와 고양시키고 주조하며 씻어낸 듯한 오묘함은 또한 홀로 독차지했으니 낫다고 하겠다.

 

 

 

조선의 문장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와 원인

 

蓋嘗謂我東之文, 其不及中國者有三, 膚率而不能切深也, 俚俗而不能雅麗也, 冗靡而不能簡整也.

대체로 일찍이 생각하길 우리나라의 문장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게 세 가지인데 거칠고 경솔하여 절실히 깊지 않고 속담을 써서 우아하고 곱지 않으며 쓸데없이 화려해 간단하며 정제되지 않았다.

 

以故其情理未晢, 風神未暢, 而典則無可觀, 若是者, 豈盡其才之罪?

이런 까닭으로 정과 이치가 밝질 않고 풍모와 정신이 드날리지 않아 법칙을 볼 만한 게 없으니 이와 같은 게 어찌 죄다 재질의 문제이겠는가?

 

亦其所蓄積者薄, 所因襲者近, 而功力不深至耳.

또한 축적된 것이 하잘 것 없고 이어받은 것이 최근의 것이라 공력이 깊고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식암이 우뚝한 이유와 문장의 특징

 

公旣才素高, 於學又甚博, 而尤好深湛之思, 鑱畫之旨.

김공은 이미 재질이 본래 높고 학문에 있어 또한 매우 넓으며 더욱 깊고도 담박한 생각과 날카롭게 구분짓는[鑱畫] 뜻을 좋아했다.

 

自少攻詞賦, 已能一掃近世陳腐熟爛之習, 而自刱新格, 每試輒驚其主司, 而一時操觚之士, 競相慕效, 以求肖似.

어려서부터 사부(詞賦)를 전공해 이윽고 근대의 진부하고 번잡한 습속을 한 번에 쓸어냈고 스스로 새로운 격조를 창안해서 매번 시험에선 대번에 주관자를 놀래켰고 한 때의 문장하는 선비들이 다투어 서로 사모하고 본받으려 해서 닮게 되길 구할 정도였다.

 

及其爲古文, 上溯秦漢, 下沿唐宋, 以放於皇明諸大家.

고문(古文)을 짓는 데 이르러선 위론 진나라와 한나라를 거슬렀고 아래론 당나라와 송나라를 따라와 명나라의 명문장가에 다다랐다.

 

參互擬議, 究極其變, 用成一家言, 大抵本之以意匠而幹之以筋骨, 締之以材植而傅之以華藻, 卒引之於規矩繩墨, 森如也.

서로를 참고하고 의론을 헤아려 변화를 궁리함으로 일가의 말을 이루니 대체로 구상[意匠]의장(意匠): 작문(作文)이나 회화(繪畫) 등에 있어서의 구상(構想)을 말한다.을 뿌리로 하고 근력과 뼈를 근간으로 하며 소재를 심는 것으로 엮고 화려함으로 덧붙여 마침내 법칙에 따라 인용하니 삼엄했다.

 

章箚, 尤精覈工篤, 其指事陳情, 論利害辨得失, 能曲寫人所不能言, 往往刺骨洞髓, 而要不失古人氣格.

소장(疏章)과 차자(箚子)는 더욱 정밀하고 핵심이 있고 기교롭고 깊어 일을 지적하고 정황을 진술함에 이해를 의론하고 득실을 판별해 사람이 말할 수 없는 것을 곡진히 묘사할 수 있었고 이따금 뼈를 때리고 골수를 트이게 했으니 요컨대 옛 사람의 기격을 상실치 않았다.

 

詩律亦沈健而麗絶, 不作浮聲慢調.

시의 법칙은 또한 깊고 굳세며 곱고 뛰어나 뜬 소리나 거만한 성조를 짓진 않았다.

 

 

 

인공미에 있지만 공무를 맡아 많이 지을 순 없었던 작품들

 

蓋其爲稿者凡二十五卷, 而試求其一篇, 近於膚率俚俗而冗靡者, 無有焉.

대체로 초고식암집(息菴集): 김석주(金錫胄)의 문집이다.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菴),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김좌명(金佐明)의 아들이다. 그가 1684(숙종10)50세로 죽은 직후 그의 아들 김도연(金道淵)식암선생유고(息菴先生遺稿)25권을 편집하여 철활자(鐵活字)로 출간한 뒤에 그의 문인인 홍숙(洪璛)이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부임하여 이를 다시 목각(木刻)하여 출간하였는데, 여기서는 홍숙이 출간한 것을 가리킨다.가 된 것이 25권으로 시험삼아 그 한편을 구해보니 거칠고 경솔하며 속담이 있으며 쓸데 없이 화려한 데 가까운 것이 있지 않았다.

 

嗚呼! 公之於文章, 其人工至到, 雖謂之奪天巧, 可也, 而於以接武谿澤也, 其可以無愧矣.

! 김공은 문장에 있어 인공미가 극도에 이르러 비록 하느님의 기교로움을 빼앗다고 말해도 괜찮고 계곡과 택당에 가까이 갔다 해도접무(接武): 예기』 「곡례당 위에서는 두 발 사이를 가까이 붙여 살살 걷고, 당 아래에서는 발을 멀리 떨어져 걷는다[堂上接武, 堂下布武].”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가까이 다가갔다는 의미로 쓰였다. 부끄러울 게 없다.

 

然公蚤被枋用, 身總軍國之重, 鉛槧之業, 太半爲籌畫韜鈐所奪.

그러나 김공은 일찍이 합격자가 되어 등용됨으로 몸소 나라를 지킬 중책과 문장 짓는 위업을 총괄하여 태반이 계책을 세움[籌畫]과 군사를 지휘하는 일[韜鈐]에 빼앗김을 당했다.

 

卒又限以中身, 不得大肆志於結撰, 而其所成就, 猶足以跨越一世, 焜耀後來, 此豈不尤難也哉?

마침내 또한 중년으로 죽어 매우 뜻을 글을 짓는데[結撰] 드러내진 못했지만 성취한 것이 오히려 한 세대를 훌쩍 넘어 후대에 빛나니이것이 어찌 더욱 어려운 게 아니랴?

 

 

 

식암 집안의 안타까운 후일담과 서문을 짓게 된 배경

 

始公旣沒, 嗣子都事道淵, 用鐵字印公全稿若干本, 旣行於世矣.

막 김공이 이미 숨지고 아들인 도사(都事) 도연(道淵)이 주조한 글자로 공의 온 초고 약간 책을 인쇄하여 이미 세상에 간행되었다.

 

今靈光守洪侯璛, 卽公侯芭, 謂公文宜百世不朽, 而集無板刻, 難保於傳遠.

지금의 영광군수(靈光郡守) 홍숙(洪璛)은 곧 김공의 문인[侯芭]侯芭: 후한(後漢) 거록(巨鹿) 사람으로, 양웅(揚雄)에게서 태현경(太玄經)법언(法言)을 배웠으며, 양웅이 죽자 그의 무덤을 만들고 3년 동안 거상(居喪)하였다. 흔히 스승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문인을 말할 때 견주어 말한다.인데 김공의 문장은 의당 백세토록 썩지 않아야 하지만 문집을 판각하질 못해 멀리 전해짐을 보장키 어렵다고 생각했다.

 

甫上官, 卽鳩工鋟榟, 來問序於余.

홍숙이 영광에 부임하자 곧 장인을 모아 판에 새기며 와서 나에게 서문 짓길 묻었다.

 

余竊念自公沒未幾, 己巳之禍, 都事君以憂死, 夫人竄海島, 室家蕩析, 爲世所悲.

내가 생각하기로 공이 숨진 것으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기사(1689)년의 화가 일어나 도사군(都事君)은 근심으로 죽었고 부인은 바다의 섬으로 유배되어 집안이 뿔뿔히 흩어져 세상에서 슬퍼했다.

 

今雖世道更化, 幽枉畢伸, 而公家乃無一遺胤以尸其後事, 洪侯獨以舊門生, 惓惓致力於遺籍, 以爲永久圖.

지금은 비록 세상의 도리가 다시 변화해 억울함[幽枉]이 다 펴쳤지만 김공의 집엔 한 명의 남은 자손으로 뒷 일을 주관할 이 없는데 홍후(洪侯)가 홀로 옛 문하생으로 잊지 못한 채[惓惓] 남겨진 책에 힘을 다해서 영원히 오래될 도모를 삼았다.

 

其義良足感人, 是不可無一語以相其役.

그 뜻이 참으로 남을 감동시킬 만하니 한마디 말로 그 수고로움을 돕지 않을 수가 없다.

 

且自以平生素慕公文, 而又嘗辱片言之奬, 顧不得一奉藝苑緖論, 以爲沒世恨.

또한 스스로 평생토록 본래 김공의 문장을 사모했고 또한 일찍이 짧은 말의 장려만을 외람되이 했지만 다만 한 번 문단의 서론을 받들 수 없었던 것이 세상을 마치도록 한이 되었다.

 

今而託名卷端, 以效其區區之私, 實與有幸, 輒敢不辭, 而爲之序如此.

이제 책머리에 이름을 붙여 구구한 사심을 드러냈으니 참으로 다행이니 대번에 감히 사양치 못하고 그를 위해 이와 같이 서문을 쓴다.

 

若公事業勳伐之盛, 國史自有紀, 玆不具論云. 農巖集卷之二十二

공의 사업과 공로의 융성함 같은 경우는 국사에 절로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선 갖추어 논하지 않는다.

 

 

인용

작가 / 지도

앞 글(風騷軌範序) / 뒷 글(劒客記聞)

雜言 / 한시사

121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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